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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몇 주 정도 동안 John Piper 와 NT Wright 의 Justification debate 책을 다시 좀 읽으면서 정리해 봤다. 
  • NT Wright  의 The New Testament and the People of God 와 Jesus and the Victory of God 도 좀 읽었음.
  • 일상을 살며, 또 다른 책들도 읽으면서 정리하는 거라서 진도는 더디게 나감.
  • 여기저기서 접하게 되는 칭의론에 대한 잡다한 "정보들" 속에서 혼란스러워서 시작한 작업이다. 최근 갈라디아서를 다시 읽으면서이번 기회에 꼭 칭의논쟁에 대해서 정리하고자 싶었다.
  •  칭의논쟁에 대해서 오래전부터 들어왔고, 이전에 책을 좀 읽기도 했고, 또 다른 이들의 요약을 읽기도 했다. 그래도  이해가 안되어서 디사 책을 읽고 본격적으로 정리해보자 결심했다.
  •  몇 년 전에 조금 읽었을 때보다 다시 읽으니 더 이해가 잘 되는 편. 지금까지 두 사람의 책을 약 70% 정도 읽었다. 
  • 신학초보로서, 숙제하듯 그 책들을 읽으며 드는 생각은 "이건 정말 신학적 논쟁이구나," 라는 것.  
  • 이런 신학적 논쟁은 자연현상이나 화학반응 등을 잘게 쪼개고 분석해서 그 mechanism 을 밝히거나 modeling 을 하는 과학적 작업과 많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동안 (본격적) 신학 혹은 교파 등에 약간의 거부감을 가져왔는데 , 그랬던 이유는 하나님을 알기 이전에 신학 등에 섣불리 사로잡히는 것이 마치 경이로운 대자연을 알기 전에 과학 공식이나 수식에만 집중하는 모습 같아서였다. (이건 한 때 과학/공학 을 공부한 이로서 개인적 경험에 비춘 지극히 personal statement)
  • NT Wright 이 잘 하는 얘기, "성경은 (doctrine 의 모음이 아니라) 이야기다. 시나 드라마, 교향곡과 같다" 등등의 이야기도 그런 이유에서일 듯 하다. 
  • 신앙의 계보를 이어온 힘은 witness 들의 testimony 이지, 신학논쟁은 아니다. - 여기서 testimony 는 간증일수도 있지만 일반적 의미의 간증보다는 증언의 의미가 크다. 
  • John O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나? --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런 책들을 읽고 하는 이유가 "What's the minimum requirement to be saved?" 라는 질문에서 시작해선 안될듯. 이 모든 것을 drive 하는 원동력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인간이 그에 반응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다. 


What is the Gospel?

1. NT wright: Jesus is the King, Jesus is the Lord.  -- Mata-narrative 을 강조

2. 전통적(?) 관점: Justification by Faith  -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 개인 구원을 강조.

 

"Justification" 의 차이. 


1.  Piper 가 옹호하는 칭의 :  

Justification by faith, 그리고 그로 인한 imputed  righteousness  를 강조한다.

Martin Luther 의 신학


2. NT Wright 의 칭의:  

                     God's righteousness 즉 God's faithfulness to His covenant 로 인해 인간은 justify 되고, 

                      covenantal  membership 을 가지게 된다. 

                     John Calvin  의 "In Christ" 신학을 더 지지 (마르틴 루터보다)


첨부:   Justification debate 에 관한 강의 podcast 를 대충 들었다. 루터를 지지하는 이의 강의지만 Thomas (토마스 아퀴나스) - Luther/Calvin 의  doctrine 의 Justification 을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Calvin 또한 imputed righteousness 를 얘기했다고. acquittal of guilt 의 의미에서? - 글쎄 그 정도 수준이라면 상당히 얄팍한 justification 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니, Calvin 의 논리를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그러나 debate 의 세세한 부분까지 알려면 줄기보다 가지로 빠지는 양상이 될 수도 있으니  개요만 이해할 정도면 될 듯 하다 - To be done much later. 


God's righteousness 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의 차이가 칭의의 outcome 의 차이를 가져오는듯 하다. (outcome 이라는 용어 자체가 적절한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서두)


1. NT Wright 가 믿는? righteuosness 정의

God's faithfulness to His covenant (하나님의 백성과의 관계적인 면이 크다)

2. John Piper 가 믿는? righteousness 정의 

God's faithfulness to preserve His Glory, His Holiness. 

(관계적 요소보다는 하나님 그 분 자체의 영광 등에 초점을 더 맞춘듯 느껴진다.)  John Piper 가 그의 설교에서 정의한 하나님의 Holiness 는 "완전함/완벽함" 에 가깝다  (source 를 다시 찾기가 귀찮아 다시 안찾음. 간단한 web search 를 하면 나옴)



 (몇 페이지만 읽어본) Alister McGrath 의 칭의에 관한 책에 따르면, NT Wright 의 관점과 일치한다. 히브리어 등 어원을 따지면, 
하나님의 righteousness 는 그의 covenantal faithfulness  에 가깝다고 한다.


 


어떤 세계관에 기반을 두는가?


1. NT Wright 이 강조하는 칭의론은: 1 세기 유대인의 세계관 혹은 second temple 유대교의 세계관의 framework 에 큰 기반을 둔다.  

즉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 => Exile => Return of Israel 등등. 그렇기에 Justification 의 Covenant 적 의미를 강조하고, 회복된 하나님 나라는 아브라함과의 언약과 (Genesis 12, 15) 더 상관관계가 있다. 

    하나님과의 아브라함과의 언약 자체가 아담 &이브의 죄로 인해 타락한 인류를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 구원하고 복주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2. John Piper 의 책에 직접적으로 언급되진 않지만 유추해 볼 때, 전통적인(?) 칭의론은 Creation-Fall-Redemption-Restoration 의 framework에 기반을 두지 않았을까 싶다. 회복된 하나님 나라는, 아담&이브의 죄  (창세기 3 장) 이전의 상태와 더 상관관계가 있다고 해야 할지?




(NT Wright 에 따르면)1 세기 유대인들의 믿고 있던 바 (narrative) 는 대충 다음과 같다.


1.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받고 귀환하고 언약을 회복하시고 성전을 재건되고 하나님께서 시온에 오심으로서..

2. 이스라엘 백성을 온 세상을 축복하는 통로로 삼으신다는  세계관. 

3.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은 로마통치 하에서 Torah 를 철저히 잘 지키면 그 시대가 앞당겨질거라고 생각했다고. 

4. 그들의 메시야관은 영광 속에서 오시는 화려한 정치적 메시야. 

5.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에겐 정치적 동기가 있었다.  



(NT Wright 에 따르면) 그런데 예수님 사건은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 백성이 중심인 위의 흐름의 framework 는 그대로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참이스라엘 예수님이 중심이 되는 narrative 다.


1. 참이스라엘은 예수님. (ethnic group 으로서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2. 이스라엘 민족이 겪으리라 믿어졌던 고통과 고난을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으로 겪으신다.

3. 에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로 참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4. 예수님께서 왕이신 하나님 나라가 열린다.


부: NT Wright 이 지양하고자 하는 칭의는:


(1) 위와 같은 meta-narrative 를 깡그리 무시해 버리고 아래와 같은 과정만 쏙 빼 와서 그것에만 집중하는 것.


죄인  --- (justification by faith)-----> 의인 (imputed righteous)  


(2) 그렇기에 영혼 구원에 집중하고 개인구원. 죄의 용서&개개인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십자가의 의미 전부가 되어버린 현상.

NT Wright 이 죄의 깊이나 죄의 용서 측면을 약화하는 것은 아니다. "(Membership in God's family) includes as its central element the notion of having one's sins dealt with: "family membership" is not opposed to "forgiveness of sins," but is its proper and biblical context,"  (Justification, p134) 

NT Wright 이 강조하는 것은 죄를 사함받는데서 끝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것. 그에 한정되지 않은 장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데 왜 죄사함에만 집중하느냐 하는 것이다.

(3) 영혼이 구원되어서 사후 heaven 가는 것이 목적인 크리스챤의 삶 

(4) Righteous 를 moral righteous 로 정의하는 것. 

(5) Faith 를 하나님의 faithfulness 로 보기보단 인간의 믿음으로 보는것
(6) Imputed righteousness  는 아니다? - Law court setting 에서 법관의 righteousness 가 죄인에게 전가되지 않는것처럼.  Imputed righteousness 보다는  declaration of status of the righteousness 를 더 옹호. (흠...  이건 잘 수긍이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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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w"의 목적? 혹은 "Law"를  지키는 동기의 차이: 이것을 정확히 아는 것이 마르틴 루터의 갈라디아서 해석과 NT Wright 의 해석의 차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거 같고  (이건  NT Wright 이 정리한게 아니라 내가 정리해 본것.. 틀릴 수 있음)

 

1.  아브라함 언약 그리고 모세의 Torah - 하나님 언약 백성으로서의 표시와 삶의 방식?

2. Second Temple Judaism:  하나님 언약 백성으로서의 표시도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Redemption 을 위해서 더 열심히 지킴

3. 갈라디아서 시대: 

NT Wright 에 따르면 Judaizers in Galatians - Gentile Sinners 가 아닌, 하나님 백성 (인 유대인) 이 되기 위해서 circumcision 이 필요하고 Law 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  

마르틴 루터 등에 따르면: 갈리다아에 율법을 지켜야 justify 된다던 무리가 있었다. 하나님 백성 vs. 이방 죄인의 구도라기보다는 의인 vs 죄인의 구도

4. Martin Luther 시대의 Catholicism - Salvation by faith and moral good works.  구원받기 위해서 moral good works 도 필요하다고? 그에 반대한 마르틴 루터는 Justification by faith 를 주장했고.
5. 현대의 율법주의 (legalism) - Justification 보다는 성화를 위해서 율법적인 것들을 강조하는 면이 크기도 하다? 하지만 구원의 여부와 시점 등이 중요시되던 시절, 특정 종교활동을 안 하거나 어떤 "세상적" lifestyle 을 고수할 경우 " 그 사람 구원받은 거 아닌거 같다," 뭐 그런 질문들을 하기도 한 걸 보면 굳이 성화의 범위에서의 legalism 은 아닌 듯.


Second Temple Judaism 의 유대인들이 법을 지킨 동기와 구약 시대 유대인들이 법을 지킨 동기는 좀 다르다. 하나님 언약 백성으로서의 표시인가? 아니면 법을 지킴으로서 하나님 언약 백성의 redemption 을 앞당기려했나 뭐 그런 차이. 다른 시대의 율법주의들도 미묘한 차이가 있다. 



Question: Law, Life, Action, Work, Obedience 의 연관관계는?

Holy Spirit?

성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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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나 로마서를 어떻게 읽어야 할 지는 아직도 온전히 정리가 안된다. 사도바울(Great uncle Paul in God's family !)  본인이 되지 않는 한 어떤 맘으로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썼는지 다 이해는 못 하리라. 더 공부하면서 tidy up 해야 할 듯. 


그러나 그 책들을 어떻게 읽느냐 보다는, 어떻게 살아내느냐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을 볼 수 있는가? 그 안에 어떻게 머물까가 더 큰 질문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큰 그림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웅장한 뜻과 사랑을 더 깊이 알아간다는데 이 작업의 의미를 둬야 할 듯. Unfathomable God...


33 Oh, the depth of the riches and wisdom and knowledge of God! How unsearchable are his judgments and how inscrutable his ways! (Romans 11:33 ES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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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 wright 의 최근 설교/강의

그가 얘기하는 성경의 narrative 도  진화되고  더 comprehensive 해 지는걸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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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혐오 사건들, 공무원의 망언 등등 으로 인해 분노하고 있는 한국에서도...

최근 여러 사건으로 큰 아픔을 겪고 있는 미국에서도...

John O 목사님이 오늘 인용한 갈라디아서 말씀과 같은 복음의 은혜와 능력이 충만해지도록 기도한다....


 26 for in Christ Jesus you are all sons of God, through faith. 27 For as many of you as were baptized into Christ have put on Christ. 28 There is neither Jew nor Greek, there is neither slave[g] nor free, there is no male and female, for you are all one in Christ Jesus. 29 And if you are Christ's, then you are Abraham's offspring, heirs according to promise. (Galatians 5:26-29 ESV)



:
Posted by pleasing2jc
2016. 6. 8. 02:10

from scattered readings and thoughts 카테고리 없음2016. 6. 8. 02:10

Evil, Narcissism, and Lack of empathy 


1. 20 년만에 다시 읽은 M Scott Peck 의  "People of the Lie" 책에서 요약하길 악의 two ingredients 를 게으름 (laziness)과 악성 자기애 (malignant narcissism) 이라고 했다. 20 세기 정신과 의사의 입장에서 그렇게 요약한것.


- 게으름에 관한 부분은 그의 다른 저서 "The Road Less Travelled" 에서 다뤘고, 악성 자기애에 관한 부분은 "People of the Lie" 에서 다룬다.


2. 21세기 뇌과학자인 Simon Baron-Cohen 의 "The Science of Evil: On Empathy and the Origins of the Cruelty":

 인간 잔인함의 원인을 공감력의 침식됨 (empathy erosion) 에 두고 있다. 공감능력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대상화 (objectify) 한다. 그리고 철저히 나 중심적 ("I" mode) 로 살아간다. 


3. 저자는 공감능력이 아예 없는 상태를 "Zero Degrees of Empathy" 라고 칭한다. 그리고 그 상태는 크게 네 가지로 나눠진다: (1) 경계성 인격장애, (2) 싸이코패쓰 (3) 자기애성 인격장애 (4) 아스퍼거 증후군 . 첫 세 상태는 부정적이지만 아스퍼거 증후군의 상태는 긍정적일 수도 있다.  아스퍼거 증후군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인간에 집중하기 보다는 시스템에 집중한다고. 그렇게 시스템에 집중하는 습성을 잘 이용하면 그런 면에서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4. (실험에서) 공감능력을 measure 할 떄, 다른 이의 eye expression 을 보고 감정을 읽는 테스트를 쓴다고 한다. 


5. M Scott Peck 은  (malignant) narcissism 은  한 가족 안에 발현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을 잠깐 썼고 Simon Baron-Cohen 은 empathy 를 담당하는 뇌부분과 유전자가 있다는 과학적 근거를 든다 (still in hypothesis stage?).  그렇게 공감능력을 familial pattern/genetic predisposition 의 면으로 보는 건 위험할 수도 있지만 부분적으로 타당한 이론일 수도 있다. 


 => M Scott Peck 이 악의 근원 중 하나로 본 malignant narcissism 의 뿌리는 결국 공감력 부재가 이유라는 것. 공감력 부재로 인해 오로지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고 타인을 인간으로 존중하지 못하고 대상화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타인에게 잔인해 질 수 있다는 것.


 - Narcissism epidemic 이라는 책도 있고 이곳저곳에 기사화되듯 자기애의 증상이 더 심해지는 시대이다. 산업화와 자본주의, 물질주의, 온갖 과학기술 문명 발전, 포스트 모더니즘 등등으로 인간을 대상화 (소모품 내지는 funtional unit,  audience 등으로 보는...) 하는 것이 심해지는 동시에, 자기애의 증상이 더 심해지는 시대.


- 물론 성경에서 말하는 죄/악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거역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order 가 꺠어진 것이다.  narcissim은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 스스로를 올려 놓는 것이고 하나님조차 objectify 하는... 


-------------------

Love and empathy


6. 세상에는 자기애가 없는 사람이 없고 백프로 완벽한 공감능력을 가진 사람도 없다.  누구나 스펙트럼 상에 있다. 그것이 건강한 자기애인지 건강한 공감능력의 범주에 있는지 그것이 question 이다. 자기애가 없어도 공감능력이 지나쳐도 그것은 건강하지 못할 수 있기에. 


7. 해은 건강한 자기애와 공감능력의 밸런스를 찾고자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 건강하지 못한 자기애를 이기고 heal 하는 방법은 사랑이다. 


8. M Scott Peck 의 책에서도 narcissism 을 이기고 치유하는 방법은 사랑이라고 한다. 책의 제일 끝부분의 쓰여있는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떠올리게 한다


9. 다른 사람을 objectify 하지 않고 --- 심지어는 다른 사람을 "나의 사랑과 사역의 대상"으로 objectify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한 인간으로 온전히 존중하고 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지혜롭게 사랑하려면 공감능력이 필요하다. 타인의 사고체계 이해 라는 이성적 측면의 공감 뿐만 아니라 상대편의 감정을 공감하는 감성적 능력도 똑같이 중요하다. - Both cognitive and affective empathy    만약 공감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만의 사랑을 강요한다면 핀트가 안 맞을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M Scott Peck 이 "People of the Lie" 에 든 예가 그런 예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 형제를 키우고 있는 부모가 있었는데, 큰 아들이 권총으로 자살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부모는 동생에게 그 권총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다. 형이 자살한 바로 그 권총을. 우울증에 걸린 동생을 만난 저자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그 부모에게 묻는다. 왜 그런 총을 동생에게 선물로 줬냐고. 그건 형처럼 죽으라는 얘기 아니냐고. 그런데 그 부모의 변명은 이러했다 "그 나이 때에 총을 가지는 건 좋은거라고 생각했다. 그 총으로 형이 자살했다는 건 전혀 생각지 않고 선물했다. 우리는 새로운 총을 살 경제적 여유도 없다. 또 우리는 당신(책의 저자) 처럼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단순하기에 다른 이유는 생각하지 않았다." 


- 그 케이스를 읽고 든 질문들: 그 부모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까? 그 총을 선물하면서 그 선물이 해석될 수 있는 여러의미를 정말 전혀 생각도 못할 정도로 무지한 사람들이었을까? 정말로 그들이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작은 아들에게 그 총을 선물했다면? 그들의 잠재의식 속의 의도가 그 총을 작은 아들에게 선물하는 것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을까? 


- 하여튼 저자는 그 부모들이 evil 이라고 한다 (malignant narcissism). 


-  만에 하나, 그들이 정말로 정말로 선한의도 (그들 방식의 사랑?) 를 가지고 그런 선물을 했다면, 작은 아들의 입장에서 그 선물이 어떻게 받아들여 질 수 있는지 생각할 수 있는 공감능력이 결여된 이들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M Scott Peck 의 표현대로 하자면  malignant narcissism 이고 또 다른 저자의 표현대로 하자면 zero degrees of empathy 인 것이다.

 



10. Roman Krznaric 의 "Empathy why it matters & How to Get it": 공감력이 뛰어난 사람들의 6 가지 습관을 설명하고 공감력을 기를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한다. 


11..20 세기는 age of introspection (내성, 자기성찰의 시대) 였고 이제는 age of empathy 로 넘어가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Introspection 혹은 self-reflection 뿐만 아니라 outrospection 이 동시에 이뤄저야 한다고 한다.  다양한 사람들과 문화 등을 대하고 그들의 사고와 감정, 삶 등을 이해하고 공감하는기회를 많이 가져야 한다는 얘기다.  


  --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영화 등을 보는 것들 또한 지평을 넓히는 것: 다른 이들의 생각과 감정, 시야, 세계관등을 이해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12. M Scott Peck 의 The Road Less Travelled 에서도 사랑을 이렇게 얘기한다: “Love is the will to extend one's self for the purpose of nurturing one's own or another's spiritual growth. 자신을 확장시켜 다른 이들을 포함해서 모두의 성장을 도모하는 것. 


 => 자신의 범위를 넓히는 것 -- 스스로를 큰 하나님과 큰 세상에 비추어 보며 자신의 한계와 작음 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다른 이들의 존재와 시야를 수용하고 존중하는 것. 


    성경에 나오는 Deny yourself 라는 말씀 실천: 중세시대의 수도승들 등은 자신의 몸을 때리고 온갖 고난을 self-inflict 하면서 그 말씀을 실천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그런 실천이 어떤 면에선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런데 Deny yourself 라는 말씀을 다르게도  해석 실천할 수도 있을 듯 하다:  

하나님이 구원하신 세상 & 타인들을 향한 사랑으로 "나"를 채워나감으로서, 나의 old self 가 죽고 하나님 안의 new self 로 거듭나는 것을 경험하는 것. "나"의 존재를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 (세상과 타인을 향한 사랑) 으로 채움으로서 내가 작아지고 "죽는다". 물론 나의 근본적 죄성 ( 자기애와 공감능력의 부족 등등등)을 거슬러 세상과 타인을 사랑하는 과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그렇게 할 때 "내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큰 하나님의 나라 속에서 타인들과 세상과 함께 화목하게 하는 "나로 거듭나" 그 하나님 나라 안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 

  

중세시대 수도승들처럼 자신의 몸을 때리고 고행을 하면 나의 죄성이 온전히 다 죽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생길까? 글쎄, 그 수도승님들의 기록들을 읽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아무리 고행을 해도 끝이 없는 죄성과 마주치게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고통 속에 있는 이웃들과 공감하고, 즉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느끼려고 하며 그들을 사랑하며 --- 그러나  때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예수님처럼 사랑하긴 커녕, 근본적 도움 이 되지 못하고, 또 나름대로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해가 되기도 하는 나의 사랑할 수 없음과 한계를 마주하며 회개하며 예수님의 소망에 의지하는 것그것이 스스로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아닌가 싶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러했다. 절대 유일신으로서의 스스로를 버리고 인간이 되셔서 이 세상 속에 적극적으로 들어오셔서 철저히 "타인"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사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서 사랑의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셨다. 그 사랑의 클라이맥스인 십자가 사건 -  스스로를 부인하시고, 그 시대와 그 지역에 한정되지 않은 온 세상과 온 인류를 향한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신...


--------------------

Love, Mercy, and Forgiveness overcome evil 


13. 예수님의 말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말씀.


14. 그것은 단순히 "나 좋고 너 좋자"는 " 홍냐홍냐"수준의 사랑이 아니다. 


15.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역은 많은 의미가 있다. God's Kingdom inauguration . 그러나 어떤 kingdom 인가 하는 것? 

예수님 시대 바리새인들은 Torah 를 엄격히 지키는 purity를 중요시 했고, 그런의미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꿈꿨는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의 Kingdom 은 Love and Mercy 의 Kingdom 이다. (NT Wright  의 책 어디선가 나온 말 paraphrase) 


16. 그런 love and mercy 로 예수님께선 악 (cosmic evil) 을 이기셨고 하나님의 나라를 inaugurate 하셨다. Love and Mercy --  하나님의 nature 이시다. God is Love.


17.  그리고 그런 love and mercy 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용서이다. - NT Wright 이 그의 책 < Evil and the Justice of God> 의 가장 마지막 장을 용서에 할애하듯  evil 을 이기고 하나님의 justice 를 이루는 것이 용서이다. 그것은 남을 용서하는 것 뿐 아니라 자기 용서를 포함한다. 예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건 당연하고. 


18.  구체적으로 어떻게 용서 하고 사랑할 것인가? 십자가 은혜와 사랑,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에 근거를 둔 쉽지 않는 그러나 꼭 해야 할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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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자비, 용서 - 구체적 실천의 부분. 


19. NT Wright 의 <Evil and the Justice of God> 의 마지막 장에서 Miroslov Volf 의 <Exclusion and Embrace> 를 잘 요약한다. 이전 크리스챤들은 exclusion 의 스텝 없이 무조건 embrace 하는 용서에 익숙했다. 그러나 Volf 가 얘기하듯 용서에는 embrace 이전에 exclusion 의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잘못이 무엇인가 뚜렷이 밝히고 대면하는 exclude 하는 작업이다. 그 후에 참된 embrace 가 이뤄질 수 있다는 얘기다. 


등등등. --- 아직 더 많이 공부하고 기도하는 중이다. 

:
Posted by pleasing2jc
2015. 12. 16. 10:18

루시드폴: 아직 있다 카테고리 없음2015. 12. 16. 10:18




친구들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축 처진 어깨를 하고

교실에 있을까 


따뜻한 집으로

나 대신 돌아가줘

돌아가는 길에 

하늘만 한 번 봐줘


손 흔드는 내가 보이니 

웃고 있는 내가 보이니 

나는 영원의 날개를 달고 

노란 나비가 되었어 


다시 봄이 오기 전 

약속 하나만 해주겠니 

친구야,

무너지지 말고 

살아내 주렴


꽃들이 피던 날

난 지고 있었지만 

꽃은 지고 사라져도 

나는 아직 있어


손 흔드는 내가 보이니 

웃고 있는 내가 보이니 

나는 영원의 날개를 달고 

노란 나비가 되었어 


다시 봄이 오기 전 

약속 하나만 해주겠니 

친구야,

무너지지 말고 

살아내 주렴 




누가 누군지 잘 모르겠는 아이도르  등과, 공감하기 힘든 감성팔이 사랑노래들만 있는 가요계인줄 알았는데 

관심을 갖고 들어보니 깊이 있는 노래들이 많다. 

이 시대 (젊은) 세대 등 의 아픔을 노래하고 위로하고 희망을 암시하기도 하는 그런 곡들.


이 시대의 사람들이 만해 한용운님이나 윤동주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일제시대를 살아간 이들의 심정을 느끼듯,

먼 훗날의 사람들은 이 시대의 노래들을 들으면서 이 시대가 어떠했나 피부로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곘다.


<Prophetic Imagination> 책에 보면, prophetic imagination 은 prose (산문)이 아니라 lyrics (운문, 시, 가사?) 를 통해서 표현된다는 말이 있다. 

그런 lyrics 가 오늘 날 기독교에 있는가.. 문득 궁금해진다.  잘 모르겠다. 없다는 의미의 잘 모르겠다가 아니라 진짜로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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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