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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r Journey Together 전체 보기'에 해당되는 글 303

  1. 2021.09.18 인터넷 안전
  2. 2021.09.13 또 히브리서
  3. 2021.09.07 어떤 유니버스를 살아가는가?
  4. 2021.08.30 시편 102 편 Prayer to the Eternal King for Help
  5. 2021.08.28 knowing God according to...
  6. 2021.08.27 before God
  7. 2021.08.15 거룩한 바쁨
  8. 2021.07.22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9. 2021.07.08 7 년
  10. 2021.07.06 심리를 쪼개고 쪼개서 성찰하며 기도하기
2021. 9. 18. 02:20

인터넷 안전 카테고리 없음2021. 9. 18. 02:20

 

인터넷 개인정보 보호와 안전을 위한 한 경찰서 공고 (작년 것이지만 여전히 유효할듯)

:
Posted by pleasing2jc
2021. 9. 13. 00:23

또 히브리서 카테고리 없음2021. 9. 13. 00:23

올해는 히브리서에 집중하는 해인가보다.   

히브리서 11-12 장 을 읽을 때는 정말 가슴이 뛴다.

히브리서 12:1-3 과 가장 비슷한 이미지는 영화 레미제라블의 마지막 부분이다. 

레미제라블 영화의 그 장면에서 히브리서를 떠올린 건, 그 영화가 처음 나와서 극장에서 봤을 때부터였다. 

영화 속 '선한 싸움'을 싸우며 전사한 이들이 힘찬 노래를 부르고 있고, 그들을 향해 나아가는 장발장. 

영화 속에서는 장발장의 사후 세계에서 마주치는 그들이지만, 히브리서 11-12 장에 영화의 그 이미지를 빌려온다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이미,  '믿음의 삶'을 살아간 믿음의 조상들에게 휩싸여 예수님을 향해서 달려나가고 있다는 것. 

아브라함, 모세, 예수님의 제자들, 사도바울 등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기쁜 표정으로 힘찬 찬양을 부르고 있고 예수님께서 중앙 보좌에 앉아계시는 장면 --  그를 향해서 뛰어가는 믿음의 경주

 

어쨌거나 히브리서를 더 이해하고 싶어서, 작년말부터 히브리서 '공부'라고 하긴 뭣하고 leasurely reading 하듯이 히브리서에 관한 NIV Application commentary 를 다 읽었다. (NT wright 의 짧은 책도 읽었고)

반년도 더 넘는 기간동안 걸쳐서 조금씩 조금씩 읽다 보니....몇 개월 후에는 앞의 부분을 잊어버렸다. 

기억에 남는 '지식'은 히브리서 저자가 구약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던 지식계층이라는 것 정도.

그리고 exposition 과 exhortation 이 뒤섞여져 있다고. 

그렇게 미온적으로 commentary 를 막 다 읽었는데, encounter with god devotional 본문이 또 히브리서다.

히브리서를 깊이 묵상할 기회를 올해 가져야 할 듯. 

-----------

NT Wright 의 짧은 책자를 다시 읽는데 히브리서 3:7-13 에 관한 내용 중 'Today Mode' 에 관한 설명 "already and not yet" 중 "already" 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데 "Today mode" 라..

The challenge becomes more urgent with the word ‘Today’, the point in the Psalm at which the quotation begins, 

and the point to which Hebrews returns several times, both in this passage and later. 

Along with the other early Christians, the writer believed passionately that God had acted once for all in Jesus 

the Messiah, and that as a result the new day had dawned for which Israel had been waiting. 

They had been living in what you might call ‘tomorrow mode’ for long enough; now it was ‘today mode’, 

the moment when suddenly it was all happening. If only they would remember that, they would stay on track.

Wright, N. T.. Hebrews for Everyone (The New Testament for Everyone) (p. 41). 

Presbyterian Publishing Corporation. Kindle Edition. 

영화 레미제라블의 Finale 의 가사  와 연관되면서, 영화 레미제라블 프랑스 역사 속 혁명가들이 tomorrow 를 꿈꿨듯, 구약 믿음의 조상들도 비슷한 양상으로 꿈꿨을 tomorrow 를 today 로서 살아가는 세대로서 today mode 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괜히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네. 

:
Posted by pleasing2jc

극장에서 영화를 못 본 작년과는 달리 올해는 영화 두 편을 극장에서 봤다. 둘 다 마블 영화다.
마블 영화와 예고편들을 보니, 마블 영화는 꽤 유명한 많은 배우들을 그들의 유니버스에 포함시켜왔고 포함시키려 하는듯하다. 웬만한 배우들은 마블 영화의 슈퍼 히어로나 등장인물들이 되어가고 있는듯.
마블 유니버스에는 꽉 짜여진 서사, 조직체계도, 인간관계, 문화, 룰 등이 있다. 그 유니버스에 속한 배우들은 그 안에서 어떤 동료애나 소속감 같은 걸 느낄 수도 있을 듯 하고, 슈퍼히어로들의 마블 유니버스라니 자신들이 특별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듯 하다. 그러나 진정한 배우라면 영화 속의 가상 유니버스와 그 역할과 현실 속의 자신, 또 다른 영화들에서 자신들이 맡은 역할을 잘 분간할 것이다. 마블 유니버스에서 슈퍼 히어로를 맡았다고 해서 현실 속에서 그처럼 행동한다면, 그건 보자기를 등에 두르고 높은 층에서 뛰어내리는 어린 아이와 다름없다.

어찌 보면 많은 조직과 공동체들도 자신들만의 유니버스가 있다. 그 조직이나 공동체 밖에서 볼 때는 낯선 조직체계와 문화를 당연히 여기면서 살아가기도 하고. 한 사람이 그 조직이나 공동체 안에서 맡은 역할과 그 밖에서 맡은 역할이 판이하게 다르기도 하다. 이전 학교의 꽤 잘나가던 교수님이 퇴근하면서 "오늘은 쓰레기차 오는 날이야. 쓰레기 내놓으러 가야해," "이번 주말은 대청소를 해야 해," "개밥 주러 가야해,"하곤 했었는데, academia 에서 훨훨 날던 슈퍼 히어로같던 그 교수님도 일생생활 속에서는 한 생활인일 뿐이라는 걸 절감케 했다.

만약 한 인물이 속한 조직과 공동체의 '유니버스'가 그가 속한 조직/공동체의 다른 '유니버스'를 breach 하기 시작하면 좀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예를 들어서 펩시의 이전 CEO 인드라 누이의 일화는 무척 유명하다. 막 CEO 로 임명받고 집에 와서 어머니께 그소식을 전했더니 어머니께서는 그녀에게 "가서 우유나 사오렴,"하시면서 밖에서는 CEO 일지라도, 집에서는 집에서의 역할을 잘 해야한다고 가르치셨다는 일화. 그렇지. 집에서도 가족에게 CEO 가 부하직원을 대하듯 대하면 문제가 커지겠지. global 대기업 CEO 인데도 마켓에 가서 우유를 사오는 역할을 잘 해야 한다니.

하나님의 유니버스는 어떠한가? 하는 질문이 든다. 하나님의 유니버스 속에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왕같은 제사장들,거룩한 나라고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즉 세상과는 분별된 특별한 존재라는 뜻이다. 그런데 요즘 같은 시대에 세상 속에서 그렇다고 했다가는 과대망상에 걸렸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왕같은 제사장들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 함은 군림하고 특권을 행사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의 뒤를 쫓는 삶을 살라는 뜻이다.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성경에 잘 나와있다.
또한 하나님의 유니버스는 수많은 공동체와 조직들, 나라들, 세상 우주를 아우르는 ultimate universe 이다.

그런데 많은 교회나 신앙 공동체 중에는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구분된 이분법적인 곳도 많다. 바운더리 안팎으로 정말 판이하게 다른 세계 같은 양상. 세상 속에서는 잘 나가지 못해서 받는 설움을 교회나 신앙 공동체 속에서 어떤 직위나 사역을 맡음으로서 위로를 받는다는 글도 어디선가 읽었다 (이전 이민 한인교회에 관한 오래전 글이었다). 많은 공동체나 교회들에서는 사역자나 리더가 되면 정말 슈퍼 히어로같은 대접을 받기도 한다. 아니면 celebrity 나 influencer 같은 영향력을 가지기도 한다. 또 많은 경우 그런 대접이나 영향력은 그 교회나 공동체에만 한정되지, 바운더리를 조금만 벗어나도 그건 효력을 잃기도 한다.

주목받는 위치에 있는 사역자나 리더들은 정말 조심해야 할 듯 하다. 인기나 관심, 인간의 평가에 취하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서 정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따르는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고 또 돌아봐야 할 듯 하다. 공동체나 교회에서 맡은 역할과 실제의 자신을 혼동해서 자아팽창의 부작용을 겪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런 것을 경계하고 조심하지 못해서 실족하고 무너진 이들이 정말 많다. 그래서 이제는 그런 위치에 서는 건 자동으로 실족하는 길로 이어지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때도 있다. 어찌 보면 그런 이들에게는 "가서 우유나 사 오렴" 하는 '어머니'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진정한 하나님의 ultimate 유니버스에 속한 이들의 왕같은 제사장들,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identity 는 슈퍼 히어로, celebrity, influencer 등에 비교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것이긴 하다. 그런 이들로서 세상 속에서 자아팽창의 부작용을 경험하지 않고, 건강한 identity 를 가지고 예수님을 뒤쫓는 삶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살아가야 하나? 막 떠오르는 모습은 '가서 우유를 사 오는 것'도 주께 하듯이 사랑으로 하는 것.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렇게 우유를 사 오는게, 슈퍼 히어로의 (주께 하듯 하지 않는) 파워보다도 더 강력한 것이라는 거다.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applications....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고민하는 것들이다.

:
Posted by pleasing2jc

시편을 몇 편을 대충 쭉 읽다가 102 편에 주의가 집중되었다.
안그래도 최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있기도 했었고,
지난 주 전력질주를 좀 했더니 몸/마음이 지쳐서 시편저자에 감정이입도 했나보다. (시편저자의 고난과 고통에 비교 될 바 없는 '피로함'일 뿐이다)
또 24 절의 "mid-point of my life" 라는 말도 눈에 띄었다.
'마음에 와 닿은"대로 따라가는 그닥 바람직하지 않은 성경읽기라고 할 수 있으나...

인터넷의 시편 102 편에 대한 강의를 찾아 들으니 개인기도와 공동체 기도가 섞여있는 시편이라고 한다.
한 개인의 고통에서 시작된 개인의 기도를 공동체의 기도로 승화했다고. 이 시편 안의 공동체라 함은 이스라엘 백성.

지금, 이 시편 저자처럼 기도할 공동체가 있다면 지구 공동체가 떠오른다.
질병, 지진, A 국 사태, 허리케인, 산불, 가뭄, 지진, climate change warning -- 지인 중에는 A 국에 가족이 있는 이도 있고, 또 다른 지인은 가족이 위독해서 중미의 자기나라로 급히 갔고. 동생의 지인은 허리케인을 피해 동생집으로 피난을 왔다고. 모두 다 위해서 기도를 안 할 수가 없다.
산불&가뭄은 지금 캘리포니아에서 계속되고 있는 재난이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 (진보와 생산성, 물질, 폭력, 부패, 테러 등등)이 우상화된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로 인해 힘없고 약한 이들이 고난을 겪고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But) 시편저자의 v12-22 v25-v27 하나님의 왕되심, 하나님의 일하심을 되새기며  하나님 나라의 회복과 주뜻의 이루어짐을 위해 기도해야 겠지

안 그래도 요즘 운전하며 "the blessing" 을 계속 들으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다음 세대를 위해 기도하는 맘이었다.
나만 그런게 아니다. 얘기를 나눈 몇몇 이들도 "우리는 괜찮은데 앞으로 살아갈 아이들은 어떡해요?" 하며 어떤 위기감을 느끼는듯하다.
시편기자도 마찬가지였구나.
v28. The children of your servants shall live secure; their offspring shall be established in your presence.

21 세기에 "mid-point of my life" 를 보내며 수천년전 시편기자의 기도에 동참한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으신 하나님이시다. Verse 27 에도 나와있듯.

:
Posted by pleasing2jc
2021. 8. 28. 14:24

knowing God according to... 카테고리 없음2021. 8. 28. 14:24

.in the person of the Redeemer, we know God not "according to His greatness", secundum magnitudinem, but "according to His love", secundum dilectionem (IV. 34). 

Irenaeus of Lyons (c. 130- c.200) 의 Against the Heresies 라는 책에 나오는 문구라고 - Rowan williams 의 The wound of Knowledge 책 p 27 에 나옴. 

멋지네.

(Rowan williams 의 책은 초반 좀 읽다가 다음에 읽기로 했다.) 

:
Posted by pleasing2jc
2021. 8. 27. 13:48

before God 카테고리 없음2021. 8. 27. 13:48

다양한 많은 이들과 일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일을 잘 하고 성실한 사람인지, 잔머리를 굴리고 있는지 어떤지, 정말 일과 사람들에 진심을 가지고 임하는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나쁘게 얘기하면서 자신이 더 인정받으려 하는지 등등 보인다.
성실하기는 한데 요령이 없다거나 그런것도 보이고...

진심과 성실을 가지고 임하는 사람들은 실력이 못 따라오더라도 이쁘다.
잔머리를 굴려서 자신이 실제보다 많은 일을 하는거처럼 보이게 한대거나
작은 일에도 생색을 내는 이들
행동/성과보다 말이 더 많은 사람들은 피하고 싶다.
다행히 그런 이들은 극히 드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세상'보다는 기독교인들 중에그런 이들이 좀 더 많이 보이기도 한다. 기대가 더 커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까?

어쨌거나,
내 눈에도 그렇게 다 보이는데, 나는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생각하고 분발하게 된다.
사람들도 이렇게 다 아는데, 하나님은 얼마나 더 잘 아실까?


아주아주 오래 전 (기독교 강의를 많이 하시는 교수였는데 강직한 선비 스타일로 보였던 ) 어떤 분이 보스턴에 오셔서 강의하시며, 손을 이마 위에서 흔드시며 "하나님께서는 다 보고 계신다," 하시며 그런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신다고 하셨다. 우리 이마 바로 위에서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거다.

더 나아가 우리 생각과 잠재의식, brain 과 heart 의 모든 것까지 모두 다 꿰뚫고 계신 하나님이시다.
인간들의 눈과 세상의 법들보다도 훨씬 더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고 계신가..
그런 하나님을 의식하고 두려워한다.

:
Posted by pleasing2jc
2021. 8. 15. 14:12

거룩한 바쁨 카테고리 없음2021. 8. 15. 14:12

 오늘 Encounter with God  의 본문 중 Thessalonians 3:6-15 의 말씀이 새롭다. 사도바울의 편지 중에 이런 내용도 있었구나. 

본문의 관찰 해석은 encounter with god 참고

더 나아가ㅡ 거룩한 바쁨, 세속적 바쁨, 안식/거룩함을 가장한 게으름, 거룩한 안식 등등의 차이는 어떠한가 생각해본다. 

2 THESSALONIANS 3:6–18

6 In the name of the Lord Jesus Christ, we command you, brothers and sisters, to keep away from every believer who is idle and disruptive and does not live according to the teaching[a] you received from us. 7 For you yourselves know how you ought to follow our example. We were not idle when we were with you, 8 nor did we eat anyone’s food without paying for it. On the contrary, we worked night and day, laboring and toiling so that we would not be a burden to any of you. 9 We did this, not because we do not have the right to such help, but in order to offer ourselves as a model for you to imitate. 10 For even when we were with you, we gave you this rule: “The one who is unwilling to work shall not eat.”

11 We hear that some among you are idle and disruptive. They are not busy; they are busybodies. 12 Such people we command and urge in the Lord Jesus Christ to settle down and earn the food they eat. 13 And as for you, brothers and sisters, never tire of doing what is good.

14 Take special note of anyone who does not obey our instruction in this letter. Do not associate with them, in order that they may feel ashamed. 15 Yet do not regard them as an enemy, but warn them as you would a fellow believer.

 

:
Posted by pleasing2jc
2021. 7. 22. 14:55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카테고리 없음2021. 7. 22. 14:55

최근 본 한 환자가 내게 말했다, "마치 잠수함을 운전하는 것 같군요."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치료하는 내가 그렇게 보였나보다. 

그러면서 가끔은 현미경을 뒤집어서 different view 도 보라고 한 말씀하신다.  그 아이디어가 넘 웃겨서 킥킥 웃다가,  그 advice 대로 꼭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안그래도 내 전화에는 최근 하늘을 찍은 사진이 많다. 화창한 낮하늘, 그리고 상쾌한 밤하늘.

눈을 부릅 뜨고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일하고, 각종 스크린도 잘 보기에 눈을 휴식하는 경우가 잘 없다. 눈이 많이 혹사당하는 현대사회에서는  눈휴식이 필요한 이들이 무척 많으리라. 눈을 감고 가만히 묵상하듯 있어도 좋지만, 눈에 힘을 빼고 맑은하늘이나 살랑거리는 나뭇잎을 쳐다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작년 9 월 apocalytic 오렌지 빛갈 캘리포니아 하늘을 경험한 후, 맑은 하늘을 참 많이 appreciate 하게 되었다.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 그 문구가 떠올라서 찾아보니 1990 년 학생 영화란다.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잖아요 비슷한 영화라고. 그랬었군. 영화는 안 봤을 테고 신문 광고에서 그 제목을 본 기억이 남아있나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나아지지 않았네... 더 심하면 심해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하늘을 본다.

sky 하늘 도 보고 heaven 하늘도 보려하고.   

 

 

:
Posted by pleasing2jc
2021. 7. 8. 15:20

7 년 카테고리 없음2021. 7. 8. 15:20

아버지가 돌아가신 7 년 되는 날이다. 지난 세월동안 우리를 지켜주시고 위로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나의 고모님들은 20-30 대 때 아버지(나의 할아버지)를 잃었는데,  7 년 전 내게 "세월이 지나도 한없이 그리울 거다," 말씀하셨다. 

막내고모가 20 대 초반 의대를 졸업하고 의대에서 만난 고모부와 결혼해 미국에 온 후 얼마 안되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었다.  인터넷도 없고 국제전화도 쉽지 않고 비행기여행도 드물던 시절,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떨어져서 아버지를 일찍 잃고, 총소리가 들리는 대도시 병원에서 레지던시를 하시기도 하며,  낯설었을 곳들에서 씩씩하게 살아오신 막내고모님을 보며 위로를 받기도 했다. 고모는 돌아기신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맘은 30 년이 지나도 한곁같다고 하셨다. 

시간이 지나면서 들아보니, 고모님들의 그 때  말씀이 진짜 맞다. 슬픔의 정도는 잦아드는지 몰라도 매일매일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그리워하시는 건, 말 할 필요도 없고.

 

지난 기록을 뒤지다가 아버지께서 생전 내게 이런 문구를 보내주셨던 걸 봤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 지금 있는 그곳이 바로 진리(깨달음)의 세계이니라." 어디서나 주체성을 갖고 전력을 다하면 진실된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런 문구를 보내신 것도 잊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것이 아버지의 우리를 향한 기도였을까? 

아버지 , 아버지께서 저의 아버지였음이 너무나도 감사하고, 많이 그립습니다. 

:
Posted by pleasing2jc

 

한국 방송을 보면 가스라이팅 등 심리적인 것들이 많이 다뤄지는 듯 하다. 드라마 주인공들도 소시오패스 싸이코패스 등이 많이 나온다. 

위 방송 프로그램은 보지 않는데. 유튜브에 위 클립 이 떠서 봤다. 

질문은 영어시험을 못 봤을 때 풀이 죽어 앉아있는 아이에게 선생님이 왜 그러냐고 물었을 때 어떻게 대답하는 아이가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아이겠냐고 한다. A. 엄마가 속상해 할 까봐 (풀이 죽어있다) B. 아빠에게 혼날까봐 (풀이 죽어있다). 답은 A 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A 가 개스라이팅을 당한 아이라는 건 맞겠지만, 영어시험을 못 봐서 풀이 죽어있는 이유는 위 두가지여서는 다 건강한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자아와 부모자녀관계가 건강하다면, 아이가 영어시험을 못봐서 풀이 죽는 이유는 그저 자신이 시험을 못 봐서 속상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위 프로그램은 가스라이팅에 대한 주제를 다루는 것이기에 문제출제 상 객관식 항목을 두개밖에 줄 수 밖에 없었겠지. 

나 또한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에게 훈육을 해야 할 경우 어떻게 하는 것이 아이를 진심으로  위하는 것인가 고민해왔고, 어떤 순간 위의 같이 "엄마는 속상해,"하려다가, 이건 아이중심적으로 생각하는것이 아니다 꺠닫는 순간이 있어서 그만둔 적이 있다. 나는 내 아이가 나에게 '연민'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나이가 훨씬 많이 들 때까지는, 아이가 safe 한 곳이 필요할 때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존재가 되었음 좋겠다 (물론 아이가 우선으로 기대야 하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럼에도 아이는 내가 기억도 못하는, 어린 시절 자신이 상처받았던 일들을 얘기하기도 한다. 나름 조심하고 조심한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렇다. 

그래도 그 후로도 뭐 수많은 잘못을 하고 있겠지만, 이제는 아이도 저런 심리학적인 지식이 늘어서 어떻게 건강한 boundary 를  형성할 것인가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것이 manipulation 인가 진정한 사랑과 관심인가 구분하기도 하는듯 하다.  아이는 문과라서 더 그런 것을 잘 알기도 하고, 아이친구들도 그런듯하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therapist 한두번 안 본 사람이 없는듯 하다. 미국교회에서 책 <Boundaries: When to Say Yes, How to Say No to Take Control of Your Life> 책으로 설교나 북클럽을 하는것도 봤다. toxic people 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기사들이나 책들도 심심챦게 마주친다. 예를 들면 이런 Forbes 기사나 Harvard business review 잡지 등등. 

그런 분위기 속에서 어떤 행동과 말을 하는 내 동기가 무엇인가 상당히 많이 쪼개고 쪼개서 성찰해야 하는 것을 많이 느낀다. 내 행동과 말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전달되고 어떤 영향을 끼칠것인가도 고려해야 하고.  진정으로 상대방을 위한 것인가 돌아보고 또 돌아봐야 하고.

누구나 다 그렇듯, 나도 개스라이팅을 겪었다. 특히나 이런 심리학적 상식이 없던 '옛날' 에는 더더욱. 우리 부모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랬다. 부모님들은 그러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셨던 시대이고.

그래도 나는 시험을 못 보면 어머니께서 속상해할까봐 풀이 죽지는 않았고 "혼날까봐" 걱정했었고, 혼을 내시는 어머니께 "이건 내 일인데 왜 나한테  속상해 할 틈을 안 주시냐. 엄마가 왜 그러시냐"고 대들기도 했었다. 그 당시 어머니께서는 좀 당황하셨었는데, 지금 잘 기억 못 하실거다.  그런거보면 나는 나의 어머니에게 '연민'은 없었고 사춘기적 반항심이 가득했었다. 죄송할 따름이다. 요즘은 어린 시절 얘기가 나오면,  그 때 혼내줘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린다. 

다른 사람들에게 가스라이팅적 대우를 받아 곤란한 적도 있었다. 무척 힘든 일을 막 겪은 내게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의 힘든 일로 인해) 00 를 걱정시키지 마세요."   난 OO 를 걱정시킬 생각도 없었고 00에게  의지하는 편도 아니기에 그런 말이 좀 당황스러웠었다. 오히려 그 말을 한 사람과 그 주변사람들이 OO 를 걱정시키는 경우가 많았기에 좀 황당했었다.  또 어떤 이는 한참 더운 날씨에 자기 집 에어컨을 끄며 "이건 더운 거 아니야." 해서 "더운 거에요" 반박하긴 헀으나, 솔직히 섬찟했다. 그 당시는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를 모르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날 컨트롤하러 드는구나 확 느껴졌었다. 

또 다른 사람은, 잘 지내고 있는 내게 힘들지 않냐며 내 감정과 상황을 구구절절 자기 본위대로 얘기해서 좀 당황한 적도 있다. 나름 공감을 실천하려했던 그 사람의 좋은 의도는 이해하기는 한다.   

그래도 그 정도는 mild 한 케이스이고, 더 정도가 심한 일들도 있어서 무척 피폐해졌던 적이 있다. 

물론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적이 많을 것이다. 원래 선을 넘는 조언같은 거 남에게 잘 안하는데 큰 맘먹고 조언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 위 영상에 나오는 그런 가스라이팅으로 받아졌을 수도 있는거 같다. 내가 그 사람을 진정으로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가?  그건 잘 모르겠다.  

그 후로   boundary 와 그와 비슷한 책들, 개스라이팅에 대한 책도 읽었었고 나 스스로도 성찰하기 시작했었다.  

또한 훨씬 더 심한 일들을 겪고 있는 이웃들을 생각한다.  이단이나 human trafficking, 거짓된 정치체제 등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 

정말 심하게 깨어진 세상이다.  인간은 끔찍한 죄인이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하다. 

또 다른 질문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관계를 맺어나가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건강한 자아와 관계가 형성된 후에, 위 tv 프로그램 질문 같은 상황에서 "왜 풀이 죽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진정으로 부모님을 위하는 맘으로 "어머니께서도 속상해 하실까봐서요 " 답할 수도 있을 듯 하다. 어린 아이가 어머니 감정중심으로만 생각해서 풀이 죽어 있는것과는 차원이 다른 상태라고 볼 수 있는.

또 위 tv 프로그램에서 가스라이팅으로 표현된 선 넘는 '오지랖'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남을 진정으로 위하는 말을 할 수도 있는데 그 fine line 을 어떻게 분별할까?  역시 성령님의 도움으로만 가능하다고 할 수 밖에 없을까? 말 한마디 뒤에 숨겨진 수없이 많은 기도와 눈물들? 

역시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기도하며 스스로를 쪼개고 쪼개고 성찰하며 죄성이 관여하고 있는 건 아니지 그리스도의 사랑인지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를 바래야 하나보다.  

그러나 스스로를 쪼개고 쪼개고 성찰하고 아무리 조심하더라도 완전(완벽, 온전)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살 수도 없고.

십자가의 은혜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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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