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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7 08:52

이거 아닐까... ....2017.11.07 08:52


“For I was hungry and you gave me something to eat, I was thirsty and you gave me something to drink, I was a stranger and you invited me in, I needed clothes and you clothed me, I was sick and you looked after me, I was in prison and you came to visit me … Truly I tell you, whatever you did for one of the least of these brothers and sisters of mine, you did for me” (Matthew 25:35-36, 40)

12Then Jesus said to his host, “When you give a luncheon or dinner, do not invite your friends, your brothers or sisters, your relatives, or your rich neighbors; if you do, they may invite you back and so you will be repaid.13But when you give a banquet, invite the poor, the crippled, the lame, the blind, 14and you will be blessed. Although they cannot repay you, you will be repaid at the resurrection of the righteous.” (Luke 14:12-14)

Posted by pleasing2jc
2017.08.07 22:38

already but not yet 유감 ....2017.08.07 22:38

신학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는 concept 혹은 phrase, 'already but not yet' 에 괜히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다.

왜 Not yet 라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한 마무리를 했냐는 거다.


Not yet but already 도 아니고, 

Already however not yet 도 아니고,

왜 하필이면 already BUT NOT yet 인지?


Not yet 의 현실이 너무 길게 느껴진다.


뉴스, 세상, 인간역사,...


한 시대를 찬란하게 장식했던 제국의 유물이 전시된 박물관에 가도,

새파랗게 젊은 청년들이 목숨을 잃은 전쟁 역사 영화를 봐도

느껴지는 역사의 피로감과 허무함, 잔인함.


시리아난민들과 아프리카 가뭄 기타, 국제적 상황 등등...


종교 개혁 500 주년 기념이라는데 여전히 미완성이라는 종교개혁,


미래학 강의를 들어도 답답하기만 하다.

흥망성쇠의 역사는 수천년간 반복되어 왔는데 뭘 또 진보시키려 하는지...


Not yet... not yet... not yet...not yet..

앞으로 또 다른 이천년이 될지, 수만년이 될지?


괜스레, already but not yet 탓을 하며,

내 맘대로 위 phrase 를 바꿔본다. 그저 혼자 그렇게 되새기며, 비관주의에 빠지려하는 스스로의 시각을 좀 바꿔보고자.  

already but not yet, soon and forever?

already but not yet, BUT already, soon and forever?


(soon 이라고 해서 이단적인 soon 이 아니라 요한계시록 22: 20 에서의 soon ..)


신학적으로 올바른 구조를 가지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지만,

좀 더 온전한 큰 그림의 phrase 를 가지고 싶다.


하지만서도,

not yet 속에서  not yet 를 fully embrace 하고 groan 하고 lament 하는 것 또한 진정한 소망에 다다르는 길일지.


Posted by pleasing2jc

근 페미니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미디어의 영향이 크다. 

한국미디어도 미디어지만, 최근 오바마가 feminism 에 대해서 쓴 도 있었다. 오바마의 글은 힐러리를 지지하는 정치적 동기가 배면에 있는걸 무시할 수는 없지만  오바마가 자신의 딸 둘을 생각하는 맘도 잘 나타나 있다.  패션, 화장품, 이성관계 등에 대한 기사가 대부분인 여성잡지[각주:1]에 미국 대통령의 페미니즘에 관한 글이 실렸다는것도 상징성이 있다. 최근 십대 남 vs 여학생이 보는 미국잡지를 비교한 기사를 봤다. 진로/커리어 등등에 관한 기사가 대부분인 남학생 잡지에 비해서 여학생을 대상으로 한 기사들은 위의 잡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오바마 뿐 아니라 많은 딸 가진 부모들이 그러하겠지만 나 또한 아이가 살아갈 삶과 세상에 대한 바람이 있다.  아이는 몇 년 전부터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한다. 그건 남녀평등/동등을 추구하는 것이지 여성우월/남성혐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뚜렷이 밝힌다.  아이와 가벼운 대화를 하다가 가끔 남성을 깎아내리는(? 특정남성들이 아닌 불특정다수의 남성들) 농담이라도 하면 그건 (페미니스트가 아닌) man-hater 적 발언이라고 한다[각주:2]  Man hater 라는 표현도 아이에게서 배웠다. 그런 순간들이  아이의 perspective 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 밖에도 내게 페미니즘을 들여다 볼 동기를 부여한 개인적 경험이 있다. 


==================

여러 책을 읽고 있는 중. 책을 읽으면서 배우는 건 feminism 이라기 보단 gender debate 이라는 term 이 더 적절하다는 것.

속독하며, Critical reading 보다는 초보자로서 overview 를 하는 것과 배움에 중점을 두고 있음. 


다 읽은 책들:


(1) Neither Complementarian nor Egalitarian: A Kingdom Corrective to the Evangelical Gender Debate by Michelle Lee Barnwell. 신학교수가 쓴 책. complementarian 과 egalitarian 이 있다는 것도 모르던 내게 좋은 입문서가 되었음. 


(2) Jesus Feminist: An Invitation to Revisit the Bible's View of Women by Sarah Bessey. 샛노란색 표지에 비교적 큰 활자를 지닌 얇은 책의 겉모습때문에, 읽기 전부터 괜한 편견을 가졌다. sophomoric 한 책이 아닐까? 그런 편견을 가지고 읽기 시작해서인지 중간중간 그렇게 여겨지는 일부 단락이 있긴 했지만, 무척 유익한 책이었다. 그 중 한 챕터는 마르틴 루터 킹 쥬니어의 "I have a dream" 연설을 떠올리게 할 정도의 호소력을 가졌다. 


위 책들의 결론: egalitarian 이나 complementarian 이라는 게 중요한게 아니라 Unity in Christ 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 다음 말씀처럼:


28 There is neither Jew nor Gentile, neither slave nor free, nor is there male and female, 

for you are all one in Christ Jesus. (Galatians 3:28)



적용에 대해서 크게 다루지 않는다. 특히 Sarah Bessey 는 자신도 잘 모르겠다며 각자의 처한 곳에서 기도하며 지혜를 구하며 예수님께 충성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냐고. 


(3)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기독교책이 아님. 20 분 동안 훑어보기만 했다. 일본의 상황이 한국과 비슷하다는 것. 




읽고 있거나 읽을 책들.

다음 책들은 적용점을 더 다룰 듯 하다. 두 책 모두 다 egalitarian 시각.


(1) What Paul Really Said About Women: The Apostle's Liberating Views on Equality in Marriage, Leadership, and Love by John T Bristow 

(2) Partners in Christ: A Conservative Case for Egalitarianism by John G Stackhouse Jr. 



(3) Exclusion and Embrace by Miroslov Volf 에도 Gender debate 에 대한 한 chapter 가 있던 걸로 기억된다. 다시 읽어봐야겠다.



성경의 controversial 한 구절들을 다루는 것은 어느 한 책에 집중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이 책 저 책에 흩어져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 읽은 바로는). 언제 시간 나면 그것들을 노트에 정리하던지 해야겠다. 


짧은 예를 들자면, 

(1) 남성이 가정의 head 라고 했을 때 그 head 의 원어적 의미는 가장/리더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전쟁터에 뛰어드는 군대의 선발(선두?)의 의미가 크다는 것. 

(2) 창세기에 여성을 남성의 helper 로 창조했다는것도 여성만 남성의 helper 라는 것이 아니라 상호간 helper 라는 것.... 등등. 

helper 로 번역된 히브리어 원어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묘사할 때도 사용되는 '강한?' helper 를 의미한다고 한다. 


================


- 내면에 지닌 남성혐오 및 여성혐오 도 다뤄야 하고, 그와 더불어  인종 & 국적 & 종교 & 나이 & LGBTQ+ &기타 등등 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편견들도 들여다 보고 고쳐야 하고 요즘 이래저래 바쁘다.  일터에서 워낙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더더욱 그렇다.



  1. 잡지 이름 탓(glamour) 인지, 필터를 걸어놓은 우리집 인터넷에선 잡지 페이지가 열리지도 않는다. [본문으로]
  2. LGBTQ+ 등에 대해서도 한번 잘 못 얘기했다가 기독교 근본주의자로 찍히기도 했다. 진땀빼며 아니라고 설명해야했음. [본문으로]
Posted by pleasing2jc
2016.07.04 21:27

신학초보's Reading on Justification ....2016.07.04 21:27




  • 지난 몇 주 정도 동안 John Piper 와 NT Wright 의 Justification debate 책을 다시 좀 읽으면서 정리해 봤다. 
  • NT Wright  의 The New Testament and the People of God 와 Jesus and the Victory of God 도 좀 읽었음.
  • 일상을 살며, 또 다른 책들도 읽으면서 정리하는 거라서 진도는 더디게 나감.
  • 여기저기서 접하게 되는 칭의론에 대한 잡다한 "정보들" 속에서 혼란스러워서 시작한 작업이다. 최근 갈라디아서를 다시 읽으면서이번 기회에 꼭 칭의논쟁에 대해서 정리하고자 싶었다.
  •  칭의논쟁에 대해서 오래전부터 들어왔고, 이전에 책을 좀 읽기도 했고, 또 다른 이들의 요약을 읽기도 했다. 그래도  이해가 안되어서 디사 책을 읽고 본격적으로 정리해보자 결심했다.
  •  몇 년 전에 조금 읽었을 때보다 다시 읽으니 더 이해가 잘 되는 편. 지금까지 두 사람의 책을 약 70% 정도 읽었다. 
  • 신학초보로서, 숙제하듯 그 책들을 읽으며 드는 생각은 "이건 정말 신학적 논쟁이구나," 라는 것.  
  • 이런 신학적 논쟁은 자연현상이나 화학반응 등을 잘게 쪼개고 분석해서 그 mechanism 을 밝히거나 modeling 을 하는 과학적 작업과 많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동안 (본격적) 신학 혹은 교파 등에 약간의 거부감을 가져왔는데 , 그랬던 이유는 하나님을 알기 이전에 신학 등에 섣불리 사로잡히는 것이 마치 경이로운 대자연을 알기 전에 과학 공식이나 수식에만 집중하는 모습 같아서였다. (이건 한 때 과학/공학 을 공부한 이로서 개인적 경험에 비춘 지극히 personal statement)
  • NT Wright 이 잘 하는 얘기, "성경은 (doctrine 의 모음이 아니라) 이야기다. 시나 드라마, 교향곡과 같다" 등등의 이야기도 그런 이유에서일 듯 하다. 
  • 신앙의 계보를 이어온 힘은 witness 들의 testimony 이지, 신학논쟁은 아니다. - 여기서 testimony 는 간증일수도 있지만 일반적 의미의 간증보다는 증언의 의미가 크다. 
  • John O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나? --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런 책들을 읽고 하는 이유가 "What's the minimum requirement to be saved?" 라는 질문에서 시작해선 안될듯. 이 모든 것을 drive 하는 원동력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인간이 그에 반응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다. 


What is the Gospel?

1. NT wright: Jesus is the King, Jesus is the Lord.  -- Mata-narrative 을 강조

2. 전통적(?) 관점: Justification by Faith  -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 개인 구원을 강조.

 

"Justification" 의 차이. 


1.  Piper 가 옹호하는 칭의 :  

Justification by faith, 그리고 그로 인한 imputed  righteousness  를 강조한다.

Martin Luther 의 신학


2. NT Wright 의 칭의:  

                     God's righteousness 즉 God's faithfulness to His covenant 로 인해 인간은 justify 되고, 

                      covenantal  membership 을 가지게 된다. 

                     John Calvin  의 "In Christ" 신학을 더 지지 (마르틴 루터보다)


첨부:   Justification debate 에 관한 강의 podcast 를 대충 들었다. 루터를 지지하는 이의 강의지만 Thomas (토마스 아퀴나스) - Luther/Calvin 의  doctrine 의 Justification 을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Calvin 또한 imputed righteousness 를 얘기했다고. acquittal of guilt 의 의미에서? - 글쎄 그 정도 수준이라면 상당히 얄팍한 justification 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니, Calvin 의 논리를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그러나 debate 의 세세한 부분까지 알려면 줄기보다 가지로 빠지는 양상이 될 수도 있으니  개요만 이해할 정도면 될 듯 하다 - To be done much later. 


God's righteousness 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의 차이가 칭의의 outcome 의 차이를 가져오는듯 하다. (outcome 이라는 용어 자체가 적절한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서두)


1. NT Wright 가 믿는? righteuosness 정의

God's faithfulness to His covenant (하나님의 백성과의 관계적인 면이 크다)

2. John Piper 가 믿는? righteousness 정의 

God's faithfulness to preserve His Glory, His Holiness. 

(관계적 요소보다는 하나님 그 분 자체의 영광 등에 초점을 더 맞춘듯 느껴진다.)  John Piper 가 그의 설교에서 정의한 하나님의 Holiness 는 "완전함/완벽함" 에 가깝다  (source 를 다시 찾기가 귀찮아 다시 안찾음. 간단한 web search 를 하면 나옴)



 (몇 페이지만 읽어본) Alister McGrath 의 칭의에 관한 책에 따르면, NT Wright 의 관점과 일치한다. 히브리어 등 어원을 따지면, 
하나님의 righteousness 는 그의 covenantal faithfulness  에 가깝다고 한다.


 


어떤 세계관에 기반을 두는가?


1. NT Wright 이 강조하는 칭의론은: 1 세기 유대인의 세계관 혹은 second temple 유대교의 세계관의 framework 에 큰 기반을 둔다.  

즉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 => Exile => Return of Israel 등등. 그렇기에 Justification 의 Covenant 적 의미를 강조하고, 회복된 하나님 나라는 아브라함과의 언약과 (Genesis 12, 15) 더 상관관계가 있다. 

    하나님과의 아브라함과의 언약 자체가 아담 &이브의 죄로 인해 타락한 인류를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 구원하고 복주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2. John Piper 의 책에 직접적으로 언급되진 않지만 유추해 볼 때, 전통적인(?) 칭의론은 Creation-Fall-Redemption-Restoration 의 framework에 기반을 두지 않았을까 싶다. 회복된 하나님 나라는, 아담&이브의 죄  (창세기 3 장) 이전의 상태와 더 상관관계가 있다고 해야 할지?




(NT Wright 에 따르면)1 세기 유대인들의 믿고 있던 바 (narrative) 는 대충 다음과 같다.


1.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받고 귀환하고 언약을 회복하시고 성전을 재건되고 하나님께서 시온에 오심으로서..

2. 이스라엘 백성을 온 세상을 축복하는 통로로 삼으신다는  세계관. 

3.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은 로마통치 하에서 Torah 를 철저히 잘 지키면 그 시대가 앞당겨질거라고 생각했다고. 

4. 그들의 메시야관은 영광 속에서 오시는 화려한 정치적 메시야. 

5.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에겐 정치적 동기가 있었다.  



(NT Wright 에 따르면) 그런데 예수님 사건은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 백성이 중심인 위의 흐름의 framework 는 그대로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참이스라엘 예수님이 중심이 되는 narrative 다.


1. 참이스라엘은 예수님. (ethnic group 으로서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2. 이스라엘 민족이 겪으리라 믿어졌던 고통과 고난을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으로 겪으신다.

3. 에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로 참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4. 예수님께서 왕이신 하나님 나라가 열린다.


부: NT Wright 이 지양하고자 하는 칭의는:


(1) 위와 같은 meta-narrative 를 깡그리 무시해 버리고 아래와 같은 과정만 쏙 빼 와서 그것에만 집중하는 것.


죄인  --- (justification by faith)-----> 의인 (imputed righteous)  


(2) 그렇기에 영혼 구원에 집중하고 개인구원. 죄의 용서&개개인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십자가의 의미 전부가 되어버린 현상.

NT Wright 이 죄의 깊이나 죄의 용서 측면을 약화하는 것은 아니다. "(Membership in God's family) includes as its central element the notion of having one's sins dealt with: "family membership" is not opposed to "forgiveness of sins," but is its proper and biblical context,"  (Justification, p134) 

NT Wright 이 강조하는 것은 죄를 사함받는데서 끝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것. 그에 한정되지 않은 장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데 왜 죄사함에만 집중하느냐 하는 것이다.

(3) 영혼이 구원되어서 사후 heaven 가는 것이 목적인 크리스챤의 삶 

(4) Righteous 를 moral righteous 로 정의하는 것. 

(5) Faith 를 하나님의 faithfulness 로 보기보단 인간의 믿음으로 보는것
(6) Imputed righteousness  는 아니다? - Law court setting 에서 법관의 righteousness 가 죄인에게 전가되지 않는것처럼.  Imputed righteousness 보다는  declaration of status of the righteousness 를 더 옹호. (흠...  이건 잘 수긍이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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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Law"의 목적? 혹은 "Law"를  지키는 동기의 차이: 이것을 정확히 아는 것이 마르틴 루터의 갈라디아서 해석과 NT Wright 의 해석의 차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거 같고  (이건  NT Wright 이 정리한게 아니라 내가 정리해 본것.. 틀릴 수 있음)

 

1.  아브라함 언약 그리고 모세의 Torah - 하나님 언약 백성으로서의 표시와 삶의 방식?

2. Second Temple Judaism:  하나님 언약 백성으로서의 표시도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Redemption 을 위해서 더 열심히 지킴

3. 갈라디아서 시대: 

NT Wright 에 따르면 Judaizers in Galatians - Gentile Sinners 가 아닌, 하나님 백성 (인 유대인) 이 되기 위해서 circumcision 이 필요하고 Law 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  

마르틴 루터 등에 따르면: 갈리다아에 율법을 지켜야 justify 된다던 무리가 있었다. 하나님 백성 vs. 이방 죄인의 구도라기보다는 의인 vs 죄인의 구도

4. Martin Luther 시대의 Catholicism - Salvation by faith and moral good works.  구원받기 위해서 moral good works 도 필요하다고? 그에 반대한 마르틴 루터는 Justification by faith 를 주장했고.
5. 현대의 율법주의 (legalism) - Justification 보다는 성화를 위해서 율법적인 것들을 강조하는 면이 크기도 하다? 하지만 구원의 여부와 시점 등이 중요시되던 시절, 특정 종교활동을 안 하거나 어떤 "세상적" lifestyle 을 고수할 경우 " 그 사람 구원받은 거 아닌거 같다," 뭐 그런 질문들을 하기도 한 걸 보면 굳이 성화의 범위에서의 legalism 은 아닌 듯.


Second Temple Judaism 의 유대인들이 법을 지킨 동기와 구약 시대 유대인들이 법을 지킨 동기는 좀 다르다. 하나님 언약 백성으로서의 표시인가? 아니면 법을 지킴으로서 하나님 언약 백성의 redemption 을 앞당기려했나 뭐 그런 차이. 다른 시대의 율법주의들도 미묘한 차이가 있다. 



Question: Law, Life, Action, Work, Obedience 의 연관관계는?

Holy Spirit?

성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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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나 로마서를 어떻게 읽어야 할 지는 아직도 온전히 정리가 안된다. 사도바울(Great uncle Paul in God's family !)  본인이 되지 않는 한 어떤 맘으로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썼는지 다 이해는 못 하리라. 더 공부하면서 tidy up 해야 할 듯. 


그러나 그 책들을 어떻게 읽느냐 보다는, 어떻게 살아내느냐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을 볼 수 있는가? 그 안에 어떻게 머물까가 더 큰 질문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큰 그림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웅장한 뜻과 사랑을 더 깊이 알아간다는데 이 작업의 의미를 둬야 할 듯. Unfathomable God...


33 Oh, the depth of the riches and wisdom and knowledge of God! How unsearchable are his judgments and how inscrutable his ways! (Romans 11:33 ESV)

====================


NT wright 의 최근 설교/강의

그가 얘기하는 성경의 narrative 도  진화되고  더 comprehensive 해 지는걸 볼 수 있다. 



=======


여성혐오 사건들, 공무원의 망언 등등 으로 인해 분노하고 있는 한국에서도...

최근 여러 사건으로 큰 아픔을 겪고 있는 미국에서도...

John O 목사님이 오늘 인용한 갈라디아서 말씀과 같은 복음의 은혜와 능력이 충만해지도록 기도한다....


 26 for in Christ Jesus you are all sons of God, through faith. 27 For as many of you as were baptized into Christ have put on Christ. 28 There is neither Jew nor Greek, there is neither slave[g] nor free, there is no male and female, for you are all one in Christ Jesus. 29 And if you are Christ's, then you are Abraham's offspring, heirs according to promise. (Galatians 5:26-29 ESV)



Posted by pleasing2jc
2015.12.15 17:18

루시드폴: 아직 있다 ....2015.12.15 17:18




친구들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축 처진 어깨를 하고

교실에 있을까 


따뜻한 집으로

나 대신 돌아가줘

돌아가는 길에 

하늘만 한 번 봐줘


손 흔드는 내가 보이니 

웃고 있는 내가 보이니 

나는 영원의 날개를 달고 

노란 나비가 되었어 


다시 봄이 오기 전 

약속 하나만 해주겠니 

친구야,

무너지지 말고 

살아내 주렴


꽃들이 피던 날

난 지고 있었지만 

꽃은 지고 사라져도 

나는 아직 있어


손 흔드는 내가 보이니 

웃고 있는 내가 보이니 

나는 영원의 날개를 달고 

노란 나비가 되었어 


다시 봄이 오기 전 

약속 하나만 해주겠니 

친구야,

무너지지 말고 

살아내 주렴 




누가 누군지 잘 모르겠는 아이도르  등과, 공감하기 힘든 감성팔이 사랑노래들만 있는 가요계인줄 알았는데 

관심을 갖고 들어보니 깊이 있는 노래들이 많다. 

이 시대 (젊은) 세대 등 의 아픔을 노래하고 위로하고 희망을 암시하기도 하는 그런 곡들.


이 시대의 사람들이 만해 한용운님이나 윤동주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일제시대를 살아간 이들의 심정을 느끼듯,

먼 훗날의 사람들은 이 시대의 노래들을 들으면서 이 시대가 어떠했나 피부로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곘다.


<Prophetic Imagination> 책에 보면, prophetic imagination 은 prose (산문)이 아니라 lyrics (운문, 시, 가사?) 를 통해서 표현된다는 말이 있다. 

그런 lyrics 가 오늘 날 기독교에 있는가.. 문득 궁금해진다.  잘 모르겠다. 없다는 의미의 잘 모르겠다가 아니라 진짜로 잘 모르겠다. 

Posted by pleasing2jc

한국에서 미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지 20 여 년이 지났다. 미국생활 초기, 대학생일 때는 매년 한국에 갔었다. 지금과 비교해 자주 나갔어도 인터넷이 발달이 안 되어서인지, 유행어나 표현이 바뀌는것등에 적응 안 될 때가 있었다. 미국 온 후 1-2 년 후 갔을 때, 친구들이 "당연히" 라는 표현을 "당근" 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 안 되었고 (당근은 채소의 한 종류인데 왜 그런 표현을 쓸까?  적응 안되었음.) 또 언젠가부터는 "맛있다"를 "맛나다" 라고 하는 것이 생소했다. 


그와 더불어 한국에서 사회 속 다양한 사람들을 분류하는 기준에도 소위 유행이 있다는 걸 본다. 물론 빈부격차나 신분에 따른 분류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보편적이다.. 한국에서 특이한 점이 있다면 신조어로 한가지 기준이 표현되고 그  한가지 기준이 다른 기준들에 비해서 더 부각된다는 것이다. 그 유행이 미국의 내게는 아직 생소한데, 어느 새 한국사회에선 일반적인 것이 되어 있을 때 놀란다. 


그동안 notice 한 흐름은 다음과 같다.

  • 강남 vs. 비강남 : 1980 년대 중반 - 1990년대 초반부터 강남과 비강남을 구분하는 경향이 있긴 있었지만 1990 년대 중반 이후 경향이 더 강해진 걸 느꼈었다. socio- economic status (SES) 의 기준?
  • 좌파 vs. 우파 (이건 정치적 성향) :  언젠가부터는 좌파와 우파가 흑백처럼 나눠져서 그것이 사회를 양분하는 잣대가 된듯 싶었다. 물론 그 경향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긴 하다.전에는 전라도와 경상도 등 지역에 따른 정치성향 양분화가 더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경상도 좌파도 있고 강남 좌파도 있고 뭐 그러니, 좌파와 우파의 term 을 더 많이 쓰는듯?
  • 갑을 구도: 얼마전부터는 갑을 구도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역시 SES 에의 기준이라고 볼 수 있을까?)
  • 수저론?: 그리고 최근에는 신계급론으로 수저론이 등장했다는 소식을 인터넷 상에서 접했다. 부모의 재산정도에 따라서  흙, 동, 은, 금수저로 나눈대나 뭐래나. (이도 SES 의 기준?)
람을 분류하는 것을 한가지 기준으로만 하는 것은 무척 일차원적이다. 좌표(coordinate?) 로 치자면 x-axis 하나만 존재하는 좌표다.  y axis 나 z axis 등등은 생략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좌표가 먼저 생기고 사회구조와 인간사고가 그것에 지배당하는 것 아니다. 그런 특정한 혹은 특이한 좌표가 부각되는 것은 그 사회의 지배적 가치가 반영되어서일것이다. 한국의 지금 상황이 그렇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지만 그 반대의 경향도 있다. 사회구조/인간사고를 지배하는 좌표가 모든 현상과 사람들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버리는 경우다.한가지 좌표에 의해서 사고가 지배되는 사회의 세계관은 단순하기도 하고 어떤 의미로선 왜곡된 세계관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A 라는 사람이 B 라는 사람에게 특별한 친절을 베푼다고 하자. 그럴 때  B 라는 사람은 "A 라는 사람이 참 친절한 사람이구나" 해석할 수도 있다. 한편 모든 것을 갑을구도로 해석하는 사람은 "A 가 내게 친절을 베푸는걸 보니 내가 이 관계에서 갑인가 보다" 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수저론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로 분류된다면 더 쉽게 좌절/좌조할 수도 있고.... 

그런 일차원적 사회에서 청년기를 맞았다면 탈출을 꿈꿨을 거 같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그런 사회현상에 대해서 오래전 그곳을 떠난 이로서 멀리서 방관하면서 이렇게 얘기하는 거조차 미안하고 가슴아프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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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기준으로 현상이나 사건,  일상을 해석할 것인가는 매일매일의 고민이다. 
그것은 내가 어떤 좌표 위에 존재하는가를 명확하게 알 때 가능한 일이다.

요즘 이런 생각을 많이 한다. 아니, 꽤 오래전부터 그런 기도를 해 왔다. 세상이나 사람들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시각으로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음 좋겠다는 기도. 개인이나 사회의 고정관념과 한계 등에 의해서 왜곡될 수도 있는 시각을 벗어나 하나님의 시각에서 모든 걸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기도.  하나님의 cosmic coordinate 위에서 세상을 분별할 수 있음 좋겠다는 기도. 그런 분별력을 가진 성숙함으로  하나님과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기도.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분별(discern)과 판단(judge)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분별하되 판단/정죄하지는 않는 성숙함이 중요하다.

편으로 치우친 편협한 좌표가 내 삶에 불쑥 들어와, 나를 그 좌표 위에 올려놓고 내 삶을 컨트롤하고 나를 제한하려 할 때가 있다. 그런데 그 편협한 좌표를 와해시킬 힘이 내게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그 편협한 좌표를 피하고 그 좌표와의 접촉을 최소화하게 된다.  그에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자신이 없을 떄 그렇게 한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아직 내공이 부족해서도 그렇고, 내 존재 안에 그 편협한 좌표의 흔적이 내재해 있기 때문에도 그럴 것이다. 소위 시험드는걸 피하고 싶어서다. 

고등학교 어린 시절 한국을 떠나긴 했지만, 어린 맘 한구석에도 일부 한국 사회의 한계적 좌표를 떠나고 싶다라는 맘이 컸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는, 미국에도 똑같이 존재하는 편협한 세상적 기준들을 떠나서 큰 하나님 나라에 속하고 싶다는 맘이 컸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하나님의 가치기준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외적인 것에 치중하지 않고 영적인 것을 구한다는 뭐 그런 얘기다.  

그런데 최근 십수년간 이미  어린시절에 떠났다고 여겼던 특정한 세상적 좌표가 내 삶에 끼치는 영향이  좀 컸기에 힘들 때가 있었다. 그것은 어린 시절 내가 떠나고자 했던 좌표와 다시 연결되는 그 시점에 시작되었다. 그것이 내 안에서 해결되지 않은 그런 문제들과 부딪혀 많이 힘들었다. 오랫동안 힘듦의 원인이 뭔지 정확히 파악 못하고 헤매고 힘들어하다가 최근에야 갈피를 잡기 시작했다. 고민과 기도 중이다.  언젠가는 피하지 않으며 그에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잡고 그 편협한 좌표를 초월하고 그 좌표를 흐리게 만들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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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오늘 읽은 빌립보서 1:9-11 의 사도바울의 기도가 떠오른다.  사랑을 지헤와 총명으로 풍성케 하사..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그런 사도바울의 기도를 따라하게 된다. 사랑을 지혜와 총명으로 풍성케 하사 (하나님의 기준으로) 지극히 선한것을 분별하며....

아마도 사도바울 본인이 하나님의 기준으로 선한것을 분별하는 기준을 가졌나 보다. 그러니까  시기와 분쟁, 이기적 야심 등으로 하나님을 전하는 일들 이들을 판단(정죄)하지 않고, 그런 그들을 통해서도 그리스도가 전해짐을 기뻐했겠지. 심지어 그들이 자신을 해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것은 사도바울 자신의 인간적 기준으로 그 사건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봤기에 그럴 수 있었으리라. 그런 사도바울의 분별력과 시각, 포용력과 사랑을 닮고 싶다.

And this is my prayer, that your love may overflow more and more with knowledge and full insight 10 to help you to determine (discern) what is best, so that in the day of Christ you may be pure and blameless, 11 having produced the harvest of righteousness that comes through Jesus Christ for the glory and praise of God.  (Philippians 1:9-11)


Posted by pleasing2j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