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학교 1 학년 초기, 한 classmate 가 "귀찮아," 라는 표현을 쓰는 걸 듣고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뭐가 귀찮다고 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클라스를 한대거나 학업에 도움되는 activity 를 귀찮다고 했을 가능성이 크다. 생전처음으로 귀찮다라는 표현을 들은 것도 아닐텐데 왜 그리 놀랐을까? 학업 포함 많은 면에서 두각을 나타내서 나름 '명문대'에 들어온 신입생이, 의욕에 넘쳐 앞날을 위해서 노력하지 않고 그런 표현을 써서 그랬을 수도 있다.또 다른 하나는 내가 한국에서부터 배워왔던 공부철학이 최선 그 이상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거라서 그렇기도 하다. 스스로를 이겨야 하는 극기훈련, 잠을 줄여서 공부한다, 엉덩이가 짛무르도록 공부한다, 주말 & 휴일도 없이 일해야한다는 공부철학에 휩싸여 있었는데, "귀찮다"라니...
2. 그 후 세월이 흘러, 또 한 번 비슷한 형태의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이번에는 사람을 귀찮아하는 듯한 태도에서다. 여러 명이 모인 모임에서 대화 중 어떤 이가 잠시 자리를 뜬 사이, 다른 한 사람이 그 사람의 얘기 듣는게 귀찮다고 표시하는 걸 들었을때다. 꽤 '신앙' 좋다고 여김받는 사람이 그런 태도를 보여서 충격의 정도가 더 컸는지 모르겠다. 또한, 그 때까지는 누군가가 '사람'을 노골적으로 귀찮아하는 걸 본 적이 거의 없기도 했었다. 한편으로는 서로를 귀찮아 할 정도의 선을 넘지않는 이들이 주위에 더 많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자신의 내면의 귀찮음을 남에게 표현하지 않는 이들이 주위에 더 많았던 듯 싶다. 그래서일까? 그 사람의 귀찮아함에 일종의 '쎄함'을 느꼈다.
3. 돌아보면 그런 종류의 '쎄함'을 꽤 유명한 목회자들에게서 느껴본 적이 몇 번 있었다. 설교 중에, 여성을 대상화하는 부적절한 발언을 한대거나, 설교를 듣는 이들을 향해 "수준이 낮다," "머리 나쁘다,"라고 발언을 하던 이들 등. 쎄했다. 그런데 그들은 엉망인 삶을 이미 살고 있었고, 나중에 그 삶이 탄로가 나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엉망인 삶을 살고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새어나오는 듯 하다.
4. 1 번의 그 classmate 는 대학시절, 주위 야망에 찬 동급생들처럼 별나게 화이팅 넘치는 학창생활을 보내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더 잘 맞는 길을 택하면서 지혜로운 대학생활을 보냈던 듯 싶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5. 2 번의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신앙인이었으니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다뤄주셨을까?
6. 열심을 다 하며 살아오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해야 할 것들은 더 많아지는데, 귀찮은 것들도 늘어나고 있다. 예를 들면 밥챙겨먹는것, 쇼핑, 청소, 헤어컷 받으러 가기, 등등. 지금은 두어달에 한 번 하는 머리염색도 앞으로 더더욱 자주 해야 하리라. 오늘도 흰머리 몇 올이 더 도드라져 보여서 두건을 쓰고 일할것인가? 염색을 할 것인가 고민 중이다. 그냥 뽑아버릴까? 귀찮다.
7. 하지만 사람을 귀찮아해서는 안되리라. 2 번의 사람에게서 받은 큰 충격이 반면교사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도 내 시간이 중요하고 내향적 사람이기에 혼자 있는 시간을 안식일 지키듯 지켜야 한다. 그러나 그건 내 한계라고 생각하지, 타인을 탓하며 사람을 귀찮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8. 또 나이가 들어가면서 꺠닫는 건 세상에는 정말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들, 여러 조건과 상관없이 참 진실하고 실속있는 사람이 많다는 거다. 학벌/교육정도, 지식, 신앙공동체 내에서의 직책, socioecomic status, 나이와 상관없이 그러하다. 어느 사람이나, 모양과 정도의 차이는 있는지 몰라도 image of God 를 지니고 있다.
9. 모든 사람을 귀하게 생각할 수 있는 맘과 지혜를 허락해주시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을 하지 못할 때는 그것이 내 한계라는 걸 알 수 있는 겸손함을 허락해주시고, 오해없이 표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길 기도한다. 또한 "쎄한" 사람들을 분별할 수 있고, 지혜롭게 대할 수 있도록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