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잣거리 신앙이 있다면,
그 외에 다른 여러 '현장'에서의 신앙, 다양한 스타일의 신앙도 있을 것이다.
교회 공동체 신앙, 소그룹 신앙, 연구 신앙, 실험 신앙, 무대/강대상 신앙, 골방 신앙, 광야 신앙, 수도원 신앙, 선교신앙 기타 등등...
그 모두가 필요하고 중요하곘지.
그런데 학교나 입시 공부하듯. 신앙에서도 정답만을 말하고, 정답의 인생이 있다고 믿으며 구하는 경우도 있는 듯 하다.
옛날의 학력고사나 요즘의 수능(한국 입시 제도 잘 모른다) 아니면 미국의 SAT, GRE 등이나 학교 시험에서 정답을 고르듯 그런 식으로 말하고 살아가려 하는 신앙.
그 부작용은 아무래도 가슴이나 삶으로 도달치 못하고 머리에만 머무는 지식을 답안지에 쓰는 스타일의 삶이겠지.
내 답이 아닌 타인의 답을 내 것이라 착각하는 양상.
심지어는 '정답'을 맞추기 위해서 '정답'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자신의 것처럼 암기해서 그대로 옮기는 모여고 쌍둥이같은 신앙도 있을 것이다. (이전, 이슈가 된 적 있는 표절 목회자들이 그 예라 해야 할까? )
하나님의 정답이 하나라고 믿고 그 정답을 '보기' 위해서 기도하고 구하고 노력하지만 결국 보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만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정답인 신앙이 있을까? 글쎄.. 성경 속의 많은 인물들을 보면... 예수님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은 모두가 정답이 아닌 삶을 산 거 같기도 하고, 그 모두의 삶이 정답이었던 거 같기도 하다. 결국 타인의 답이 아닌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정답이겠지. 즉 '정답'은 이미 주어졌는데, 각자가 그 정답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느냐가 질문이겠지. 그것에 정답이 있을까?
거의 10 년 전 마주친 릴케의 시가 떠 올라 아래 옮긴다. 그 당시 썼던 entry 와 함께.
https://mnrji.tistory.com/484
젊은 시인에게 주는 충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마음속의 풀리지 않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
인내를 가지라.
문제 그 자체를 사랑하라.
지금 당장 해답을 얻으려 하지 말라.
그건 지금 당장 주어질 순 없으니까.
중요한 건
모든 것을 살아 보는 일이다.
지금 그 문제들을 살라.
그러면 언젠가 먼 미래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삶이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 줄 테니까.
삶과 세상의 많은 문제들, 현상들, 사람들, 또는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서 쉽게 결론을 내리는 태도에 대해서 생각하던 중 마주친 시. 당장 결론을 내리려는 태도, 또 많은 것에 대해서, 사람들과 하나님에 대해서 쉽게 평가하고 단정하는 태도 또한 reductionism 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릴케가 시인 지망생에게 했다는 충고이라지만, 시쓰기/감상에 큰 관심이 없는 이에게도 참고가 된다.
다음의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말 또한 떠오른다. 신앙은 답을 모른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 이라..
"나는 기독교 신학자다. 사람들은 내가 그런 질문에 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른다. (중략) 그러나 내가 볼 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답 없이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이렇게 사는 법을 배울 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너무나 멋진 일이 된다. 신앙은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위의 인용문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본다.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간다고 해서, 문제를 회피하고 내버려두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거 같다. 인생과 신앙의 문제들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struggle 하면서, 어설픈 결론을 내리려 하지 않고 인내를 가지며 나아가는 것. 어설픈 결론을 진리인 양 설파해서는 더더욱 아니되고. 어쩌다가 얻게 되는 답조차 하나님의 지혜에 못이르는 불완전한 결론일 지 모른다는 여지를 항상 남겨두고 열린 맘과 자세를 유지하는 것.
많은 경우, 해답은 커녕 질문조차 정확히 뭔지 모르고 헤매이고 고뇌할 때가 더 많은 거 같다.
욥기의 온갖 질문들과 어설픈 답들 끝 마지막 부분, 욥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질문들에 해답은 안 주시고 다른 말씀들을 하시며 (우문현답?) 모습을 드러내신 하나님이 문득 떠오른다. 그런 하나님을 마주하고 신뢰하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