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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에 해당되는 글 4

  1. 2018.07.15 random thoughts: to bypass ? or to conquer? the cycle?
  2. 2018.07.11 부흥과 광야
  3. 2018.07.08 귀감
  4. 2018.07.07 Psalm 48 at 45


1.    이스라엘 백성의 the cycle of sin 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단다. 인터넷 서치하면 쉽게 나오는 이미지다. 

 

2.    이 근처 교회의 오 목사님은 (교인들은 그를 존/쟌 이라고 부른다.)  한 설교에서 이 싸이클을 이렇게 정리했다.

(다이어그램을 그리기 싫어서 그냥 다음과 같이 쓴다)

(A)     Self-sufficiency -> idolatry -> judgment -> suffering -> cry for help -> deliverance -> (다시 돌아가서) Self- sufficency -> idolatry ->...

그 설교는 위 싸이클보다는 데보라와 그 당시 사건에 관한 거였다.

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cry  하시면서 eternal judgment 와 suffering 을 감당하시고 부활하셔서 인류를 또 세상을 deliver 하시는 work 를 시작하셨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이들의 삶은 위의 싸이클을 어느 정도 따라가기도 하는 거 같다. 공동체나 세계의 싸이클도 그렇고.

4.    그를 믿는 이들에게는 Judgment 라기보다는 discipline 이라고 봐야하겠다 (hebrews  12:4-12)



5.     NT Wright 은 위와 비슷한 구약의 storyline 을 다른 perspective 로 바라보며, 스라엘의 고난과 vindication 을 통한 전세계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plan 으로 본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 -> 이스라엘의 exile -> Suffering of Israel -> vindication of Israel/Return of Israel/renewal of covenant etc. -> blessing to the world via Israel


6.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실패했고 True Israel 인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 등을 겪으심으로써 전세계를 구원하셨다는 게 NT wright 의 perspective 다.



7. 이래저래 저 위의 싸이클을 벗어나는 최후 승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서 이뤄졌다는 건데, Already but Not Yet 의 시대가 계속되고 있는 오늘날도 끊임없이 개인의 삶에서 공동체에서 반복되는 싸이클인 거 같다.

8.  그냥 갑자기 떠오르는: 알버트 슈바이쳐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역사의 수레바퀴에 몸을 던진 예수님. 그 예수님은 결국 그 수레바퀴에 의해서 갈기갈기 찢어졌지만 수레바퀴의 방향을 바꾸는데는 성공헀다는.

9. 부활을 믿는 이들에게는 알버트 슈바이쳐의 시각은 반쪽짜리이긴 하다.

10.  개인들이나 공동체들은 스스로의 죄로 인해서 위의 싸이클을 반복하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discipline  받고 예수님 십자가 앞에 다시  회개하고 회복하고 또 반복하고 한다. 물론 그리하면서 소위 성화/성숙의 길을 나아가는 것일수도 있다. 



11. 저 cycle 을 bypass 혹은 초월하는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는 길인데 : (A) 의 싸이클에서 self-sufficiency 와 우상숭배에 다다르기 전에 -- 즉 스스로의 죄와 shortcoming 으로 인한 저 싸이클을 반복하는 것을 멈추고, 이웃의 고통과 울분 등에 동참하는 십자가가 저 싸이클을 전복시키는 한 방법이라고 하면 어떨까. 즉 아래 (B) 처럼 되는거지. 

 (B)   Self-sufficiency -> idolatry -> judgment -> suffering -> cry for help -> deliverance -> Suffering with neighbor and cry with them (go to God/Jesus with them) -> delieverace together ->...


12. 위와 같은 시각은 단순화 또는 reductionism 의 오류일 수 있으리라. 그러나 세상의 아픔과 모순, 이웃의 고통을 바라보게 될 때, 또 그 앞에서 너무나도 작고 무력한 스스로를 바라보게 될 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고 그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게 됨은 사실인거 같다. 

13. 만약 세상의 아픔과 모순, 이웃의 고통 등을 인간의 노력으로 정복해야 할 문제로 볼 때 그것은 인본주의가 되는 거겠지.

14. NT wright 이 얘기하는 거처럼 우리가 Build the Kingdom 하는 것이 아니라 Building for the Kingdom 한다는 거처럼...


15.  예수님을 처음 믿었던 약 25 년 전.... 자선과 구제 (justice mission 등도 포함되는) 등은, 복음적 사랑의 실천이 아니라 인간적 선행에 불과하다는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다.  복음전도 말씀공부 공동체 교제 등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 또 한편으론 이런 얘기도 들었었다: 복음의 능력이 약해지는 시대에는 자선과 구제에 더 치중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그것도 사실이었을수도 있다. 

15. 그러나 최근에는 다른 흐름을 볼 수 있다.  : 사랑, 공의, 정의의 하나님께서 소외되고 억압받는 이들을 사랑하시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시기를 바라신다는 걸 성경적으로 설명해내는 책들이나 설교들. 그것을 인간적 사랑이나 약해진 복음으로 보기보다는 더 comprehensive 하게 이해되어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 또 복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17. 이래저래 떠오르는 random thoughts - 더 많이 읽고 생각해야 하는 주제. 

:
Posted by pleasing2jc
2018. 7. 11. 03:44

부흥과 광야 카테고리 없음2018. 7. 11. 03:44

나름 세 번의 부흥을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부흥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1) 1980 년대 한국교회 성장기의 지역교회에서: 초중등부를 다녔었다.  아파트촌 구역모임과 주일학교 등을 중심으로 새벽기도, 철야기도, 여름성경학교, (어른들) 영어성경공부, 수련회 등 참 활발했다. 장로교인데 통성기도 안수기도 등도 했었다. 또 어른들이나 중학교 선배언니들은 방언기도도 했다.

부모님들이 주일학교 교사도 하시고. 어린 학생들도 여름성경학교에서 새벽기도/수련회 철야기도하고.  중학교 선배들이 교회 예배 출석을 위해서 학교 수학여행을 안 가려고 저항하기도 했었다. (결과는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다). 

교회는 급성장했었고 주변 건물들도 구입해서 주일학교 공간등을 넓혀나갔었다. 

우리 가족이 속했던 구역 공동체는 하나둘씩 학군따라 강건너편으로 이사하면서 흩어졌지만 여전히 연락하고 만나고 계시다. 


(2) 1990 대 중반: 보스턴의 한 EM 교회에서. 참 활발하고 헌신된 교회였다. 예배설교가 끝나면 원하는 사람들은 앞에 나가 헌신/재헌신의 글을  읽는 형식이었다. 그런데 한 수련회 때 대부분의 학생들이 깨어져 회개하고... - 그 당시 수련회가 끝나고 앞에 나가 헌신한 이들의 기도문과 표정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왔었다. 처음에는 한국계 학생 중심이었는데 다른 나라 학생들도 몰려와서 모임 명칭을 동양계 학생 중심으로 바꿔야 할 정도였다

학생들의 진지한 회개와 헌신. EM 대학부 거의 모두가 그러했다. 그런데 그 당시 impact 가 너무 커서 나같은 경우에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정도가 되었었다. 함께 십자가를 경험한 수련회장을 떠나자마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전과 같은 일상을 살아갈 수는 없었다. 한 학기를 거의 마비된듯 보내서 성적이 많이 떨어졌었다. 한 과목을 fail 했다. 영적 depression 도 겹쳤었고. 그래서 약 6 개월 기도 후 그 교회를 떠났었다.  

그 당시 alumni 중 full time, part time minister, missionary 등이  된 이들이 꽤 된다.

나중에 발견한 건 데, 그 지역교회들이 많이들  New England 의 부흥을 위해서 그 당시 기도하고 있었었다. 그 당시 여러 교회들에서 그런 일들이 있었던 거 같다. 


(3) 1990 년 후반: 위 교회를 떠나서, 작은 개척교회를 잠시 다녔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잘 안되었고.. 

그 후 한번  '놀아 보려'고 갔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처음 그 한인 교회에 가니 내 기대에 맞게 그 교회 사람들은 참 잘 놀았다. 약 반년을 그렇게 교회에서 놀았는데, 교회의 새벽기도가 활발해졌었다 (가을학기).  

안 그래도 여름방학 내내 리서치일을 하면서, 혼자서 잠언/시편을 읽으며 기도하던 중이었고, 방학이 끝나고 교회 근처로 이사를 가게 되었었고, 또 한 자매의 초청으로 새벽기도에 나가게 되었다. 차가 필요없는 보스턴에서 차있는 학생들이 드문 시절, 마침 내게 차가 있었는데 새벽기도 오는 이들에게 ride 주라는 친구의 부탁도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바쁜 학생들이 새벽기도를 할 수 있었다는 것도 신기하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데는 여러가지 조건이 많이 갖춰져서였던거 같다. 새로운 청년부 목사님, 열심으로 헌신된 리더그룹 등, 그리고 한국에서 1 년정도 방문 중이던 몇 분의 지체들이 학생들을 챙기며 새벽기도 참여를 권장했고.   

또 하나 특이했던 점은 많은 리더그룹의 지체들이 개인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학업을 잠시 중단한 이도 있었고 졸업 후 잠시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도 있었고... 각기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만큼 교회에 헌신할 시간이 비교적 많기도 했었다. 하기야 그 당시 '거룩한 백수'라는 말이 한국에서도 유행하기도 했었는데, 많은 지체들이 또 나 또한 거룩한 백수에 가까웠다. 그래도 개인의 어려움을 중심으로 기도하지 않았고 모두 다 교회를 위해서 기도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초기의 열심이 변색되는 느낌은 있었다 - 자세한 얘기는 못하지만.  

(2) 의 부흥과 비교해서 개개인의 회개와 헌신은 아주 clear하지 않았던 점은 있다. (2) 의 경우 대부분의 지체가 회개하고 헌신했다면, (3) 의 경우 일부분이 그러했던거 같다. (2) 의 경우는  systematic 하고 깊이 있는 discipleship training 이 이뤄지고 있었다면 (3) 은 그런 면에서 초기단계였다


이제 세월이 흘러, 1980 년대 부모님 세대의 나이보다도 훨씬 많은 나이가 되어서 돌아본다.

개인적으로 (2) 가 가장 lasting impact 를 남기는 사건이었다. 


부흥을 몇 번 겪었건 그게 무슨 소용이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수많은 은혜를 입었지만, 쉽게 그 은혜를 잊고 하나님을 거역했던 거처럼. 영적 경험의 history 보다는 현재가 중요하다.

 

옛날에는 뜨겁게 기도하고 구하면, 하나님 나라가 (혹은 성령님께서) 순식간에 불같이 임하고 이 땅이 새로워질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내 고민문제들 - 내 존재나 진로 등등의 문제들이 기적적으로 풀렸으면 좋겠다는 숨겨진 희망사항도 있었던 거 같다.

아마도 이전 대부분 한국 신앙스타일이, 통성과 방언, 눈물과 회개 등을 뜨거운 것들을 좋아하고, 급성장 이나 '뒤집어지는' 변화 등을 추구하던 스타일이었기도 해서 그런 거 같다. 



그렇게 1994 - 1997 년를 수양회처럼 보냈다. (2)&(3) 교회에서 그렇게 살았다. 학교 성적을 포함해 일상의 삶은 엉망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열정과 열심, 통성과 눈물, 방언 등이 있긴 한데 속이 텅 빈 듯한 느낌. 뿌리는 뽑혀있다는 느낌. 

1995- 2000 년정도까지 depression 을 겪기도 했다. 총체적 depression.


리고 2000 년 언제인가 이렇게 주저앉아있을수는 없다 라는 생각으로 일어서서, 미지의 광야같은 일상를 일구어 나가기 시작했고. depression 도 딛고 일어서야만 했다. 

한 때 아침 2 시간씩 QT 기도하거나 일주일에 하루씩 금식기도도 하기도 하고, 실험하면서 신학강의 테입도 듣고 책들도 읽고... 이런 기도경건생활은 2000 년도 전에 더 열심히 했지만두. 

한가지 다른 것은 앞이 보이지 않더라도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순종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또 그전에는 '영적'인 것들만을 중시하고 '육신의 '인 것들을 하챦게 여겼다면, 규칙적인 운동도 했다 - 지금도 운동하는 이유에 대한 내 답은 "살기 위해서다".. (플라톤식 영육 이분법을 벗어나는 것도 내게는 큰 전환이었다)


여전히 그렇게 광야를 행진하고 있는 듯 하다.

그렇지만 웅성웅성하는 모임들에서보다는, 이 메마른 일상의 광야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더 친밀하시고 생생하시다.

--- 그건 아마도 내 성격/성향 탓도 있는듯하다.  팀켈러의 The Still small voice 설교에서처럼 각자에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이시니.


이렇게 끈기있게 한 발자욱 한 발자욱 행진하다보면, 그 광야길이 출애굽기처럼 한참 돌아가는 길이라 하더라도 그가 정하신 미지의 목적지로 인도하지 않으실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
Posted by pleasing2jc
2018. 7. 8. 08:03

귀감 카테고리 없음2018. 7. 8. 08:03

잘못된 예를 타산지석으로 그처럼 되지 않으려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예를 바라보며 그렇게 되려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거 같다.

타산지석처럼 되지 않으려 하는 삶은 그렇게 되지 않는 것에서 그치지만, (혹은 역으로 타산지석을 닮아가기도 하지만)

귀감이 될만한 이를 쫓아 사는 삶은 더 발전이 클 듯 하니.


저 밑의 타산지석의 라이프 스타일과 사고방식을 쫓지 않는다면

귀감이 될만한 예는 더 나아가 사랑과 섬김 등등을 실천하는 삶이리라.


개인적으로 귀감이 될만한 이는 누가 있을까 생각하다 시몬느 베이유를 떠올렸다.

고등학생 때 읽었던 전기 <불꽃의 여자 시몬느 베이유> 내용이 떠올라서 - 그녀의 철학의 깊이와 믿는 바실천하려던 노력 - 노동자와 연대함 등. 


이번에는 그녀에 대한 다른 시각의 전기를 읽었다. 심리학자 교수가 쓴 전기. 그녀의 심리를 분석한다. (Simone Weil: A Modern Pilgrimage> 라는 책.  

시몬느 베이유는 전쟁터에서 굶는 병사들과 연대하기 위해서 굶다가 건강상태가 나빠져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결핵환자였는데 굶기까지 해서.  심리학자 저자는 그녀의 그런 실천이 anorexia 의 증상이 아니었을까 질문한다. 시몬느 베이유는 어린 시절부터 hunger 에 집착했었다고.  또 anorexia 와  narcissism 의 연관관계도 살짝 짚고.

(하기야 배고픈 예술가, 청렴결백 선비 등 -- 배고픔과 가난을 어느정도 glorify 하던 낭만적? 시절이 있기도 헀었지. Kafka 의 A hunger  artist 라는 단편소설도 떠오르네)


시몬느 베이유처럼 자신이 믿는 바를 철저하게 실천하려 했던 이의 심리도 분석하면, 인간의 한계와 약함을 볼 수 있다. 

선행의 동기에도 자기의 (self-righteousness) 와 자기애 (self-love) 의 요소가 뒤섞여있을 수 있으니.


역시 selfless love 의 귀감은 예수이신데..[각주:1]

그 귀감을 따르는 삶이란  갈라디아서 2:20 처럼 내가 그와 함께 죽고 내 안에 그가 사는 것으로 가능할터인데... 참으로 오묘하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의 이 구절은 사랑보다는 소위 justification/righteousness - 칭의와 의로움 에 관한 말씀인듯 하지만,  그렇게  의로워져야 새로운 realm 에서의 참사람이 가능핱테니)




  1. 예수님의 selfless love 라는 명제는 믿지만, 솔직히 아주 꽉 짜인 논리 (머리)로는 완전히 이해 못하고 있다 - 공부해야 하는 주제 중 하나. [본문으로]
:
Posted by pleasing2jc
2018. 7. 7. 02:42

Psalm 48 at 45 카테고리 없음2018. 7. 7. 02:42

Psalm 48[a]

A song. A psalm of the Sons of Korah.

Great is the Lord, and most worthy of praise,
    in the city of our God, his holy mountain.

Beautiful in its loftiness,
    the joy of the whole earth,
like the heights of Zaphon[b] is Mount Zion,
    the city of the Great King.
God is in her citadels;
    he has shown himself to be her fortress.

When the kings joined forces,
    when they advanced together,
they saw her and were astounded;
    they fled in terror.
Trembling seized them there,
    pain like that of a woman in labor.
You destroyed them like ships of Tarshish
    shattered by an east wind.

As we have heard,
    so we have seen
in the city of the Lord Almighty,
    in the city of our God:
God makes her secure
    forever.[c]

Within your temple, O God,
    we meditate on your unfailing love.
10 Like your name, O God,
    your praise reaches to the ends of the earth;
    your right hand is filled with righteousness.
11 Mount Zion rejoices,
    the villages of Judah are glad
    because of your judgments.

12 Walk about Zion, go around her,
    count her towers,
13 consider well her ramparts,
    view her citadels,
that you may tell of them
    to the next generation.

14 For this God is our God for ever and ever;
    he will be our guide even to the end.


at Christ Church Cathedral in Dublin, Ireland


:
Posted by pleasing2j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