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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미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지 20 여 년이 지났다. 미국생활 초기, 대학생일 때는 매년 한국에 갔었다. 지금과 비교해 자주 나갔어도 인터넷이 발달이 안 되어서인지, 유행어나 표현이 바뀌는것등에 적응 안 될 때가 있었다. 미국 온 후 1-2 년 후 갔을 때, 친구들이 "당연히" 라는 표현을 "당근" 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 안 되었고 (당근은 채소의 한 종류인데 왜 그런 표현을 쓸까?  적응 안되었음.) 또 언젠가부터는 "맛있다"를 "맛나다" 라고 하는 것이 생소했다. 


그와 더불어 한국에서 사회 속 다양한 사람들을 분류하는 기준에도 소위 유행이 있다는 걸 본다. 물론 빈부격차나 신분에 따른 분류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보편적이다.. 한국에서 특이한 점이 있다면 신조어로 한가지 기준이 표현되고 그  한가지 기준이 다른 기준들에 비해서 더 부각된다는 것이다. 그 유행이 미국의 내게는 아직 생소한데, 어느 새 한국사회에선 일반적인 것이 되어 있을 때 놀란다. 


그동안 notice 한 흐름은 다음과 같다.

  • 강남 vs. 비강남 : 1980 년대 중반 - 1990년대 초반부터 강남과 비강남을 구분하는 경향이 있긴 있었지만 1990 년대 중반 이후 경향이 더 강해진 걸 느꼈었다. socio- economic status (SES) 의 기준?
  • 좌파 vs. 우파 (이건 정치적 성향) :  언젠가부터는 좌파와 우파가 흑백처럼 나눠져서 그것이 사회를 양분하는 잣대가 된듯 싶었다. 물론 그 경향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긴 하다.전에는 전라도와 경상도 등 지역에 따른 정치성향 양분화가 더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경상도 좌파도 있고 강남 좌파도 있고 뭐 그러니, 좌파와 우파의 term 을 더 많이 쓰는듯?
  • 갑을 구도: 얼마전부터는 갑을 구도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역시 SES 에의 기준이라고 볼 수 있을까?)
  • 수저론?: 그리고 최근에는 신계급론으로 수저론이 등장했다는 소식을 인터넷 상에서 접했다. 부모의 재산정도에 따라서  흙, 동, 은, 금수저로 나눈대나 뭐래나. (이도 SES 의 기준?)
람을 분류하는 것을 한가지 기준으로만 하는 것은 무척 일차원적이다. 좌표(coordinate?) 로 치자면 x-axis 하나만 존재하는 좌표다.  y axis 나 z axis 등등은 생략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좌표가 먼저 생기고 사회구조와 인간사고가 그것에 지배당하는 것 아니다. 그런 특정한 혹은 특이한 좌표가 부각되는 것은 그 사회의 지배적 가치가 반영되어서일것이다. 한국의 지금 상황이 그렇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지만 그 반대의 경향도 있다. 사회구조/인간사고를 지배하는 좌표가 모든 현상과 사람들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버리는 경우다.한가지 좌표에 의해서 사고가 지배되는 사회의 세계관은 단순하기도 하고 어떤 의미로선 왜곡된 세계관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A 라는 사람이 B 라는 사람에게 특별한 친절을 베푼다고 하자. 그럴 때  B 라는 사람은 "A 라는 사람이 참 친절한 사람이구나" 해석할 수도 있다. 한편 모든 것을 갑을구도로 해석하는 사람은 "A 가 내게 친절을 베푸는걸 보니 내가 이 관계에서 갑인가 보다" 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수저론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로 분류된다면 더 쉽게 좌절/좌조할 수도 있고.... 

그런 일차원적 사회에서 청년기를 맞았다면 탈출을 꿈꿨을 거 같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그런 사회현상에 대해서 오래전 그곳을 떠난 이로서 멀리서 방관하면서 이렇게 얘기하는 거조차 미안하고 가슴아프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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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기준으로 현상이나 사건,  일상을 해석할 것인가는 매일매일의 고민이다. 
그것은 내가 어떤 좌표 위에 존재하는가를 명확하게 알 때 가능한 일이다.

요즘 이런 생각을 많이 한다. 아니, 꽤 오래전부터 그런 기도를 해 왔다. 세상이나 사람들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시각으로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음 좋겠다는 기도. 개인이나 사회의 고정관념과 한계 등에 의해서 왜곡될 수도 있는 시각을 벗어나 하나님의 시각에서 모든 걸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기도.  하나님의 cosmic coordinate 위에서 세상을 분별할 수 있음 좋겠다는 기도. 그런 분별력을 가진 성숙함으로  하나님과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기도.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분별(discern)과 판단(judge)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분별하되 판단/정죄하지는 않는 성숙함이 중요하다.

편으로 치우친 편협한 좌표가 내 삶에 불쑥 들어와, 나를 그 좌표 위에 올려놓고 내 삶을 컨트롤하고 나를 제한하려 할 때가 있다. 그런데 그 편협한 좌표를 와해시킬 힘이 내게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그 편협한 좌표를 피하고 그 좌표와의 접촉을 최소화하게 된다.  그에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자신이 없을 떄 그렇게 한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아직 내공이 부족해서도 그렇고, 내 존재 안에 그 편협한 좌표의 흔적이 내재해 있기 때문에도 그럴 것이다. 소위 시험드는걸 피하고 싶어서다. 

고등학교 어린 시절 한국을 떠나긴 했지만, 어린 맘 한구석에도 일부 한국 사회의 한계적 좌표를 떠나고 싶다라는 맘이 컸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는, 미국에도 똑같이 존재하는 편협한 세상적 기준들을 떠나서 큰 하나님 나라에 속하고 싶다는 맘이 컸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하나님의 가치기준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외적인 것에 치중하지 않고 영적인 것을 구한다는 뭐 그런 얘기다.  

그런데 최근 십수년간 이미  어린시절에 떠났다고 여겼던 특정한 세상적 좌표가 내 삶에 끼치는 영향이  좀 컸기에 힘들 때가 있었다. 그것은 어린 시절 내가 떠나고자 했던 좌표와 다시 연결되는 그 시점에 시작되었다. 그것이 내 안에서 해결되지 않은 그런 문제들과 부딪혀 많이 힘들었다. 오랫동안 힘듦의 원인이 뭔지 정확히 파악 못하고 헤매고 힘들어하다가 최근에야 갈피를 잡기 시작했다. 고민과 기도 중이다.  언젠가는 피하지 않으며 그에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잡고 그 편협한 좌표를 초월하고 그 좌표를 흐리게 만들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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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오늘 읽은 빌립보서 1:9-11 의 사도바울의 기도가 떠오른다.  사랑을 지헤와 총명으로 풍성케 하사..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그런 사도바울의 기도를 따라하게 된다. 사랑을 지혜와 총명으로 풍성케 하사 (하나님의 기준으로) 지극히 선한것을 분별하며....

아마도 사도바울 본인이 하나님의 기준으로 선한것을 분별하는 기준을 가졌나 보다. 그러니까  시기와 분쟁, 이기적 야심 등으로 하나님을 전하는 일들 이들을 판단(정죄)하지 않고, 그런 그들을 통해서도 그리스도가 전해짐을 기뻐했겠지. 심지어 그들이 자신을 해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것은 사도바울 자신의 인간적 기준으로 그 사건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봤기에 그럴 수 있었으리라. 그런 사도바울의 분별력과 시각, 포용력과 사랑을 닮고 싶다.

And this is my prayer, that your love may overflow more and more with knowledge and full insight 10 to help you to determine (discern) what is best, so that in the day of Christ you may be pure and blameless, 11 having produced the harvest of righteousness that comes through Jesus Christ for the glory and praise of God.  (Philippians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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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