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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에 해당되는 글 4

  1. 2017.02.13 릴케: 젊은 시인에게 충고
  2. 2017.02.10 출산지도?
  3. 2017.02.08 ....
  4. 2017.02.04 Guilt and Grace
2017. 2. 13. 15:35

릴케: 젊은 시인에게 충고 카테고리 없음2017. 2. 13. 15:35

젊은 시인에게 주는 충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마음속의 풀리지 않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

인내를 가지라.

문제 그 자체를 사랑하라.

지금 당장 해답을 얻으려 하지 말라.

그건 지금 당장 주어질 순 없으니까.

중요한 건

모든 것을 살아 보는 일이다.

지금 그 문제들을 살라.

그러면 언젠가 먼 미래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삶이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 줄 테니까.



삶과 세상의 많은 문제들, 현상들, 사람들, 또는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서 쉽게 결론을 내리는 태도에 대해서 생각하던 중 마주친 시.  당장 결론을 내리려는 태도, 또 많은 것에 대해서, 사람들과 하나님에 대해서 쉽게 평가하고 단정하는 태도 또한 reductionism 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릴케가 시인 지망생에게 했다는 충고이라지만, 시쓰기/감상에 큰 관심이 없는 이에게도 참고가 된다. 


다음의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말 또한 떠오른다. 신앙은 답을 모른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 이라..


"나는 기독교 신학자다. 사람들은 내가 그런 질문에 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른다. (중략) 그러나 내가 볼 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답 없이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이렇게 사는 법을 배울 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너무나 멋진 일이 된다. 신앙은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위의 인용문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본다.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간다고 해서, 문제를 회피하고 내버려두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거 같다. 인생과 신앙의 문제들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struggle 하면서, 어설픈 결론을 내리려 하지 않고 인내를 가지며 나아가는 것. 어설픈 결론을 진리인 양 설파해서는 더더욱 아니되고. 어쩌다가 얻게 되는 답조차 하나님의 지혜에 못이르는 불완전한 결론일 지 모른다는 여지를 항상 남겨두고 열린 맘과 자세를 유지하는 것.


많은 경우, 해답은 커녕 질문조차 정확히 뭔지 모르고 헤매이고 고뇌할 때가 더 많은 거 같다.

 

기의 온갖 질문들과 어설픈 답들 끝 마지막 부분,  욥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질문들에 해답은 안 주시고 다른 말씀들을 하시며 (우문현답?)  모습을 드러내신 하나님이 문득 떠오른다. 그런  하나님을 마주하고 신뢰하는 것... 

:
Posted by pleasing2jc
2017. 2. 10. 10:52

출산지도? 카테고리 없음2017. 2. 10. 10:52

출산지도를 다시 그려보았다는 오늘 신문기사

정부의 출산장려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기 위한 환경이 잘 안 되어 있다는 것이 기사의 결론이다.


작년 말, 가임여성 인구수 지도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분노했지만 나 또한 그러했었다.


옛날은 족보/계보나 농경사회 노동력  위한 출산의 의무를 여성들에게 명령하고 강요하는 전근대적 사회였다면,

(또 여전히 그러한 면이 남아있기도 하고), 

지금의 출산장려는 국가 생산력/경쟁력을 위한 것인 듯 하다.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는 환경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데,

앞뒤 안 가리는 출산장려/요구만 한다면, 

여성만을 애 낳는 기계나 가축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 더 나아가 모든 사람들을  가축취급하고 objectify 하는 사고방식이다.


상식을 가진 이들이라면 대부분 위와 같이 생각할 것이다.

인간 존엄성과 권리가 무시된 상태에서 출산의 의무를 요구당한 경험이 조금이라도 있는 여성들 뿐만 아니라.

(인종차별을 받아보지 않은 이들 또한 인종차별에 대해서 분노하는것이 상식인거처럼)


"사랑에 정복당할 시간도 없는 희한한 시대"에서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3 포 를 넘어선 7 포, 8 포세대라는 젊은이들이,

어떤 목적을 위해서 출산하라는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서,

사랑하기에 또 사랑하기 위해서 아이를 낳을 수 있고 잘 키울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이상적일텐데...

그런 환경에서 아이들도 사랑받고 존중받으며, 인간답게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을 텐데. 

:
Posted by pleasing2jc
2017. 2. 8. 15:47

.... 카테고리 없음2017. 2. 8. 15:47

오늘 기도하면서, 문득 How was your day, 예수님? 하고 여쭸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참 많은 이들을 돌보느라 일이 많고 가슴이 아프구나" 하시는 장면이 떠올랐다. 

(상상일뿐이지만, 공생애 기간동안 보여주신 예수님 모습도 그러했으니... )

오바마가 대통령일 때, 임기 기간동안 주름과 흰머리가 부쩍 늘어나는 걸 보면서, 미국 대통령이라는 job 이 어떠한 것인가 실감했었다.

하나님/예수님/성령님께서는 더 하시리라 - battlefield, 굶주리고 핍박받는 이들, injustice 하에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하시느라.  

그들의 기도를 듣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내 기도까지도 들어주시는 게 한없이 감사할 뿐이다.


오늘, 이곳 교회의 소그룹 모임에 갔었다. 

올해의 resolution 중 하나가, 교회의 소그룹 모임에 가기 시작하는 거였는데...

2 년 전 가려다가,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겨서 못 갔었었고,

오늘 처음 가 봤다.


전에 이곳 교회 분에게서 일대일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당시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깨어진 이들이 vulnerable 한 상태로 서로를 있는 그대로 accept 하며 예수님을 바라보는 걸 본다.

 

https://vimeo.com/202681577

지금 다니는 교회의 지난 주일 설교 - No body's perfect 설교처럼,

의로운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와 같은 사람들.

I need God, I need Jesus. I need You desperately 라고 기도하는 것이 존재로 느껴지는 사람들.


종교적 열정이나 열심이 있는 모임도 아니고,

어떤 깊은 성경연구를 한 것도 아니고,

아주 단순한 나눔을 했을 뿐인데도 가슴이 저며올 정도로 깊은 인상을 받고 왔다.

서로서로 위해서 더더욱 기도한다.

:
Posted by pleasing2jc
2017. 2. 4. 15:37

Guilt and Grace 카테고리 없음2017. 2. 4. 15:37

Guilt and Grace - 폴 투르니에의 책 제목이다. 책은 집에 있는데 아직 읽지 못했다.  아무튼 밑에 쓰는 건 그 책과는 상관없이, 주제에 관한 my own random thoughts..

1.   최근 누군가로부터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A city set on a hill cannot be hidden. In the same way, let your light shine before others, so that they may see your good works and give glory to your Father who is in heaven. Matt 5: 14,16" 를 인용한 감사 이메일과 전화를  받았다. 지극히 작은 평범한 일을 했을 뿐인데......     최근 의기소침해져 있었다는게 영적으로 전달되었는지,  encouragement 의 차원에서 해 준건 아닌지 싶다.

2.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 성경말씀이 스스로에게 적용된다고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스스로를 세상의 빛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그다지 없다.

3.   항상 하나님의 빛을 간구하고 그런 빛과 소금이 되길 소망하며 기도했지,   이미 세상의 빛이 되었다고 여겨 본 적은 별로 없다.

4.   왜 그럴까 생각해 본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에 비하면 죄인일 뿐이고 한없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을 사랑해 주시고 의롭게 하시는 그 은혜는 분명 알고 있는데,

6.   (예수님 발끝은 커녕) 사도바울이나, 본훼퍼나, 짐 엘리엇이나, 마더 테레사나, 또 일부 평범하지만 "대단한" 사람들의 발끝에도 이르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기 때문인거 같다. -- 믿음, 헌신이나 사역 등의 면에서... 특히 헌신이나 사역의 면에서. 

7.   그래, 잣대가 뭔가. 헌신이나 사역,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역에의 헌신이라고 볼 수 있을까?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구조화/체계화되어있는 사역을 안 하고 있기에? 

8.  흠... 그런면에서 부족하기에,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빛과 소금이 되는 기준에 못 이르는 것처럼  움츠려져 있는거 같다. 

9.  한 종류의 기준에 못 이른다는 데서 오는 죄책감에 가깝다고나 할지.

10.  그런 죄책감은 하나님께서 오는 걸까? 

11. 어떤 구조화/체계화된 사역 하나를 한다면, 빛과 소금이 된 듯 떳떳해 질 수 있을까?

12.  어떤 기준/목표에 이르지 못해서 오는 죄책감에 의해서 drive 되는 헌신 vs.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되어서 하는 헌신의 차이는 뭘까?

13.  죄책감의 열매를 낳는 헌신 vs. 사랑과 은혜의 열매를 맺는 헌신 이라고 한다면 너무 섣부른 결론일까? 

14. 그리고 일이나  라이프 스타일에의 헌신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인격에의 헌신은 어떤 모습일까? 예수님의 사랑에 항복하며 하는 예수님에의 헌신이, 일이나 라이프 스타일에의 헌신으로 자연스럽게 이르게 되는 것이고.. 또 그런 순서를 밟아야 죄책감의 열매보다는, 사랑과 은혜의 열매를 낳게 되는 것 아닐지...

15. 목표에 못 이른다는 죄책감에 의해서 이끌리는 삶이 아니라, 은혜에 의해 이끌리는 삶을 살고 싶다. 그것이 느리게 걸어가는 삶이라 하더라도... 그의 목자국 난 손 잡고 사랑과 은혜의 발걸음 따라서, 차곡차곡 꽉 찬 걸음으로 걸어가고 싶다. 

16. 그러고 보니 마태복음 5:14, 16 의 말씀도 예수님 십자가 사건 이전, 예수님을 따르던 여전히 버벅거리던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하신 말씀인 듯... "(성령의) 불" 받은 사도행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성경은 잘 모르지만, 단순하게 보니 그렇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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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