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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6. 8. 02:10

from scattered readings and thoughts 카테고리 없음2016. 6. 8. 02:10

Evil, Narcissism, and Lack of empathy 


1. 20 년만에 다시 읽은 M Scott Peck 의  "People of the Lie" 책에서 요약하길 악의 two ingredients 를 게으름 (laziness)과 악성 자기애 (malignant narcissism) 이라고 했다. 20 세기 정신과 의사의 입장에서 그렇게 요약한것.


- 게으름에 관한 부분은 그의 다른 저서 "The Road Less Travelled" 에서 다뤘고, 악성 자기애에 관한 부분은 "People of the Lie" 에서 다룬다.


2. 21세기 뇌과학자인 Simon Baron-Cohen 의 "The Science of Evil: On Empathy and the Origins of the Cruelty":

 인간 잔인함의 원인을 공감력의 침식됨 (empathy erosion) 에 두고 있다. 공감능력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대상화 (objectify) 한다. 그리고 철저히 나 중심적 ("I" mode) 로 살아간다. 


3. 저자는 공감능력이 아예 없는 상태를 "Zero Degrees of Empathy" 라고 칭한다. 그리고 그 상태는 크게 네 가지로 나눠진다: (1) 경계성 인격장애, (2) 싸이코패쓰 (3) 자기애성 인격장애 (4) 아스퍼거 증후군 . 첫 세 상태는 부정적이지만 아스퍼거 증후군의 상태는 긍정적일 수도 있다.  아스퍼거 증후군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인간에 집중하기 보다는 시스템에 집중한다고. 그렇게 시스템에 집중하는 습성을 잘 이용하면 그런 면에서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4. (실험에서) 공감능력을 measure 할 떄, 다른 이의 eye expression 을 보고 감정을 읽는 테스트를 쓴다고 한다. 


5. M Scott Peck 은  (malignant) narcissism 은  한 가족 안에 발현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을 잠깐 썼고 Simon Baron-Cohen 은 empathy 를 담당하는 뇌부분과 유전자가 있다는 과학적 근거를 든다 (still in hypothesis stage?).  그렇게 공감능력을 familial pattern/genetic predisposition 의 면으로 보는 건 위험할 수도 있지만 부분적으로 타당한 이론일 수도 있다. 


 => M Scott Peck 이 악의 근원 중 하나로 본 malignant narcissism 의 뿌리는 결국 공감력 부재가 이유라는 것. 공감력 부재로 인해 오로지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고 타인을 인간으로 존중하지 못하고 대상화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타인에게 잔인해 질 수 있다는 것.


 - Narcissism epidemic 이라는 책도 있고 이곳저곳에 기사화되듯 자기애의 증상이 더 심해지는 시대이다. 산업화와 자본주의, 물질주의, 온갖 과학기술 문명 발전, 포스트 모더니즘 등등으로 인간을 대상화 (소모품 내지는 funtional unit,  audience 등으로 보는...) 하는 것이 심해지는 동시에, 자기애의 증상이 더 심해지는 시대.


- 물론 성경에서 말하는 죄/악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거역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order 가 꺠어진 것이다.  narcissim은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 스스로를 올려 놓는 것이고 하나님조차 objectify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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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and empathy


6. 세상에는 자기애가 없는 사람이 없고 백프로 완벽한 공감능력을 가진 사람도 없다.  누구나 스펙트럼 상에 있다. 그것이 건강한 자기애인지 건강한 공감능력의 범주에 있는지 그것이 question 이다. 자기애가 없어도 공감능력이 지나쳐도 그것은 건강하지 못할 수 있기에. 


7. 해은 건강한 자기애와 공감능력의 밸런스를 찾고자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 건강하지 못한 자기애를 이기고 heal 하는 방법은 사랑이다. 


8. M Scott Peck 의 책에서도 narcissism 을 이기고 치유하는 방법은 사랑이라고 한다. 책의 제일 끝부분의 쓰여있는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떠올리게 한다


9. 다른 사람을 objectify 하지 않고 --- 심지어는 다른 사람을 "나의 사랑과 사역의 대상"으로 objectify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한 인간으로 온전히 존중하고 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지혜롭게 사랑하려면 공감능력이 필요하다. 타인의 사고체계 이해 라는 이성적 측면의 공감 뿐만 아니라 상대편의 감정을 공감하는 감성적 능력도 똑같이 중요하다. - Both cognitive and affective empathy    만약 공감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만의 사랑을 강요한다면 핀트가 안 맞을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M Scott Peck 이 "People of the Lie" 에 든 예가 그런 예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 형제를 키우고 있는 부모가 있었는데, 큰 아들이 권총으로 자살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부모는 동생에게 그 권총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다. 형이 자살한 바로 그 권총을. 우울증에 걸린 동생을 만난 저자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그 부모에게 묻는다. 왜 그런 총을 동생에게 선물로 줬냐고. 그건 형처럼 죽으라는 얘기 아니냐고. 그런데 그 부모의 변명은 이러했다 "그 나이 때에 총을 가지는 건 좋은거라고 생각했다. 그 총으로 형이 자살했다는 건 전혀 생각지 않고 선물했다. 우리는 새로운 총을 살 경제적 여유도 없다. 또 우리는 당신(책의 저자) 처럼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단순하기에 다른 이유는 생각하지 않았다." 


- 그 케이스를 읽고 든 질문들: 그 부모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까? 그 총을 선물하면서 그 선물이 해석될 수 있는 여러의미를 정말 전혀 생각도 못할 정도로 무지한 사람들이었을까? 정말로 그들이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작은 아들에게 그 총을 선물했다면? 그들의 잠재의식 속의 의도가 그 총을 작은 아들에게 선물하는 것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을까? 


- 하여튼 저자는 그 부모들이 evil 이라고 한다 (malignant narcissism). 


-  만에 하나, 그들이 정말로 정말로 선한의도 (그들 방식의 사랑?) 를 가지고 그런 선물을 했다면, 작은 아들의 입장에서 그 선물이 어떻게 받아들여 질 수 있는지 생각할 수 있는 공감능력이 결여된 이들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M Scott Peck 의 표현대로 하자면  malignant narcissism 이고 또 다른 저자의 표현대로 하자면 zero degrees of empathy 인 것이다.

 



10. Roman Krznaric 의 "Empathy why it matters & How to Get it": 공감력이 뛰어난 사람들의 6 가지 습관을 설명하고 공감력을 기를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한다. 


11..20 세기는 age of introspection (내성, 자기성찰의 시대) 였고 이제는 age of empathy 로 넘어가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Introspection 혹은 self-reflection 뿐만 아니라 outrospection 이 동시에 이뤄저야 한다고 한다.  다양한 사람들과 문화 등을 대하고 그들의 사고와 감정, 삶 등을 이해하고 공감하는기회를 많이 가져야 한다는 얘기다.  


  --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영화 등을 보는 것들 또한 지평을 넓히는 것: 다른 이들의 생각과 감정, 시야, 세계관등을 이해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12. M Scott Peck 의 The Road Less Travelled 에서도 사랑을 이렇게 얘기한다: “Love is the will to extend one's self for the purpose of nurturing one's own or another's spiritual growth. 자신을 확장시켜 다른 이들을 포함해서 모두의 성장을 도모하는 것. 


 => 자신의 범위를 넓히는 것 -- 스스로를 큰 하나님과 큰 세상에 비추어 보며 자신의 한계와 작음 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다른 이들의 존재와 시야를 수용하고 존중하는 것. 


    성경에 나오는 Deny yourself 라는 말씀 실천: 중세시대의 수도승들 등은 자신의 몸을 때리고 온갖 고난을 self-inflict 하면서 그 말씀을 실천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그런 실천이 어떤 면에선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런데 Deny yourself 라는 말씀을 다르게도  해석 실천할 수도 있을 듯 하다:  

하나님이 구원하신 세상 & 타인들을 향한 사랑으로 "나"를 채워나감으로서, 나의 old self 가 죽고 하나님 안의 new self 로 거듭나는 것을 경험하는 것. "나"의 존재를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 (세상과 타인을 향한 사랑) 으로 채움으로서 내가 작아지고 "죽는다". 물론 나의 근본적 죄성 ( 자기애와 공감능력의 부족 등등등)을 거슬러 세상과 타인을 사랑하는 과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그렇게 할 때 "내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큰 하나님의 나라 속에서 타인들과 세상과 함께 화목하게 하는 "나로 거듭나" 그 하나님 나라 안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 

  

중세시대 수도승들처럼 자신의 몸을 때리고 고행을 하면 나의 죄성이 온전히 다 죽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생길까? 글쎄, 그 수도승님들의 기록들을 읽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아무리 고행을 해도 끝이 없는 죄성과 마주치게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고통 속에 있는 이웃들과 공감하고, 즉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느끼려고 하며 그들을 사랑하며 --- 그러나  때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예수님처럼 사랑하긴 커녕, 근본적 도움 이 되지 못하고, 또 나름대로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해가 되기도 하는 나의 사랑할 수 없음과 한계를 마주하며 회개하며 예수님의 소망에 의지하는 것그것이 스스로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아닌가 싶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러했다. 절대 유일신으로서의 스스로를 버리고 인간이 되셔서 이 세상 속에 적극적으로 들어오셔서 철저히 "타인"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사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서 사랑의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셨다. 그 사랑의 클라이맥스인 십자가 사건 -  스스로를 부인하시고, 그 시대와 그 지역에 한정되지 않은 온 세상과 온 인류를 향한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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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Mercy, and Forgiveness overcome evil 


13. 예수님의 말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말씀.


14. 그것은 단순히 "나 좋고 너 좋자"는 " 홍냐홍냐"수준의 사랑이 아니다. 


15.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역은 많은 의미가 있다. God's Kingdom inauguration . 그러나 어떤 kingdom 인가 하는 것? 

예수님 시대 바리새인들은 Torah 를 엄격히 지키는 purity를 중요시 했고, 그런의미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꿈꿨는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의 Kingdom 은 Love and Mercy 의 Kingdom 이다. (NT Wright  의 책 어디선가 나온 말 paraphrase) 


16. 그런 love and mercy 로 예수님께선 악 (cosmic evil) 을 이기셨고 하나님의 나라를 inaugurate 하셨다. Love and Mercy --  하나님의 nature 이시다. God is Love.


17.  그리고 그런 love and mercy 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용서이다. - NT Wright 이 그의 책 < Evil and the Justice of God> 의 가장 마지막 장을 용서에 할애하듯  evil 을 이기고 하나님의 justice 를 이루는 것이 용서이다. 그것은 남을 용서하는 것 뿐 아니라 자기 용서를 포함한다. 예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건 당연하고. 


18.  구체적으로 어떻게 용서 하고 사랑할 것인가? 십자가 은혜와 사랑,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에 근거를 둔 쉽지 않는 그러나 꼭 해야 할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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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자비, 용서 - 구체적 실천의 부분. 


19. NT Wright 의 <Evil and the Justice of God> 의 마지막 장에서 Miroslov Volf 의 <Exclusion and Embrace> 를 잘 요약한다. 이전 크리스챤들은 exclusion 의 스텝 없이 무조건 embrace 하는 용서에 익숙했다. 그러나 Volf 가 얘기하듯 용서에는 embrace 이전에 exclusion 의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잘못이 무엇인가 뚜렷이 밝히고 대면하는 exclude 하는 작업이다. 그 후에 참된 embrace 가 이뤄질 수 있다는 얘기다. 


등등등. --- 아직 더 많이 공부하고 기도하는 중이다. 

:
Posted by pleasing2jc
2015. 12. 16. 10:18

루시드폴: 아직 있다 카테고리 없음2015. 12. 16. 10:18




친구들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축 처진 어깨를 하고

교실에 있을까 


따뜻한 집으로

나 대신 돌아가줘

돌아가는 길에 

하늘만 한 번 봐줘


손 흔드는 내가 보이니 

웃고 있는 내가 보이니 

나는 영원의 날개를 달고 

노란 나비가 되었어 


다시 봄이 오기 전 

약속 하나만 해주겠니 

친구야,

무너지지 말고 

살아내 주렴


꽃들이 피던 날

난 지고 있었지만 

꽃은 지고 사라져도 

나는 아직 있어


손 흔드는 내가 보이니 

웃고 있는 내가 보이니 

나는 영원의 날개를 달고 

노란 나비가 되었어 


다시 봄이 오기 전 

약속 하나만 해주겠니 

친구야,

무너지지 말고 

살아내 주렴 




누가 누군지 잘 모르겠는 아이도르  등과, 공감하기 힘든 감성팔이 사랑노래들만 있는 가요계인줄 알았는데 

관심을 갖고 들어보니 깊이 있는 노래들이 많다. 

이 시대 (젊은) 세대 등 의 아픔을 노래하고 위로하고 희망을 암시하기도 하는 그런 곡들.


이 시대의 사람들이 만해 한용운님이나 윤동주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일제시대를 살아간 이들의 심정을 느끼듯,

먼 훗날의 사람들은 이 시대의 노래들을 들으면서 이 시대가 어떠했나 피부로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곘다.


<Prophetic Imagination> 책에 보면, prophetic imagination 은 prose (산문)이 아니라 lyrics (운문, 시, 가사?) 를 통해서 표현된다는 말이 있다. 

그런 lyrics 가 오늘 날 기독교에 있는가.. 문득 궁금해진다.  잘 모르겠다. 없다는 의미의 잘 모르겠다가 아니라 진짜로 잘 모르겠다. 

:
Posted by pleasing2jc

한국에서 미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지 20 여 년이 지났다. 미국생활 초기, 대학생일 때는 매년 한국에 갔었다. 지금과 비교해 자주 나갔어도 인터넷이 발달이 안 되어서인지, 유행어나 표현이 바뀌는것등에 적응 안 될 때가 있었다. 미국 온 후 1-2 년 후 갔을 때, 친구들이 "당연히" 라는 표현을 "당근" 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 안 되었고 (당근은 채소의 한 종류인데 왜 그런 표현을 쓸까?  적응 안되었음.) 또 언젠가부터는 "맛있다"를 "맛나다" 라고 하는 것이 생소했다. 


그와 더불어 한국에서 사회 속 다양한 사람들을 분류하는 기준에도 소위 유행이 있다는 걸 본다. 물론 빈부격차나 신분에 따른 분류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보편적이다.. 한국에서 특이한 점이 있다면 신조어로 한가지 기준이 표현되고 그  한가지 기준이 다른 기준들에 비해서 더 부각된다는 것이다. 그 유행이 미국의 내게는 아직 생소한데, 어느 새 한국사회에선 일반적인 것이 되어 있을 때 놀란다. 


그동안 notice 한 흐름은 다음과 같다.

  • 강남 vs. 비강남 : 1980 년대 중반 - 1990년대 초반부터 강남과 비강남을 구분하는 경향이 있긴 있었지만 1990 년대 중반 이후 경향이 더 강해진 걸 느꼈었다. socio- economic status (SES) 의 기준?
  • 좌파 vs. 우파 (이건 정치적 성향) :  언젠가부터는 좌파와 우파가 흑백처럼 나눠져서 그것이 사회를 양분하는 잣대가 된듯 싶었다. 물론 그 경향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긴 하다.전에는 전라도와 경상도 등 지역에 따른 정치성향 양분화가 더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경상도 좌파도 있고 강남 좌파도 있고 뭐 그러니, 좌파와 우파의 term 을 더 많이 쓰는듯?
  • 갑을 구도: 얼마전부터는 갑을 구도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역시 SES 에의 기준이라고 볼 수 있을까?)
  • 수저론?: 그리고 최근에는 신계급론으로 수저론이 등장했다는 소식을 인터넷 상에서 접했다. 부모의 재산정도에 따라서  흙, 동, 은, 금수저로 나눈대나 뭐래나. (이도 SES 의 기준?)
람을 분류하는 것을 한가지 기준으로만 하는 것은 무척 일차원적이다. 좌표(coordinate?) 로 치자면 x-axis 하나만 존재하는 좌표다.  y axis 나 z axis 등등은 생략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좌표가 먼저 생기고 사회구조와 인간사고가 그것에 지배당하는 것 아니다. 그런 특정한 혹은 특이한 좌표가 부각되는 것은 그 사회의 지배적 가치가 반영되어서일것이다. 한국의 지금 상황이 그렇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지만 그 반대의 경향도 있다. 사회구조/인간사고를 지배하는 좌표가 모든 현상과 사람들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버리는 경우다.한가지 좌표에 의해서 사고가 지배되는 사회의 세계관은 단순하기도 하고 어떤 의미로선 왜곡된 세계관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A 라는 사람이 B 라는 사람에게 특별한 친절을 베푼다고 하자. 그럴 때  B 라는 사람은 "A 라는 사람이 참 친절한 사람이구나" 해석할 수도 있다. 한편 모든 것을 갑을구도로 해석하는 사람은 "A 가 내게 친절을 베푸는걸 보니 내가 이 관계에서 갑인가 보다" 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수저론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로 분류된다면 더 쉽게 좌절/좌조할 수도 있고.... 

그런 일차원적 사회에서 청년기를 맞았다면 탈출을 꿈꿨을 거 같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그런 사회현상에 대해서 오래전 그곳을 떠난 이로서 멀리서 방관하면서 이렇게 얘기하는 거조차 미안하고 가슴아프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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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기준으로 현상이나 사건,  일상을 해석할 것인가는 매일매일의 고민이다. 
그것은 내가 어떤 좌표 위에 존재하는가를 명확하게 알 때 가능한 일이다.

요즘 이런 생각을 많이 한다. 아니, 꽤 오래전부터 그런 기도를 해 왔다. 세상이나 사람들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시각으로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음 좋겠다는 기도. 개인이나 사회의 고정관념과 한계 등에 의해서 왜곡될 수도 있는 시각을 벗어나 하나님의 시각에서 모든 걸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기도.  하나님의 cosmic coordinate 위에서 세상을 분별할 수 있음 좋겠다는 기도. 그런 분별력을 가진 성숙함으로  하나님과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기도.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분별(discern)과 판단(judge)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분별하되 판단/정죄하지는 않는 성숙함이 중요하다.

편으로 치우친 편협한 좌표가 내 삶에 불쑥 들어와, 나를 그 좌표 위에 올려놓고 내 삶을 컨트롤하고 나를 제한하려 할 때가 있다. 그런데 그 편협한 좌표를 와해시킬 힘이 내게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그 편협한 좌표를 피하고 그 좌표와의 접촉을 최소화하게 된다.  그에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자신이 없을 떄 그렇게 한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아직 내공이 부족해서도 그렇고, 내 존재 안에 그 편협한 좌표의 흔적이 내재해 있기 때문에도 그럴 것이다. 소위 시험드는걸 피하고 싶어서다. 

고등학교 어린 시절 한국을 떠나긴 했지만, 어린 맘 한구석에도 일부 한국 사회의 한계적 좌표를 떠나고 싶다라는 맘이 컸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는, 미국에도 똑같이 존재하는 편협한 세상적 기준들을 떠나서 큰 하나님 나라에 속하고 싶다는 맘이 컸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하나님의 가치기준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외적인 것에 치중하지 않고 영적인 것을 구한다는 뭐 그런 얘기다.  

그런데 최근 십수년간 이미  어린시절에 떠났다고 여겼던 특정한 세상적 좌표가 내 삶에 끼치는 영향이  좀 컸기에 힘들 때가 있었다. 그것은 어린 시절 내가 떠나고자 했던 좌표와 다시 연결되는 그 시점에 시작되었다. 그것이 내 안에서 해결되지 않은 그런 문제들과 부딪혀 많이 힘들었다. 오랫동안 힘듦의 원인이 뭔지 정확히 파악 못하고 헤매고 힘들어하다가 최근에야 갈피를 잡기 시작했다. 고민과 기도 중이다.  언젠가는 피하지 않으며 그에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잡고 그 편협한 좌표를 초월하고 그 좌표를 흐리게 만들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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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오늘 읽은 빌립보서 1:9-11 의 사도바울의 기도가 떠오른다.  사랑을 지헤와 총명으로 풍성케 하사..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그런 사도바울의 기도를 따라하게 된다. 사랑을 지혜와 총명으로 풍성케 하사 (하나님의 기준으로) 지극히 선한것을 분별하며....

아마도 사도바울 본인이 하나님의 기준으로 선한것을 분별하는 기준을 가졌나 보다. 그러니까  시기와 분쟁, 이기적 야심 등으로 하나님을 전하는 일들 이들을 판단(정죄)하지 않고, 그런 그들을 통해서도 그리스도가 전해짐을 기뻐했겠지. 심지어 그들이 자신을 해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것은 사도바울 자신의 인간적 기준으로 그 사건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봤기에 그럴 수 있었으리라. 그런 사도바울의 분별력과 시각, 포용력과 사랑을 닮고 싶다.

And this is my prayer, that your love may overflow more and more with knowledge and full insight 10 to help you to determine (discern) what is best, so that in the day of Christ you may be pure and blameless, 11 having produced the harvest of righteousness that comes through Jesus Christ for the glory and praise of God.  (Philippians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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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