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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8. 9. 12:05

Granddog (개손녀) 가 생길 뻔 카테고리 없음2022. 8. 9. 12:05

미국 남동부에 가있는 아이가 룸메이트 친구와 함께 개를 잠시 입양했었다.
아이는 개들을 무척 좋아한다. 아이 친구도 그렇고.
입양했던 개는 8 세의 저먼 쉐퍼드 믹스. 이름은 케이트. 설명에 얌전하고 house train 이 잘 되어있다고 해서 입양했다고.
막상 데려오니, 기대보다 훨씬 더 active 하고, 힘도 세고, 산책도 많이 시켜야 하고, 많이 놀아줘야 하고, 잘 때도 재워줘야 하는 아기 같더란다. 무엇보다 우리 아이의 앨러지가 심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고심 끝에 일주일 만에 foster home 에 다시 데려다줬다고. 리턴 결정 후, 아이랑 친구랑 많이 울었다고 한다.
비디오 영상에 보면 아이들과 있는 개가 많이 행복해보였는데.. 그래도 케이트에게 더 익숙한 foster home 에 가서 안심이다.

개가 똑똑하고 성격이 좋아서 어느 집에 가더라도 이쁨 받을 듯 하다. 케이트를 축복한다.


아이는 앞으로 적어도 10 년동안은 개를 입양 안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얼마나 큰 책임이 따르는 일인지 배운 듯 하다.
이 전 우리집의 H 는 놀자고 보채는 일이 전혀 없었기에 부담이 덜했다. H 는 couch potato 고양이과 개였다. 산책은 세 명이 돌아가며 시켰고, 엄마였던 내가 털깎고 목욕시키는 등등의 일을 했기에 아이는 그 부담을 덜 느꼈을 거다 (H 는 낯선 사람들이 자신의 몸에 손대는걸 정말 싫어헀었기에 직접 털을 깎아줬어야 했다). 


개 부모가 된다는게 어떤건지 아이도 이젠 몸으로 배운듯 하다.
나도 granddog (개손녀) 가 생겼다고 좋아했었는데 섭섭하긴 하다.
아이와 아이의 친구가 일하는 스케줄 중에, 어떻게 개를 보살필까  무척 염려는 되었었다. 
개의 조부모로서 아이가 보내주는 사진과 비디오에 하트도 날려주고 주위사람들에게도 자랑했는데, 일주일간의 작은 즐거움으로 끝났다. 개를 직접 돌보는 수고를 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개의 귀여움을 즐기는 수도 있군 하면서 약 1 초간 스치듯 생각했었다. 금방 "아이들은 많이 힘들텐데," 생각을 돌리긴 했다.  아이와 그 친구가 계속 룸메이트를 할 것도 아닌데, 나중에 개는 누가 데려가지, 우리가 데려와야 하나, 몇 년 후 개가 하늘나라로 갈 때 그 슬픔을 어떻게 감당하지 등등 많은 시나리오들이 떠 올라서 염려가 많이 되긴 했다.  

더 늦기 전에 아이들이 개를 리턴하기로 한 건 아주 잘 한 결정이다. 아이들이 삶의 결정들을 내릴 때 얼마나 심사숙고하고 큰 결심을 해야 하나 배운 좋은 경험을 한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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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
2022. 8. 4. 13:57

"저기야" 의 교훈 카테고리 없음2022. 8. 4. 13:57

자원 봉사하고 있는 곳, 담당 치과의사분이 뭔가 필요한 것이 없냐고 얼마 전 연락하셨다. 그래서 필요한 것 하나를 답했더니, 그 밑 책임자에게 말씀하시길, "(하나가 아니라) 네 개를 오더하라, Dr. 어쩌구가 원하니까, "고 그러셨단다. 그렇게까지 많이는 필요없는데 말이다.
그처럼 자원봉사하는 곳에서 내가 오히려 대접을 받아서 송구스러울 때가 있다. 전에 예상치도 않은 무슨 상을 준 적도 있다. 그 때, 어머니께 그 말씀을 드렸더니 "네가 어느 정도 사회적 위치(?) 가 있어서 그런 거지 아무나한테 안 그런다," 그러신다. 어머니께서 언젠가 어느 호스피스에서 자원봉사하셨던 경험을 나눠주셨다. 교회/단체에서 함께 자원봉사한 건 아니고 개인적으로 가서 잠시 일을 도우셨다. 어머니께서 영어도 잘 하셔서 다른 곳에서 영어 자원봉사도 하신 적도 있고, (내가 중학생일 때) 신학대학원 석사도 하셨지만, 전문 사역자나 의료봉사자가 아니기에 호스피스에서 부엌일/청소일을 도우셨다고 한다. 그런데 호스피스 직원들이 의료봉사자들이 오면 반갑게 뛰어나가서 환영을 하는데 일반(?) 봉사자들이 오면 그런 환영은 별로 없었다고 하셨다.
그 때 깨달았다. 아, 내가 그런 송구스런 대접을 받은데는 그런 이유도 있겠구나...
일상을 살아가면서는 사회적 지위를 의식하기보다는, 노동자 분들과 더 공감하는 하루하루이지만 말이다. 아이 아빠에게 배운 표현을 빌리자면 사회적 지위는 무슨 "개뿔."
그래도 일터에서 함께 일하는 분들이나 환자분에게서 전문성을 포함한 다른부분들을 인정 받는 건 느끼기는 한다.
그러할 때 내가 경험하는 세상과 나의 시각만에 한정되지 않고 다른 분들의 입장을 많이 생각해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또 다른 형태의 삶의 모습을 살아가는 분들을 향한 respect 를 잊지 않으려 많이 노력하려 한다.
부모님께서도, 부하직원들, 파출부 아주머니들, 아파트 경비 아저씨들에게 함부러 대하지 않으셨다. 아버지께서는 나이가 한참 어린 사람들에게도 존댓말을 쓰기도 해서 어머니께 핀잔을 듣기도 했었다. 동생도 함께 일하는 수술 어시스턴트들을 함부러 못 대하는 성격이라고 몇 년 전 나누기도 했다.
그 영향도 있겠지만, 오래. 전 다른 자원봉사를 했던 시절, 약간 불쾌했던 경험이 있어서 더 신경쓰는 편인지도 모르겠다.
대학원시절, 어딘가 자원봉사를 하러 갔었는데 어쩌다 보니 잔심부름 하는 일을 맡게 되었었다. 자원봉사하는거니까 개의치 않고 했다. 마침 학업과정 속에 큰 단계 하나를 무사히 마치고 다음 단계를 바라보고 있는 기간이었기에, 머리 안 쓰고 감정적으로 얽히지 않는 단순노동을 하는게 내게 더 낫기도 했다. 일과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수다에도 참여하고 싶지 않았고, 여러모로 피로했기에 '잔심부름 노동'에 기계적으로 집중했다. 일하면서, "한국 회사들 어린 여직원들이 이렇게 일하겠구나," 혹은 "한국 학교 내 선후배 위계질서가 이런걸까," 속으로 생각했다. 훨씬 뒤에 나온 드라마지만 <나의 드라마> 속 여주인공 이지안이 회사에서 하는 그런 종류의 일들이었다.
거기까지는 다 좋았는데, 내게 심부름을 시키시던, 나보다 나이 많은 한 분이 내 이름을 부르지 않고 "저기야,"라고 부르셨다. 한국 사회 분위기가 어떤지는 잘 모르지만 그 당시 내게 "저기야,"는 상당히 무례한 호칭으로 여겨졌었다. 나름 고급인력으로서 허드렛 일을 하고 있는데, 이름으로 불리지도 못하고 "저기야" 라고 불리면서 잔심부름을 하는 상태라니. 예를 들면 "저기야, 뭐 좀 가져올래," 하며 내 저 쪽에 있는걸 가져오라는 심부름이다. 그런 식의 대우는 거의 처음 받아봐서 더 열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이름을 부르고 존댓말로 얘기했다면 달랐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가장 낮은 곳에 임하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꾹 참고 그 기간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 당시 다니던 교회 구역예배에서 그러한 울분을 나눴던 기억이 난다. 모두가 공감하고 위로해줘서 고마웠었다.
그런 일을 겪은 훨씬 후, <나의 아저씨> 를 볼 때, 남주인공 박동훈이 여주인공 이지안을 한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챙기고, 또 이지안의 이름의 뜻을 물어보는 장면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저기야,"라고 불린 사건으로 인해, 이지안같은 위치에 있는 이들의 입장에 공감할 수 있었던 거다. 한국 고딩 학창시절, "반장"이라고 내내 불렸었고 , 미국 대학원시절 지도교수님하고도 서로서로 first name 을 부르는 입장이었고, 지금은 "Doctor 누구누구, 혹은 doc" 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으니, '이지안'같은 경험은 전혀 못해볼 수도 있었는데, 오래전 자원봉사의 현장에서 겪은 일이 감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 때문에라도 assistants 분들을 포함 남들에게 이것저것 해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할 때 최대한 공손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내가 도울 부분이 있으면 도우려고 한다. 그러할 때 그분들은 하지말라고 그냥 자신들이 하겠다고 그러기는 한다. 미국은 위계질서 의식보다는 평등개념이 훨씬 더 철저하기에, 누군가가 일을 시킬 때, 누군가의 명령에 따른다고 생각하는게 아니라, 그냥 그것이 자신의 job 이라고 생각하고 일한다. 일터의 setting 밖에서는 동등한 사람들일 뿐이다. 그래도 누군가가 거들먹거리면서 무례하게 자신에게 일을 시킨다면 불쾌해 할 것이다. 웨이터같은 이들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그 사람에 대해서 많은 걸 말해준다는 the waiter rule 도 공공연히 이야기되어지고있고.
요즘 한 일터에서 한 분이 내게 고민을 털어 놓으실 때가 있다. 여러모로 속상했던 일들을 나누시는데, 그 분의 얘기에 조금이라도 공감하면서 들어드릴 수 있는 것도 위와 같은 경험 덕분이다.
어쨌거나,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만나는 아주 다양한 많은 사람들을 어떤 사람의 배경, 위치, 지위, 나이 등등에 상관없이 동등하게 존중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어느 곳에서든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약한 이들을 알아보고 높이 올릴 수 있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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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

한국 한 서점사이트에서 베스트셀러 1 위에 오른 걸 보고, 미국 public library 에서 빌려서 읽었다.
저자의 아버지는 무신론자 과학자였다. 저자가 어렸을때, 삶의 의미가 뭐냐는 질문을 아버지에게 했는데, 아버지는 "Nothing!" 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열역학 제 2 법칙에 따른 Chaos 가 "our only ruler" 라면서, "..you are no different than an ant. A bit bigger, maybe, but no more significant" 라는, 자신의 믿음에 근거한 극단적인 답을 딸에게 해주는 아버지였다고 한다. (잔인하게 느껴진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 과학 전문기자가 된 저자는 삶의 방황의 순간에 삶의 의미를 구하기 위해서 David Starr Jordan 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진화론이 막 나왔을 때 진화론을 받아들인 Jordan 은 물고기종의 체계를 잡는 taxonomy 일을 했고 Stanford 대학의 초대총장을 지냈던 인물이다. 샌프란시스코 지진이 나서 그의 샘플들이 다 ruin 되었을 때도 그 위기를 극복해 낸 인물.
그러나 저자는 jordan 을 파고 드는 과정 속에서 위대한 학자처럼 보였던 David Starr Jordan 의 진짜 정체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살인자였을 가능성이 있었고, 또 생체계에서 질서를 잡고 진화시키려는 노력이 지나쳐서 우생학 (eugenics) 을 신봉했다. 우생학을 신봉하는 이들에 의해서 더 열등한 사람들로 간주되는 이들을 sterilization 수술하는 일들이 미국에서 행해졌다고 한다.

David starr Jordan 연구의 반전은, 그가
그토록 열심히 연구해서 체계를 세우려건 fish category 는 독립된 category 가 될 수 없다고 1980년대 cladists 에 의해서 주장되었다고. (더 자세한 설명 ).
인간이 붙인 이름이 없고 인간의 학문에서 중요하다 여기지지 않더라도 생물체는 존재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fish 라고 분류된 생명체들을 진화론적으로 서로 비교할 때 그들 사이공통점보다는 다른 category 들과의 공통점이 더 크다는 거다. 즉 Fish 라는 진화론적 category 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다.

Why Fish Don’t Exist

Part autobiography, part biography of fish taxonomist David Starr Jordan, and part spiritual guide for scientists, Why Fish Don’t Exist: A Story of Loss, Love, and the Hidden Order of Life is an ca…

ecocodebreakers.wordpress.com


결국 저자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연구했던 David Starr Jordan 을 통해서, Jordan 의 삶과 신념과는 전혀 반대되는 의미를 발견하는데...

인간들 중에서도 abnormal 로 여겨지는 이들이 normal 일수도 있고.. 기타 등등
기존의 체계를 버릴 때 새로운 세계를 마주하게 된다
- - 대충 그런 결론인듯.


감상:
마지막 부분 그녀의 새로운 발견에 대한 설명이 좀 부족하긴 했다. 내가 대충 읽어서 그렇기도 하리라. 사실 삶의 의미를 하나님에게서 찾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입장에서  공감이 좀 안되어서 몰입해서 읽지는 못했다. (물론 저자는 기독교를 포함한 어떤 종교도 언급하지 않는다. )
요즘 시대 사람들의 사고가 어떠한가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는 했다.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단순히 표현할수도 있지만 그렇게 싸잡아서 categorize 하는것은, 물고기들을 categorize 하고 우생학에 따라 열등한 사람들을 categorize 하던 David Starr Jordan 같은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기존의 체계나 사고방식이 절대적이 아닐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체계에 따라 그들을 정의해서는 안되고 각각을 존중해야 한다는 저자의 입장에는 동의한다.
저자와 같은 사고수준을 가지고, 그러한 삶을 살고 방황을 겪는 이들에게 기독교 믿음을 일차원적으로 present 했다가는 당연히 무시당하고 말것인다. 또 때로는 폭력이 될 것이다.
삶의 다양한 세심한 또 sophisticated dimension 들을 어떻게 신앙으로 address 할 것인가는 큰 과제가 아닐까 싶다.

그 외에:
개인적으로 Stanford 대학 가까이 살고 있으면서 그 학교 역사에 관심이 없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David Starr Jordan 이 그 학교 초대 총장임을 배웠고, 2020 년 그의 이름을 딴 학교건물등의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도 알았다. 책 초반에 집중이 안되어 포기하려다가, David Starr Jordan 이 스탠포드 총장이 된다는 대목부터 괜히 반가워서 끝까지 읽기를 결심했다.
또 학교 설립자 Jane Stanford 의 죽음에 얽힌 스캔들이나, 그녀는 스탠포드 대학이, 영매를 통해 죽은 이들을 contact 하는 "science" 를 공부하는 학교가 되길 바랬었다는 사실은 엽기적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그런 희망을 가졌던 건 죽은 아들을 그리워해서라니 참 안되기도 헀다. 이런 명문대를 설립했는데, 그녀자신의 삶과 결말은 불행했던 거 같아서 안타깝다.

Stanford will rename campus spaces named for David Starr Jordan and relocate statue depicting Louis Agassiz | Stanford News

President Marc Tessier-Lavigne and the Board of Trustees approved a campus committee’s recommendation both to remove Jordan’s name from campus spaces and to take steps to make his multifaceted history better known. Stanford also will relocate a statue

news.stanford.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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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