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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r Journey Together 전체 보기'에 해당되는 글 302

  1. 2024.04.03 metanarrative
  2. 2024.03.22 찰나에 들어오는 영원
  3. 2024.03.19 사막 신앙 1
  4. 2024.03.11 내게도 임하신 돌ㄷ 병원의 징크스
  5. 2024.03.01 on being a healthcare provider 3
  6. 2024.02.27 수행의 journey
  7. 2024.02.25 My ambition
  8. 2024.02.16 알곡과 가라지 1
  9. 2024.02.08 생각의 전환 1
  10. 2024.01.11 where Heaven and Earth meet?
2024. 4. 3. 03:41

metanarrative 카테고리 없음2024. 4. 3. 03:41

나는 흔히 자기 성장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성화라는 단어에 일종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언젠가 "완전성화"라는 주제가 모든 디스커션의 중심이 되는 그룹에 있은 적이 있는데 한 지체가 놀러갔다가 부상을 당해서 온 적이 있었다.
부상을 당하고 나서 이 상황에 하나님을 완전히 의지할 수 있는가, 완전성화에  다다를 수 있는가 등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는 말을 들으며 느낀 감정의 영향이 크다. 그 지체는 농담으로 그랬겠지만.
신학적 의미의 성화를 다 옮겨오기에는 시간이 없고,
내가 대략 이해하는 성화의 의미는 얼마나, 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자기 성찰의 의미도 그러하다.  나 중심으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는 것들을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시키는데 필요한 작업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한 자세로 나를 deny 하고 하나님으로 스스로를  채워나가는 작업. 그것이 자기 성찰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몇 십 프로 그 성화의 길에 도달했는지는 내가 상관할 바 아니다. 하나님은 아시고, 난 그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긴다.

팀켈러의 다음 말씀은 명언이다. 

“...the essence of gospel-humility is not thinking more of myself or thinking less of myself, it is thinking of myself less.”

― Timothy Keller, The Freedom of Self-Forgetfulness

그것은 공동체나 교회, 단체 들의 성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의 서사 (대체적으로 saga, legacy, achievement) 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의 서사를 다루고 있느냐, 또 개개체를 그 하나님의 metanarrative 의 일원으로 훌륭하게 참여시키고 있느냐가  공동체 성장의 척도일 듯 하다.
그 하나님의 metanarrative 가 뭔가는 성경에 나와있고, 또 수많은 신학자들이 설명했으니... 
 
가끔 기도할 때, 그 큰 서사 속에서 지금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상상해 볼때가 있다. 
물론 omnipresent, omniscient 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 나와 우리와도 함께 하시고 계시겠지만,
큰 서사 속에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가장 작은 자들, 가장 고통받는 이들과 더욱 함께 하시는 듯 하다. 
그 하나님의 metanarrative 에 직접 참여할 수도 있겠지만,
그 metanarrative 에 참여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기도다.
Royal priesthood 로서 그러한 기도에 대해서 잘 설명하신 NT Wright 의 설교.
https://youtu.be/sGJhhMY4Mn4?si=SOmwAOZ-78rdNt62
그 meta-narrative 에 참여함으로서 나를 잊고 고통받는 이웃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맘을 나누는 것..


오늘 신문기사에도, 전쟁의 폭격으로 humanitarian 일을 하던 이들이 죽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구원을 구한다

그런 세상 속에서 어떤 하나님의 기도를 해야 하나... 
Romans 8:22-24

22 We know that the whole creation has been groaning as in the pains of childbirth right up to the present time. 23 Not only so, but we ourselves, who have the firstfruits of the Spirit, groan inwardly as we wait eagerly for our adoption to sonship, the redemption of our bodies. 24 For in this hope we were saved. But hope that is seen is no hope at all. Who hopes for what they already have?

:
Posted by pleasing2jc
2024. 3. 22. 04:08

찰나에 들어오는 영원 카테고리 없음2024. 3. 22. 04:08

사막영성을 구한다고 밑에 썼지만, 실제 삶은 무척이나 분주하다.

지난 연말부터 일이 바빴고, 드레스업 하는 갈라를 두 개 갔었고, 각종 이벤트로 인해서 많은 이들과 새로운 만남을 가졌다.

드레스업하는 이벤트는 정말 오랜만에 가는 거였다. 가족들에게 "은둔자"가 "파티걸"이 되었다고 농담한다.

모임이나 파티 등은 가기 전에는 너무너무 가기 싫고

막상 가면 즐겁고 좋고 심지어는 더 있어싶어지기도 하는데,

하루이틀 후에 지연된 피로감을 느낀다.

 

이번 주도 MBTI 검사 내향성 70 + 프로로서 피할 수 없는 피로감을 좀 느끼고 있다.

내 내향성에 관한 글 다음: 

 

On being introverted

나는 커피를 상당히 좋아한다. 그런데 커피를 못 마신다. 카페인 때문이다. 카페인의 영향이 금방 몸에 나타난다. 커피를 마시면 밤새 잠을 못자기도 한다. 내 아이는 수박, 체리, 등등 과일을 좋

mnrji.tistory.com

 

오늘 아침도 좋은 사람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학교 선배님) 과 귀한 만남을 가져서 기쁘고 좋다. 

그런데 이제 오후 일을 가려 하니, "기도하고 책읽고 싶다," 등등의 영성을 가장한 게으름이 기승을 부리려고 한다. 

나가기전 잠시 이 시간, 눈감고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를 기도하며

이 찰나에 들어오는 영원을 받아들인다. 

:
Posted by pleasing2jc
2024. 3. 19. 13:40

사막 신앙 카테고리 없음2024. 3. 19. 13:40

얼마 전 아이아빠와의 대화. 아침 출근 시간, 순식간에 이뤄진 짧은 대화였다.

:            000 00 님께서는 신앙생활을, 한국 모범샘처럼 하시는 거 같아요. (사실 난 000 00 님을 개인적으로 잘 모르고, 내가 보는 한정된 겉모습만으로 그렇다는 얘기. )

아이아빠:   그럼 나는 어떤데?

:             광야의 외치는 소리?

아이아빠:    그럼 당신은?

:             사막의 은둔자? 사막의 수도자? .. 아니 사막 뭐라고 하더라? (요즘 이런 term 들이나 사람 이름들을 헷갈릴 때가 종종 있다. 노화로 인한 것이 아니라, 삶이 복잡해지고 내가 기억해야 할 지식의 양과 사람이름들이 너무 많아져서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아이아빠가, 나의 rough assessment 에 동의하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큰 의미가 있는 대화는 아니었으니.   

그 후 나는, "사막의 뭐라고 하던가"의 정확한 term 을 검색해보다가,  사막의 교부들과 교모들에 대해서 remind 되었다 (여러 검색 결과 중, 요약 하나를 밑에 퍼옴) 

사막교부들(사막 은자들)은 AD 3~5세기 동안 사막에서 생활한 수도자들을 가리킨다. 크리스천들이 사막으로 가장 많이 들어간 시대는 AD 4세기이다. 로마제국이 AD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자 사치와 부패로 물든 로마의 타락 문화가 교회에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이에 신앙의 정순성을 열망하는 사람들이 대거 시리아와 팔레스타인과 이집트의 사막으로 들어가 수도생활에 힘쓰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철저히 홀로 서는 단독자의 삶, 곧 은둔자의 삶의 방식을 택했다. 이렇게 해서 AD 3~5세기에 걸쳐 ‘수도생활’이라 알려진 신앙생활 방식이 역사상 처음 등장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수도사들은 독신의 삶, 금식, 고독, 침묵, 철야, 기도, 무소유 같은 금욕적 생활을 추구했다. 이들이 바로 ‘사막교부’로 알려지게 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들로 말미암아 유럽에서 수도원 운동이 시작되었다.
최초의 이집트 사막 수도자들은 성직자도 학자도 아니었다. 물론 그들 가운데 로마의 귀족 아르세니우스와 학자 에바그리우스처럼 고전을 배우고 품행이 세련되었던 사람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 대부분은 평신도였으며 교육을 받지 못한 농부였고, 아폴로 같은 목동이었으며 마카리우스 같은 떠돌이 상인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가르침은 그 어떤 기독교 석학도 따라잡을 수 없는 촌철살인 (寸鐵殺人)의 깨우침을 준다. 이 책은 그들 ‘사막교부들의 수행록’이다. 이 책의 라틴어 원본은 「Verba Seniorum」이다. https://mall.duranno.com/book/copyrighter_info.asp?mbr_num=10416938

 

사막교부들/교모들에 대해서 다룬 현대의 저자들 중에는 헨리 나우웬과 토마스 머튼 등이 있는듯. 또 로완 윌리엄스도 있다.

이렇게 찾아보니, 내가 지금까지 파악을 잘 못하고 있었던 듯 한데, 그들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은 듯도 하다. 헨리 나우웬의 책들을 아주 좋아했고 토마스 머튼을 읽으며 빠져든 시기도 있었다. 로완 윌리엄스 책들도 몇 권 읽었는데 딱 사막영성에 관한 책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책 몇 권을 읽었다고 해서 그 종류의 영성에 대한 지식이 깊다고는 전혀 볼 수 없다. 

엉뚱한 연관성이지만, 23&me 의 유전자 검사 결과에 보면 내게 0.1% 의 coptic Egyptian 의 피가 섞여있다.

에러일 가능성이 크지만 그 결과가 안 바뀐지 벌써 2-3 년째이다. 그에 관한 건 그전에도 쓴 적이 있다. https://mnrji.tistory.com/999

만약에 하나, 이게 에러가 아니라면 아주아주 먼 조상 중에 coptic egyptian 이 한명이라도 있다면 어떻게 한국까지 이르렀을까 잘 모르겠다. 신라시대에 이란 및 중동지방과 교류가 있었다는데 그 떄일까? 

어쨌거나 내가 매력을 느껴온 영성의 종류를 굳이 따지자면 사막교부들 (은자들) 의 그것인 듯 한데, 그것이: 

유전자의 영향일까? 아니면 그런 영성을 나도 모르게 추구해서 epi-genome 이 되어버린걸까? 

영성의 유전자도 있는가? 

하는 엉뚱한 질문들을 던져본다.

이게 에러여서 0.1% 가 사라지면 괜히 섭섭할 거 같다. 에러일 가능성이 크지만~  

나머지 99.9% 의 유전자에 대한 자부심도 무척 크다.  나머지 99.9% 에 합당한 기독교 영성은 어떠한 모습일까 하는 질문도 생긴다. 요즘 시대 풍조와 AD3-5 세기의 시대적 배경을 비교해 보면, 사막 영성이 어느정도 relevant 한 듯도 하다. 그걸 추구하시는 분들도 뵌 듯 하다.  물론 현대 저자들의 여러 책에서 보듯 세상 속 일상 속에서의 사막 영성 추구를 해야겠지. 

어쨌거나 당분간 사막교부들과 교모들에 대해서 탐구할 듯 하다. 

:
Posted by pleasing2jc

바로 이전 글에서 "지금은 안 그러지만 이전에는 응급환자가 있으면 전화를 받고 급하게 가야 하는 적도 있었다.  꼭 무슨 슬기로운 -- 생활에 나오는 의사들처럼 말이다," 라고 썼었다.

그 후, 지난 2 주 연속 금요일 오후 끝무렵에 전화를 받고 급하게 환자들을 보러가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었다. 한 오피스에서 일이 끝나고 다른 오피스로 운전해서 가야 했었다. 

그 상황을 겪으며 드라마 <낭만ㄷ터 김ㅅ부> 속의  돌ㄷ병원의 징크스가 내게도 임하는구나 싶었다.

드라마 속 그 병원에는 "오늘 환자가 별로 없네요," 라는 류의 말을 하는 순간, 많은 응급환자들이 실려오는 징크스가 있다.

 

이제는 암 말도 하지 말아야겠다. 

:
Posted by pleasing2jc
2024. 3. 1. 06:35

on being a healthcare provider 카테고리 없음2024. 3. 1. 06:35

작년 어머니와 나눈 대화
동생이 교과서 챕터를 썼다는 (first author) 소식을 전해온 후다.  사진은 그 챕터에 나오는 그림. 동생이 하는 수술 중의 하나다. 
어머니: 00 (동생 이름) 이는 어떻게 그렇게 무서운 수술을 잘 하는 지 모르겠다.
: 원래 00 이가 어릴 때부터 호러영화도 좋아하고 손재주도 좋았잖아요?
어머니: 집안에 외과의사는 없는데... (외할아버지, 이모부, 고모들/고모부들, 사촌들 등 의사/치과의사는 있는데 외과의사는 내 동생 하나다.)
: 나도 (치아) 수술을 가끔 하지만 수술이 재미있더라구요. 
어머니: 너네 어릴 때는, 네가 외과의사 할 줄 알았는데, 어떻게 00 이가 외과의사가 되었네. 네가 어린 시절, 내가  손가락을 다쳐서 피가 철철 흐르는데, 나이도 어리던 네가 얼마나 침착하게 잘 대처하던지... (어머니께서 시키시는대로 붕대를 감고 응급조처를 했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 아... 아마도 그럴 수 있었던 건, 그 때 이미 의사의 꿈을 품고 있었었기 때문일거에요.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이 생각하시기로는  동생은 할아버지를 따라서 법조계에 가면 좋지 않을까 하셨고, 나는 외할아버지와 고모들의 영향으로 의사를 하지 않을까 추측하셨었다. 나도 장래희망에는 항상 의사라고 썼었다. 교회에서 배운대로 사랑을 실천하기에는 의사가 좋을 듯 했다.  슈바이처나 나이팅게일, 리빙스턴같은 이들의 위인전의 영향도 받았다.

중고등학교 때는 외과의사가 되어서 수술실에만 살아야겠다 생각했었다. 그 때 그런 생각을 가졌던 이유는 중고등학생의 눈으로 보는 어른의 세계, 특히 한국어른들의 세계는 너무나도 복잡하고 힘들어보였다 -- 복잡다난한 인간관계가 특히 그러해 보였다. 그래서 일과 공부에만 집중하는 삶만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던 듯 싶다.  세상을 피해서 수술실에서 수술만 하면서 살자 그랬던 듯. (드라마 낭만 닥터 김 ㅅ 부의 라이프 스타일이 내가 바라던 딱 그거다.)

동생은 미국에 와서 자연스럽게 이과를 전공했고 치대에 가고, 아주 오랜 구강외과 트레이닝을  받은 후 외과의사가 되었다. 동생이 이 직업에 더 어울리는게 동생은 더 사람들에게 공감을 잘 해주고 손재주도 좋다. 
 

대학까지도 내 꿈은 항상 한결같았었다. 미국에 와서도 당연히 의대를 가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런데  대학 3 학년 시절 Lordship 의 예수님을 믿게 된 후,  "(어린시절부터 붙잡고 살아온) 의사가 되는 꿈을 하나님 앞에 바친다"라는 결심을,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삭을 바치듯 했었다. 교회에서 무슨 설교를 듣고 나서였다. 겁도 없이 그런 결심을 하면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돌려주셨듯 내게도 의사의 꿈을 돌려주시지 않으실까하는 약삭빠른 계산도 섞이지 않았나 내심 고민하기도 했다. 그 후 교회생활을 지나치게  열심히 했고, depression 에도 걸렸었고, 여러모로 어려움이 닥쳐와서  성적이 확 떨어졌었다. 그래서 실제로 의대를 포기해야 했었다. - 함부로 그런 결심&헌신하는게 절대 아니다.  의대포기 뿐 아니라  진로 자체가 어떻게 될지 전혀 불확실하게 되었었다. 한 때는 미국 시골에 가서 숨어 살아야 하나 심각히 고민했다. 

그 후 이끄시는대로 좌충우돌하면서 살았다. Engineering 에 종사해 보려고 노력해 보았으나 일도 잘 안 풀렸고 적성에도 안 맞았다. 또 내 아이디어를 훔쳐서 프로젝트를 하는 post-doc 이나 내가 진행하던 프로젝트를 다른 석사과정 학생에게 주려던 지도교수님 등을 겪었다. 그 분야 선배님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는 거였다. 만약 그런 일들을 겪지 않고 일이 잘 풀렸다면 engineering 을 했을텐데... 결국 여러 사건들을 계기로 healthcare 를 다시 고려하게 되었고 치대에 apply 했고, 지금 여기까지 왔다.  내가 만약 싱글이었다면 의대에 apply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아이를 데리고 의대 수련을 받을 수 있을 거 같지 않았다. 치대를 다니면서도 밤에 가서 수업을 들어야 했는데, 한국에서부터 오셔서 도와주신 어머니 덕분에 가능했다. 우리 부모님 뿐만 아니라 아이와 아이아빠도 수고가 많았었다. 

사람을 보살피는 일이라면 왜 간호사는 아니고 치과의사여야 하는가? 하는 질문도 스스로에게 던졌는데, nursing 을 하기에는 내 이공계 백그라운드가 지나치게 강해서라는 답을 스스로에게 했었다. 또 nurse 의 lifestyle (night-shift 등등의) factor 도 있었다. 

치대를 가기까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하나님꼐 기도하는 긴 기간이 있었다. 어떤 후배가 내 삶의 얘기를 듣더니, "정말 물 흐르는대로 사셨군요," 하던데, 그게 맞는 말이다. 지금도 그러하고..

어린 시절의 바람이 어느 정도 이뤄진 것은, 외과의사같은 본격적 수술은 아니지만 microscope 밑에서 환자치료를 하고, 수술도 가끔 하고, emergency 환자들도 치료한다. 지금은 안 그러지만 이전에는 응급환자가 있으면 전화를 받고 급하게 가야 하는 적도 있었다. 꼭 무슨 슬기로운 -- 생활에 나오는 의사들처럼 말이다. 그런데 사람의 생명이 오가는 직업이 아니라, 치아의 생명이 오가는 직업이라 넘 다행이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막중감... 그걸 감당해 내었을 거 같지 않다. 암전문수술을 하는 동생은 암환자를 10 분만 보고 나와도 맘이 많이 힘들다고 한다.  그에 반해 나는 환자를 보는데서 오는 스트레스는 없다. 왜냐하면 치료를 하면 대부분의 치통은 괜찮아지고 대부분의 치아는 살릴 수 있으니까.  그러나 가끔 (다른 병을 가진) 중환자들이 치아 치료를 받으러 오면 ... 치아치료는 하지만, 그 다른 병이 너무 안타깝고... 환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도 기억하며 기도하는 이들이 몇 된다... 

점심도 못 먹고 환자들을 치료하고 차트를 다 쓰고 집에 오는 차 안에서 점심으로 싸 갔던 프로틴바나 고구마를 우걱우걱 먹으면서, 우리의 일상이 학생시절과 달라진게 뭐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만족한다. 이게 내가 바라던 삶인지도 모르겠다. 

어제는 아이아빠가 가져온 회사음식을 식탁 위에  펼쳐놓고 저녁으로 먹으면서, 아이아빠에게 우리는 여전히 학생처럼 살고 있다고 그랬다. 식탁도 학생시절부터 20 년 넘게 쓴 식탁이다. 아아이빠 왈,  최근 세일해서 10 불하는 바지 세 걔를 샀는데, 우리가 학생일 때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는 거다.  그래.. 학생시절처럼  잔고가 얼마 안 남은 은행 통장 & 크레딧 카드 빚 땜에 걱정하고 기도하며 '돈'에 쪼달리는 삶은 이제 안 사니까 그게 크게 다른 점이다. 매일 회사음식과 고구마/프로틴바, 슈퍼에서 사 온 음식 등으로 간단히 먹으며 살지만, 주말에 한 번정도는 외식도 하고 일년에 한 두 번씩은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고 여행도 가니까.... 아이아빠도 최근 비용이 좀 많이 드는 일이 있었는데 (마땅히 그래야 했던), 그렇게 해도 그 전에 비해서는 큰 영향을 받지 않으니 학생일 때보다는 훨씬 여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아이아빠 회사에서는 밥도 공짜로 준다! 학생시절에는 밀카드 밥값을 내야 했는데~  치과의사/의사들의 임금이 비교적 높고 안정적인 것도 수련이 많이 필요한 전문직이라서 그렇겠지만, 그러한 것이 환자들의 well-being 에 더 집중하는데 도움이 되기는 한다.  물질적 reward 가 직업에의 만족도에 도움이 안된다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요즈음 (한국에서도 그러하지만) 미국 의대/치대 들어가는 경쟁이 점점 더 치열해지고, healthcare 도 자본주의 사상에 지배되고 있는데, 내가 왜 healthcare 의 일을 하고 있는가? 마치 시대의 trend 를 쫓아가듯 진로를 바꿔가면서 택한 길인데, (사실은 멀리 돌아서 온 길이지만) 어떻게 다르게 살아야 하는가? 진정한 healthcare provider 로서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고민하고 기도해야 하는걸 느낀다.

특히나 요즈음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니 더더욱 생각할 것들이 많다. 그 일은 누가 옳고 그른지 잘 모르겠다. 다른 방법으로 그 일을 풀어갈 수도 있을텐데....


어쨌든간에, 환자들을 대하는 맘과 태도, 사람들을 대하는 맘, life style, 돈을 벌고 쓰는 방법 등등등 그 모든 게 다 달라야 한다. 어렵다...  이 시대에 healthcare provider 로서 제대로 살려면 더 맘을 단단히 먹고 struggle 하고 기도해야 하는듯하다.  

:
Posted by pleasing2jc
2024. 2. 27. 15:23

수행의 journey 카테고리 없음2024. 2. 27. 15:23

https://www.youtube.com/watch?v=QfLDObpaV7g&ab_channel=AANasseh 에서 퍼옴

 

치과의사들의 journey 를 다룬 유튭 영상에서 퍼온 이미지다.

치대를 바로 졸업하면 competence 의 level 인데, proficiency, excellence 의 수준을 지나 wisdom 에 다다르게 되는 journey.

치과 아닌 다른 clinician 이나 다른 직종 에게도 어느 정도 적용되는 것 아닐까?

분야에 따라 x axis 의 시간 value 는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다. 

위 그래프에서의 2 만 시간은 40 hours/week 씩 50 week/year 를 일하면 10 년, 3 만 시간은 15 년이다. 

wisdom 의 경지는 leading our community 혹은 returning to our community 등등을 포함하는 수준.

학교들 원서를 쓸 때, 모두 다 community 에 기여하는 이가 되고 싶다고들 하는데, (나 스스로 포함)

그게 그저 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문장이 아니라, 진정한 '나'의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serve 하는 이들의 삶에 기여하는 것, community 에 기여하는 것이 교육과 수련을 받은 이들이 당연히 할 일이 아닌지. 

계속되어야 하는 journey.

:
Posted by pleasing2jc
2024. 2. 25. 16:12

My ambition 카테고리 없음2024. 2. 25. 16:12

1 Thessalonians 4:11-12 (NIV)

11 and to make it your ambition to lead a quiet life: You should mind your own business and work with your hands, just as we told you, 12 so that your daily life may win the respect of outsiders and so that you will not be dependent on anybody.

 데살로니가전서 4:11-12 새번역 (RNKSV)

그리고 우리가 여러분에게 명령한 대로, 조용하게 살기를 힘쓰고,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일을 하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은 바깥 사람을 대하여 품위 있게 살아가야 하고, 또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Francis Chan 목사님의, 위 본문에 관한 설교를 몇 주 전 감명깊게 들었다. 

그렇지. 이런 ambition 도 있었지. 

 

:
Posted by pleasing2jc
2024. 2. 16. 03:37

알곡과 가라지 카테고리 없음2024. 2. 16. 03:37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서 부르던 노래 중에 이런 노래가 있다. 율동과 함께 부르던 노래다.

흔들흔들흔들...  흔들수록 쭉정이는 밖으로 밖으로 밖으로
흔들수록 알맹이는 안으로 안으로 안으로 쭉정이는 날아가고 알곡만 남아요.
우리들은 모두 다 알곡이 됩시다. .... 흔들 흔들 흔들... 알곡 어린이

알곡과 가라지(쭉정이)에 관해서 지난 몇 년간 묵상하고 기도했어야 했었다. 기록을 찾아보니, 2019 년에도 같은 제목으로 글을 썼었다. 

알곡과 가라지

최근 뉴스피드에 뜬 기사들(1) 엘리자베스 홈ㅅ (Theranos) 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 한 때 촉망받던 벤처기업가로 인정받았으나, 회사설립 15 년만에 사기인 것이 드러난 사건. TV, 유튜브, 신문기사

mnrji.tistory.com

뉴스에 뜬 기사들을 예로 들긴 했었지만, 사실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과연 내가 무슨 행동을 해야 하는가? (Should I do something about it?) 아니면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고 있어야 하는가?"  심각한 고민을 하던 시절에 쓴 글이다. 2019 년의 그 글을 쓰기 몇 년 전부터 계속된 on-going 일들에 대한 고민이었다. 내가 뭔가 행동을 취하면 그 consequence 가 클 거라고 여겨저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었다 나에 미치는 consequence 가 아니라 그 일과 관련된 사람들에 미치는 consequence라고 볼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지혜'를 허락하시지 않으셨고, 나는 그저 기다리며, (나도 모르게) 위의 알곡어린이 찬양을 떠올리며 기도만 했었다.

지금 2024 년, 나는 (사실을 밝혀내기 위한)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일을 해결하고 계시는듯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사건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있겠지만, 내 시각은 그들이 그것을 보는 것과 좀 다르다.

그러나, 누가 그 사건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르게 보고 있는가도, 전혀 알 수 없는  일이다.  누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조차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걸 꺠닫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와 온전한 renewal 을 위해서 기도한다.
 

누가 옳다고 판단할 수 전혀 없지만,
이 상황 속에서 분명한 건,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일하시고 계시고,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시만 또한 무서운 하나님이시라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거짓과 교만을 싫어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희석 (watered down) 되는 걸 원하지 않으신다. 
무서운 하나님이시다.

그런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엎드려 고개 조아리고 그의 용서와 자비를 구하고
하나님을 기다리며 그의 은혜로 겸허히 이 세상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그것이 알곡 어린이의 길일지..
그리고 그것이 지난 수천년  믿음의 조상들이 이 세상을 살아온 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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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
2024. 2. 8. 17:10

생각의 전환 카테고리 없음2024. 2. 8. 17:10

Business networking 을 포함한 business 어쩌구 하는 걸 별로 안 좋아했다.  

networking 이라던가 business management 라던가 business 리더쉽이라던가 하는 건, 상대를 향한 순수한 맘이 아니라 개인적 이익을 위한 사심이 동기가 아닌가 싶어서 일부러라도 그쪽 분야에는 관심을 크게 두지 않았다.  대학원 지도교수님은 Networking 의 고수셨는데, 그런 모습을 보면서 실험실을 운영하는 것도 비지니스적 재능이 필요하구나 느꼈었다. 

원래 성격이 introverted 인데다, 미국에서의 문화와 언어로 인해서도 그러해왔고, working mom/wife 로서 살아오면서 아주 적극적으로  networking 을 하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나는 혼자 일하는 거보다는 팀워크를 확실히 더 좋아하기는 한다. 한국 중고딩 학창 시절에는 혼자 책상에 앉아 책만 파고드는게 최고인줄 알다가, 대학시절부터 함께 공부하고 일하는 것이 여러모로 훨씬 좋다는 걸 꺠달았고, 지금도 여러 치과병원들에서 다른 전공분야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걸 무척 즐기는 편이다. 

 

요즘, 어찌하다보니 새로운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되었다. Networking 을 할 필요가 생겼다.  

위에 나열한 이유로 사람에 대한 순수한 관심 등이 아닌 어떤 목적이 있어서 사람들을 만나고 사귀는 것에 대해서 살짝의 껄끄러움이 느껴져서, 처음에는 그게 무척 어색했다. 뒤늦게 이 나이에 이게 뭐하는 짓인지? 하는 회의가 살짝 들기도 했다.

 

그런데  새로이 사람들을 만나면서 꺠달은 것.

지금까지 다양한 치과들에서 오랜 시간 일하면서 나도 모르게 인맥을 꽤 많이 쌓았다는 거다. 

오랜시간 함께 일하면서 친구가 되었고 좋은 팀워크를 구축하게 되었고... 이제는 서로의 스타일에 무척 익숙한 팀들이 많다. 

또한 이 바닥이 워낙 좁기도 하다. 다들 연결되어 있다.  한곳에서 만난 사람과 다른데서 만난 사람이 서로 아는 사이인 경우가 다반사다. 

게다가 이곳이 워낙 국제적 곳이다. Bay Area 에서 세계 각국 출신 사람들을 만나는게 정말 재미있다.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되면서 Networking 이란 friendship & community buidling 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쪽으로 좀 관심을 가지고 관련문헌들을 읽었다면 더 빨리 그걸 배웠을텐데...)

내 개인적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serve 하는 이들을 더 잘 serve 하기 위해서 필요한 작업. 

새로이 만나는 사람들과도 그렇게 friendship 을 쌓아가고 좋은 community 를 이루고 좋은 팀워크를 구축하게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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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
2024. 1. 11. 16:54

where Heaven and Earth meet? 카테고리 없음2024. 1. 11. 16:54

미국에 산지 수십년이 지났다. 그런데 미국에서 살아오면서 느낀 특이한 점이 있다.

이건 나 혼자만 느끼는 지극히 개인적, 스스로에의 관찰일 수도 있다.

고딩시절까지 한국에서 살 떄의 느낌 & 가끔 한국 방문할 때의 느낌, 또 미국에서 일상을 살면서 가지는 느낌을 비교해 볼 때,

아주 딱 꼬집어 표현할 수는 없지만 대충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왜인지 모르지만 미국에서는 내일이라도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듯한 어떤 긴박성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한국보다는 더더욱 하늘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고 하루하루에 그저 충실할 뿐이다. 

한국에 나가면, 그런 긴박성없이 훨씬 여유롭게 주변을 살피게 되고 세상이 영원히 계속될 듯한 느낌을 가진다.

 

왜 그럴까? 

고딩 시절 배운대로, 전통적/역사적으로 따질 때  순환적 세계관과 직선적 세계관의 차이일까?  흠, 아닌듯 하다.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어린 시절을 보냈고, 미국에서는 이제 나이들어가고 있기에? 아니, 미국에 막 오고 나서도 계속 그러했다. 1990 년대 대학 시절에도 그러했다. 

미국에서는 아무래도 이민자, 나그네로서의 identity 가 더 강해서?

또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 이 땅에서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남기 위해서 온 몸 바쳐서 노력해 온 삶이기 땜일까? 벼랑 끝에 선 이처럼 unpredictable 한 삶을 살아왔기에? 

한국에 비해 미국에서의 삶이 비교적 단조로워서, 우리를 distract 할 수 있는 것이 적기도 하고 하늘을 더 많이 바라볼 수 있어서일까?  

흔한 표현대로 재미없는 천국 vs 재미있는 지옥이기에?

 

적어도 나 개인은 모국을 떠나 타지에서 살 때  "heaven and earth meet" 하는 걸 더 잘 경험하고 느껴왔다. 

이제 한국보다는 미국이 더 익숙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그러하다. 

미국이 where heaven and earth meet 하는 곳이라서가 아니라, 위에 나열한 여러가지 이유로 그러하다.  

하지만 where heaven and earth meet 하는 곳은 temple 이고,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그러한 temple 일텐데...

 

내일 devotional 의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을 읽으며 이런저런 tangential 생각이다. 

 

'ALREADY' AND 'NOT YET' - Scripture Union

 

scriptureunio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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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