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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4. 3. 03:41

metanarrative 카테고리 없음2024. 4. 3. 03:41

나는 흔히 자기 성장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성화라는 단어에 일종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언젠가 "완전성화"라는 주제가 모든 디스커션의 중심이 되는 그룹에 있은 적이 있는데 한 지체가 놀러갔다가 부상을 당해서 온 적이 있었다.
부상을 당하고 나서 이 상황에 하나님을 완전히 의지할 수 있는가, 완전성화에  다다를 수 있는가 등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는 말을 들으며 느낀 감정의 영향이 크다. 그 지체는 농담으로 그랬겠지만.
신학적 의미의 성화를 다 옮겨오기에는 시간이 없고,
내가 대략 이해하는 성화의 의미는 얼마나, 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자기 성찰의 의미도 그러하다.  나 중심으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는 것들을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시키는데 필요한 작업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한 자세로 나를 deny 하고 하나님으로 스스로를  채워나가는 작업. 그것이 자기 성찰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몇 십 프로 그 성화의 길에 도달했는지는 내가 상관할 바 아니다. 하나님은 아시고, 난 그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긴다.

팀켈러의 다음 말씀은 명언이다. 

“...the essence of gospel-humility is not thinking more of myself or thinking less of myself, it is thinking of myself less.”

― Timothy Keller, The Freedom of Self-Forgetfulness

그것은 공동체나 교회, 단체 들의 성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의 서사 (대체적으로 saga, legacy, achievement) 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의 서사를 다루고 있느냐, 또 개개체를 그 하나님의 metanarrative 의 일원으로 훌륭하게 참여시키고 있느냐가  공동체 성장의 척도일 듯 하다.
그 하나님의 metanarrative 가 뭔가는 성경에 나와있고, 또 수많은 신학자들이 설명했으니... 
 
가끔 기도할 때, 그 큰 서사 속에서 지금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상상해 볼때가 있다. 
물론 omnipresent, omniscient 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 나와 우리와도 함께 하시고 계시겠지만,
큰 서사 속에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가장 작은 자들, 가장 고통받는 이들과 더욱 함께 하시는 듯 하다. 
그 하나님의 metanarrative 에 직접 참여할 수도 있겠지만,
그 metanarrative 에 참여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기도다.
Royal priesthood 로서 그러한 기도에 대해서 잘 설명하신 NT Wright 의 설교.
https://youtu.be/sGJhhMY4Mn4?si=SOmwAOZ-78rdNt62
그 meta-narrative 에 참여함으로서 나를 잊고 고통받는 이웃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맘을 나누는 것..


오늘 신문기사에도, 전쟁의 폭격으로 humanitarian 일을 하던 이들이 죽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구원을 구한다

그런 세상 속에서 어떤 하나님의 기도를 해야 하나... 
Romans 8:22-24

22 We know that the whole creation has been groaning as in the pains of childbirth right up to the present time. 23 Not only so, but we ourselves, who have the firstfruits of the Spirit, groan inwardly as we wait eagerly for our adoption to sonship, the redemption of our bodies. 24 For in this hope we were saved. But hope that is seen is no hope at all. Who hopes for what they already have?

:
Posted by pleasing2jc
2024. 3. 22. 04:08

찰나에 들어오는 영원 카테고리 없음2024. 3. 22. 04:08

사막영성을 구한다고 밑에 썼지만, 실제 삶은 무척이나 분주하다.

지난 연말부터 일이 바빴고, 드레스업 하는 갈라를 두 개 갔었고, 각종 이벤트로 인해서 많은 이들과 새로운 만남을 가졌다.

드레스업하는 이벤트는 정말 오랜만에 가는 거였다. 가족들에게 "은둔자"가 "파티걸"이 되었다고 농담한다.

모임이나 파티 등은 가기 전에는 너무너무 가기 싫고

막상 가면 즐겁고 좋고 심지어는 더 있어싶어지기도 하는데,

하루이틀 후에 지연된 피로감을 느낀다.

 

이번 주도 MBTI 검사 내향성 70 + 프로로서 피할 수 없는 피로감을 좀 느끼고 있다.

내 내향성에 관한 글 다음: 

 

On being introverted

나는 커피를 상당히 좋아한다. 그런데 커피를 못 마신다. 카페인 때문이다. 카페인의 영향이 금방 몸에 나타난다. 커피를 마시면 밤새 잠을 못자기도 한다. 내 아이는 수박, 체리, 등등 과일을 좋

mnrji.tistory.com

 

오늘 아침도 좋은 사람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학교 선배님) 과 귀한 만남을 가져서 기쁘고 좋다. 

그런데 이제 오후 일을 가려 하니, "기도하고 책읽고 싶다," 등등의 영성을 가장한 게으름이 기승을 부리려고 한다. 

나가기전 잠시 이 시간, 눈감고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를 기도하며

이 찰나에 들어오는 영원을 받아들인다. 

:
Posted by pleasing2jc
2024. 3. 19. 13:40

사막 신앙 카테고리 없음2024. 3. 19. 13:40

얼마 전 아이아빠와의 대화. 아침 출근 시간, 순식간에 이뤄진 짧은 대화였다.

:            000 00 님께서는 신앙생활을, 한국 모범샘처럼 하시는 거 같아요. (사실 난 000 00 님을 개인적으로 잘 모르고, 내가 보는 한정된 겉모습만으로 그렇다는 얘기. )

아이아빠:   그럼 나는 어떤데?

:             광야의 외치는 소리?

아이아빠:    그럼 당신은?

:             사막의 은둔자? 사막의 수도자? .. 아니 사막 뭐라고 하더라? (요즘 이런 term 들이나 사람 이름들을 헷갈릴 때가 종종 있다. 노화로 인한 것이 아니라, 삶이 복잡해지고 내가 기억해야 할 지식의 양과 사람이름들이 너무 많아져서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아이아빠가, 나의 rough assessment 에 동의하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큰 의미가 있는 대화는 아니었으니.   

그 후 나는, "사막의 뭐라고 하던가"의 정확한 term 을 검색해보다가,  사막의 교부들과 교모들에 대해서 remind 되었다 (여러 검색 결과 중, 요약 하나를 밑에 퍼옴) 

사막교부들(사막 은자들)은 AD 3~5세기 동안 사막에서 생활한 수도자들을 가리킨다. 크리스천들이 사막으로 가장 많이 들어간 시대는 AD 4세기이다. 로마제국이 AD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자 사치와 부패로 물든 로마의 타락 문화가 교회에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이에 신앙의 정순성을 열망하는 사람들이 대거 시리아와 팔레스타인과 이집트의 사막으로 들어가 수도생활에 힘쓰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철저히 홀로 서는 단독자의 삶, 곧 은둔자의 삶의 방식을 택했다. 이렇게 해서 AD 3~5세기에 걸쳐 ‘수도생활’이라 알려진 신앙생활 방식이 역사상 처음 등장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수도사들은 독신의 삶, 금식, 고독, 침묵, 철야, 기도, 무소유 같은 금욕적 생활을 추구했다. 이들이 바로 ‘사막교부’로 알려지게 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들로 말미암아 유럽에서 수도원 운동이 시작되었다.
최초의 이집트 사막 수도자들은 성직자도 학자도 아니었다. 물론 그들 가운데 로마의 귀족 아르세니우스와 학자 에바그리우스처럼 고전을 배우고 품행이 세련되었던 사람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 대부분은 평신도였으며 교육을 받지 못한 농부였고, 아폴로 같은 목동이었으며 마카리우스 같은 떠돌이 상인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가르침은 그 어떤 기독교 석학도 따라잡을 수 없는 촌철살인 (寸鐵殺人)의 깨우침을 준다. 이 책은 그들 ‘사막교부들의 수행록’이다. 이 책의 라틴어 원본은 「Verba Seniorum」이다. https://mall.duranno.com/book/copyrighter_info.asp?mbr_num=10416938

 

사막교부들/교모들에 대해서 다룬 현대의 저자들 중에는 헨리 나우웬과 토마스 머튼 등이 있는듯. 또 로완 윌리엄스도 있다.

이렇게 찾아보니, 내가 지금까지 파악을 잘 못하고 있었던 듯 한데, 그들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은 듯도 하다. 헨리 나우웬의 책들을 아주 좋아했고 토마스 머튼을 읽으며 빠져든 시기도 있었다. 로완 윌리엄스 책들도 몇 권 읽었는데 딱 사막영성에 관한 책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책 몇 권을 읽었다고 해서 그 종류의 영성에 대한 지식이 깊다고는 전혀 볼 수 없다. 

엉뚱한 연관성이지만, 23&me 의 유전자 검사 결과에 보면 내게 0.1% 의 coptic Egyptian 의 피가 섞여있다.

에러일 가능성이 크지만 그 결과가 안 바뀐지 벌써 2-3 년째이다. 그에 관한 건 그전에도 쓴 적이 있다. https://mnrji.tistory.com/999

만약에 하나, 이게 에러가 아니라면 아주아주 먼 조상 중에 coptic egyptian 이 한명이라도 있다면 어떻게 한국까지 이르렀을까 잘 모르겠다. 신라시대에 이란 및 중동지방과 교류가 있었다는데 그 떄일까? 

어쨌거나 내가 매력을 느껴온 영성의 종류를 굳이 따지자면 사막교부들 (은자들) 의 그것인 듯 한데, 그것이: 

유전자의 영향일까? 아니면 그런 영성을 나도 모르게 추구해서 epi-genome 이 되어버린걸까? 

영성의 유전자도 있는가? 

하는 엉뚱한 질문들을 던져본다.

이게 에러여서 0.1% 가 사라지면 괜히 섭섭할 거 같다. 에러일 가능성이 크지만~  

나머지 99.9% 의 유전자에 대한 자부심도 무척 크다.  나머지 99.9% 에 합당한 기독교 영성은 어떠한 모습일까 하는 질문도 생긴다. 요즘 시대 풍조와 AD3-5 세기의 시대적 배경을 비교해 보면, 사막 영성이 어느정도 relevant 한 듯도 하다. 그걸 추구하시는 분들도 뵌 듯 하다.  물론 현대 저자들의 여러 책에서 보듯 세상 속 일상 속에서의 사막 영성 추구를 해야겠지. 

어쨌거나 당분간 사막교부들과 교모들에 대해서 탐구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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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