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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7. 11. 03:44

부흥과 광야 카테고리 없음2018. 7. 11. 03:44

나름 세 번의 부흥을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부흥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1) 1980 년대 한국교회 성장기의 지역교회에서: 초중등부를 다녔었다.  아파트촌 구역모임과 주일학교 등을 중심으로 새벽기도, 철야기도, 여름성경학교, (어른들) 영어성경공부, 수련회 등 참 활발했다. 장로교인데 통성기도 안수기도 등도 했었다. 또 어른들이나 중학교 선배언니들은 방언기도도 했다.

부모님들이 주일학교 교사도 하시고. 어린 학생들도 여름성경학교에서 새벽기도/수련회 철야기도하고.  중학교 선배들이 교회 예배 출석을 위해서 학교 수학여행을 안 가려고 저항하기도 했었다. (결과는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다). 

교회는 급성장했었고 주변 건물들도 구입해서 주일학교 공간등을 넓혀나갔었다. 

우리 가족이 속했던 구역 공동체는 하나둘씩 학군따라 강건너편으로 이사하면서 흩어졌지만 여전히 연락하고 만나고 계시다. 


(2) 1990 대 중반: 보스턴의 한 EM 교회에서. 참 활발하고 헌신된 교회였다. 예배설교가 끝나면 원하는 사람들은 앞에 나가 헌신/재헌신의 글을  읽는 형식이었다. 그런데 한 수련회 때 대부분의 학생들이 깨어져 회개하고... - 그 당시 수련회가 끝나고 앞에 나가 헌신한 이들의 기도문과 표정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왔었다. 처음에는 한국계 학생 중심이었는데 다른 나라 학생들도 몰려와서 모임 명칭을 동양계 학생 중심으로 바꿔야 할 정도였다

학생들의 진지한 회개와 헌신. EM 대학부 거의 모두가 그러했다. 그런데 그 당시 impact 가 너무 커서 나같은 경우에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정도가 되었었다. 함께 십자가를 경험한 수련회장을 떠나자마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전과 같은 일상을 살아갈 수는 없었다. 한 학기를 거의 마비된듯 보내서 성적이 많이 떨어졌었다. 한 과목을 fail 했다. 영적 depression 도 겹쳤었고. 그래서 약 6 개월 기도 후 그 교회를 떠났었다.  

그 당시 alumni 중 full time, part time minister, missionary 등이  된 이들이 꽤 된다.

나중에 발견한 건 데, 그 지역교회들이 많이들  New England 의 부흥을 위해서 그 당시 기도하고 있었었다. 그 당시 여러 교회들에서 그런 일들이 있었던 거 같다. 


(3) 1990 년 후반: 위 교회를 떠나서, 작은 개척교회를 잠시 다녔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잘 안되었고.. 

그 후 한번  '놀아 보려'고 갔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처음 그 한인 교회에 가니 내 기대에 맞게 그 교회 사람들은 참 잘 놀았다. 약 반년을 그렇게 교회에서 놀았는데, 교회의 새벽기도가 활발해졌었다 (가을학기).  

안 그래도 여름방학 내내 리서치일을 하면서, 혼자서 잠언/시편을 읽으며 기도하던 중이었고, 방학이 끝나고 교회 근처로 이사를 가게 되었었고, 또 한 자매의 초청으로 새벽기도에 나가게 되었다. 차가 필요없는 보스턴에서 차있는 학생들이 드문 시절, 마침 내게 차가 있었는데 새벽기도 오는 이들에게 ride 주라는 친구의 부탁도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바쁜 학생들이 새벽기도를 할 수 있었다는 것도 신기하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데는 여러가지 조건이 많이 갖춰져서였던거 같다. 새로운 청년부 목사님, 열심으로 헌신된 리더그룹 등, 그리고 한국에서 1 년정도 방문 중이던 몇 분의 지체들이 학생들을 챙기며 새벽기도 참여를 권장했고.   

또 하나 특이했던 점은 많은 리더그룹의 지체들이 개인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학업을 잠시 중단한 이도 있었고 졸업 후 잠시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도 있었고... 각기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만큼 교회에 헌신할 시간이 비교적 많기도 했었다. 하기야 그 당시 '거룩한 백수'라는 말이 한국에서도 유행하기도 했었는데, 많은 지체들이 또 나 또한 거룩한 백수에 가까웠다. 그래도 개인의 어려움을 중심으로 기도하지 않았고 모두 다 교회를 위해서 기도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초기의 열심이 변색되는 느낌은 있었다 - 자세한 얘기는 못하지만.  

(2) 의 부흥과 비교해서 개개인의 회개와 헌신은 아주 clear하지 않았던 점은 있다. (2) 의 경우 대부분의 지체가 회개하고 헌신했다면, (3) 의 경우 일부분이 그러했던거 같다. (2) 의 경우는  systematic 하고 깊이 있는 discipleship training 이 이뤄지고 있었다면 (3) 은 그런 면에서 초기단계였다


이제 세월이 흘러, 1980 년대 부모님 세대의 나이보다도 훨씬 많은 나이가 되어서 돌아본다.

개인적으로 (2) 가 가장 lasting impact 를 남기는 사건이었다. 


부흥을 몇 번 겪었건 그게 무슨 소용이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수많은 은혜를 입었지만, 쉽게 그 은혜를 잊고 하나님을 거역했던 거처럼. 영적 경험의 history 보다는 현재가 중요하다.

 

옛날에는 뜨겁게 기도하고 구하면, 하나님 나라가 (혹은 성령님께서) 순식간에 불같이 임하고 이 땅이 새로워질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내 고민문제들 - 내 존재나 진로 등등의 문제들이 기적적으로 풀렸으면 좋겠다는 숨겨진 희망사항도 있었던 거 같다.

아마도 이전 대부분 한국 신앙스타일이, 통성과 방언, 눈물과 회개 등을 뜨거운 것들을 좋아하고, 급성장 이나 '뒤집어지는' 변화 등을 추구하던 스타일이었기도 해서 그런 거 같다. 



그렇게 1994 - 1997 년를 수양회처럼 보냈다. (2)&(3) 교회에서 그렇게 살았다. 학교 성적을 포함해 일상의 삶은 엉망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열정과 열심, 통성과 눈물, 방언 등이 있긴 한데 속이 텅 빈 듯한 느낌. 뿌리는 뽑혀있다는 느낌. 

1995- 2000 년정도까지 depression 을 겪기도 했다. 총체적 depression.


리고 2000 년 언제인가 이렇게 주저앉아있을수는 없다 라는 생각으로 일어서서, 미지의 광야같은 일상를 일구어 나가기 시작했고. depression 도 딛고 일어서야만 했다. 

한 때 아침 2 시간씩 QT 기도하거나 일주일에 하루씩 금식기도도 하기도 하고, 실험하면서 신학강의 테입도 듣고 책들도 읽고... 이런 기도경건생활은 2000 년도 전에 더 열심히 했지만두. 

한가지 다른 것은 앞이 보이지 않더라도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순종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또 그전에는 '영적'인 것들만을 중시하고 '육신의 '인 것들을 하챦게 여겼다면, 규칙적인 운동도 했다 - 지금도 운동하는 이유에 대한 내 답은 "살기 위해서다".. (플라톤식 영육 이분법을 벗어나는 것도 내게는 큰 전환이었다)


여전히 그렇게 광야를 행진하고 있는 듯 하다.

그렇지만 웅성웅성하는 모임들에서보다는, 이 메마른 일상의 광야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더 친밀하시고 생생하시다.

--- 그건 아마도 내 성격/성향 탓도 있는듯하다.  팀켈러의 The Still small voice 설교에서처럼 각자에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이시니.


이렇게 끈기있게 한 발자욱 한 발자욱 행진하다보면, 그 광야길이 출애굽기처럼 한참 돌아가는 길이라 하더라도 그가 정하신 미지의 목적지로 인도하지 않으실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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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