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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 26. 17:36

긍휼 compassion 카테고리 없음2022. 1. 26. 17:36

작년 말 '긍휼'에 대해서 더 배워야겠다고 생각하고 관련 서적을 찾아보다가 헨리 나우웬 등이 쓴 책 Compassion 이 한국에서 <긍휼> 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있는 걸 발견하고 읽기 시작했다.
긍휼의 국어사전 정의: 불쌍히 여겨 돌보아 줌.
Compassion 의 정의: a strong feeling of sympathy and sadness for the suffering or bad luck of others and a wish to help them
이 책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긍휼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는 긍휼의 주체가 그 대상보다 더 나은 처지에 있고 그 대상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맘을 가지는 것이 아닌가 했다. 예를 들면 부유층에 속하는 이가 길에서 구걸하는 거지를 볼 때 가지는 마음, 추위에 벌벌 떨고 있는 유기견을 볼 때 드는 느낌 그런 종류의 sentiment
영어 compassion 이라는 단어를 대할 때도, 긍휼보다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처지 차이가 좀 덜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주제가 대상보다 좀 더 나은 형편이라는 걸 assume 했던 듯 싶다.
그런데 책 에서는

  • compassion 에 대비되는 인간본성을 competition (경쟁) 으로 본다
  • 책에서의 competition 의 개념은 다른 사람 위에 올라서려는 경쟁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해 차이를 두려는 모든 움직임을 포함한다. 나를 구별하려는 모든 움직임을 포함한다는 거다.
  • 그런 all-pervasive competition 은, 타인과 solidarity 를 맺는데 장애가 되고 compassion 을 가지는데도 방해가 된다.
  •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비우시고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인간들과 함께 하셨다. 그것이 "the mystery of God's compassion" 이다. (빌립보서 2:6-9)

성경사전에서는 긍휼을 mercy 라고 번역하는데, 그 어원이 '라함 (racham: 자궁) 이고 '같은 태에서 나온 이들에 대한 감정'이라는 기본적 의미라고.
젖을 빠는 아기에 대한 어머니의 반응 (사 49:15) ,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서 가지는 반응 (렘 31:20), 형제가 형제애 대해 기대하는 마음의 상태 (암 1:11) 을 나타내는데 이 단어가 쓰였다.
즉 다른 이들을 긍휼이 여기는 마음을 가지라 할 때는 내가 그들보다 더 나은 처지에 있다는 구별된 마음에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내가 solidarity 를 이룬 형제자매가족, 즉 하나라는 foundation 에서 그들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라는 말씀이라는 거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아들딸 삼으시고,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형제자매라 하시는것도,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씀도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니까 소위 봉사와 자선, 사역을 하면서 상대편보다 자신이 더 낫고 뛰어나기에 봉사/자선/사역을 한다는 태도를 가지는 것은 이미 compassion 이 아니고 competition 의 동기에서 시작되기에 하나님/예수님의 compassion 을 닮지 못한 거라 할 수 있을까?
남을 향해 불쌍하다는 말을 하는 경우, 그 말을 하는 자신의 깊은 내면에 어떤 동기가 있는가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알고보면 자신이 불쌍히 여기는 상대편으로 인해, 똑같이 (어떤 경우는 더) 불쌍한 자신이 생존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치열히 싸워야 하는 competition 의 인간본능과 전심으로 배워야 하는 예수님의 compassion.
올해, 위의 책을 한번더 읽으면서 생각해 봐야 할 주제다.


사족) 위 글을 쓰다가 그냥 떠오른 드라마. 불쌍한 인간들에 대한 드라마로 <나의 아저씨> 가 있다. 그 드라마에서는 심지어 드라마 속 악당마저 불쌍한 이였다는 결론이었다. 드라마 속 악당 도준영에게 그의 불륜녀/주인공의 아내 강윤희가 하는 말에서처럼:
너 불쌍해. 대학 때부터 불쌍했어. 가진 거 없는 거 티날까봐 여유있는척 다 가진척 연기하는 거 우리 다 알았어. 너가 잘 풀리기 시작하면서 좀 기뻤어"... "근데 여전히 짠하더라. 여전히 긴장하고. 그래도 나랑 있을 땐 네가 긴장하지 않는 거 같아서 내가 뭐라도 된 줄 알았다보지. 난 내가 똑똑한 여잔줄 알았어

vs.
남녀주인공 동훈과 지안의 대화
동훈: 너 나 왜 좋아하는 지 알아? 내가 불쌍해서 그래. 내가 불쌍하니까 너처럼 불쌍한 나 끌어안고 우는거야.
지안: 아저씬 나한테 왜 잘해줬는데요? 똑같은 거 아닌가? 우린 둘 다 자기가 불쌍해요.
서로의 불쌍함을 인정한 인간들의 연대와 극복기(?), 불쌍함을 감추려 했던 악당과 그런 그의 거짓 메시야가 되려고 헀던 이의 말로가 절묘하게 그려진 드라마이기에 그 드라마가 그토록 인기가 많았을까? 잘 모르겠다.
(그러나ㅡ 인간의 근본적 불쌍함을 인정하는 것을 벗어나, 나만 유난히 불쌍하다고 여기는 self-pity 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게 절대 아니라고 믿는다. 위의 기준으로 볼 때 자신을 구별하려는 competition 의 범주에 든다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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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