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3

« 2025/3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2025. 2. 25. 13:55

자녀의 존엄성 카테고리 없음2025. 2. 25. 13:55

최근에 한 영상을 보다가, 실리콘 밸리에 살면서 vlog 인지 뭔지를 하는 한 젊은 부부를 보고 섬찟한 적이 있다.

실리콘 밸리에서 스타트업도 하고 유튭도 하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부부인데, 최근 임심을 했단다.

그런데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기로 한 이유가, 자신들의 영상에 캐릭터가 하나 더 있으면 좋은데 아이를  낳으면 손쉽게(?) 캐릭터가 생기니 그러기로 했다고 한다. 뱃속 아기의 초음파 사진을 보면서  아주 드라이하게 "We don't know yet it's a boy or a girl,"라고  말하는 걸 봤다. 극강 T 의 어투로 나누는 대화를 들으면서 "유튭 영상을 찍고 있기에 호들갑을 떨지 않는거겠지?" 이해하려 했지만,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그 영상 하나만으로 그 부부를 판단하려 하지는 않지만, 몇 년 전 자신의 아이들 스토리를 주로 올리던 인플루언서가 현실에서는 아이를 학대하던 엄마였대거나, 또 다른 인플루언서의 아이들이 성장해서 부모를 고소했대거나 했던 뉴스가 떠올랐다. 

하기야, 고대시대부터 최근까지도 자녀를 가지려 했던 이유가 대를 잇기 위해서, 노동력을 제공받기 위해서, 또 부모의 부양을 위해서 등등이긴 했지. 또 자녀교육에 집중하는 이유에는, 자녀의 성공을 통해서  자신이 보상받거나 가문의 영광과 체면을 지키고자 하는 욕망이 숨어있기도 하고. 그런 시대가 오래되어왔는데, 21 세기에 소셜네트워크나 유튭 인플루언서가 자신의 채널 캐릭터를 얻기 위해서 자녀를 가진다는 건 낯선 것이 아니고 당연한 것일 수 있겠다. 

점점 경쟁도 심해져가고....  생존하기위해서는 인간끼리의 경쟁뿐만이 아니라, AI, 로봇, 등등의 technology 의 발달에도 신경써야 하고...

이런 시대에 자녀의 존엄성, 또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
Posted by pleasing2jc
2025. 2. 17. 16:51

when heaven comes to earth 카테고리 없음2025. 2. 17. 16:51

AI 를 쓸 일이 별로 없다. 그래도 이미지 생성이나 한번 시험해보자 하고 물어서 받은 그림들.

윈도우를 그냥 닫아버릴까하다가  나름 작품이고, 이 이미지들을 생성하는데 에너지와 물이 소모되었을텐데 아까워서 저장한다. 

 ㅊ GPT 작품들

1. heaven comes to earth 의 이미지 (성경과 NT Wright 신학에 나온 heaven comes to earth 를 그려달라고 부탁헀다)

2. 위 이미지에 예수님과 십자가를 더하라고 했더니...

3. 예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을 더하라고 했다.

4. 왕들과 제국들이 예수님께 절하는 걸 덧붙이라고 헀다. 누가 왕이고 제국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다양한 건축양식으로 제국을 표현한 걸까? 

5. 르네상스 스타일로 바꿔달라고 부탁했다.

 

"on earth as it is heaven" 이나 "shalom" 의 이미지를 그려달라고 하니 대충 1 번과 비슷한 그림. 

이미 있는 옛날 화가들의 그림들과 대충 비슷한 듯 하다.  

:
Posted by pleasing2jc
2025. 2. 14. 05:18

사역과 공동체 카테고리 없음2025. 2. 14. 05:18

개인적으로 약간의 두드러기 반응을 느끼는 두 가지 단어가 있는데 그건 "사역"과 "공동체"이다.  항상 그런 두드러기 반응을 가지는 건 아니긴 하지만서도... 사역과 공동체는 무척이나 소중하고 중요한 것인데 왜 그럴까?  


내가 그런 (내면적) 반응을 가지게 된 이유를 점검해보면
첫째, 처음 예수님을 믿게 된 곳이 공동체와 사역을 무척이나 중요시하던 교회/모임이었다. 공동체와 사역에의 헌신과 희생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곳이었다. 평신도들도 그러했다. 그곳의 헌신과 희생에 버금가는 이들을 지금까지 본 적이 별로 없다.  그곳에서 나도 자연스레 그것들에 큰 가치를 두게 되었지만... to make a long story short, 그 교회/모임의 한계와 과오로 인해서 많은 상처를 가지고 그곳을 떠났고, 그 휴유증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 나만 그러했던 건 아니다. 그곳을 떠난 많은 이들이 있었고, 그들은 심한 휴유증을 겪었었다. 지난 세월동안 그 교회/모임에  많은 사건이 있었고,  그 사이에 규모가 더 커진  그 모임의 문제는 더 심해진 듯 하다. 

나는 그 곳을 떠난 이후에도 한동안 공동체와 사역에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들을 최우선적으로 추구했었다. 지나치게 열심이었던 교회생활.   그러나 돌아보면 그 때만큼 내가 망가져 있었던 적이 없었다. 극단에 치우친 공동체/사역 중심주의가 삶의 다른 영역에 악영향을 주었고, 공동체/사역활동을 열심히 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우월감과 정죄, 즉 교만이 심했었다.  진정한 성숙/성장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그런 개인적 경험으로 인해서, 교회 &신앙공동체/사역에 지나치게 치중된 신앙을 지양하게 된 듯 하다.   


둘째, 모든 것에의 해답이 공동체에 있다는 식의 사고방식. 이전에 어떤 삶의 문제 나눔에도, "기도해봐" 하는 쉬운 답을 들으면 맥이 빠지기도 했는데, 최근에는 "기도" 대신 "공동체"가 더 해답이 되는 걸 많이 본다. 아마도 공동체가 필요한 시대적 이유도 있어서도 있겠지만.. 흠...   


셋째, 신앙을 잘 가지고 있다면 모든 기독교인들은 다 사역자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가정, 직장, 교회, 친구들 모임, 사회ㅡ 심지어는 애완동물과 자연만물에 대해서도.  그런데, 교회나 기독교 단체 내에서 하는 일에 대해서만 사역의 의미를 한정하고,  그 일을 하는 "사역자"를 다른 기독교인들과 구별된 이들로 보는 사고방식이 느껴질 때 거부감이 느껴진다. 그건 전문 사역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전문성은 인정하지만, 전문 사역자임을 어떤 위계질서 속에서 우위에 두려는  사고방식은 거부한다. 


넷째, 이건 미국보다도 한국의 유튜브 설교를 들을 때 가지게 되는 느낌인데, 공동체를 강조하는 목사님들의 agenda 가 느껴질 때다. 일부 목사님들은 교인들이 교회를 우선적으로 하고 서로간에 불화도 없고, 조화롭게 모든 사역이 잘 흘러가야 자신들의 삶이 편해지고 나아지는 것도 있지 않을까?

위의 느낌들은 내가 극복해야 하는 내 내면의 문제로 인한 부분이 분명히 있다.

하나님께서는 공동체를 원하시고, 하나님의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사역은 중요하다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공동체와 사역만을 중요시하는 건 경계해야 할 듯 하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진정한 뜻을 가리는  우상이 되어서는 안되겠지. 과거 "성전"과 "율법"처럼....  


요즘 같은 시대에, 골방&공동체&광장에 대해서 많이 생각케 된다.  골방, 공동체, 광장 외에 또 다른 어떤 category 가 있는지 잘모르겠다.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전문가의 설명이 궁금하다.

어쨌거나 골방과 광장 없이 공동체만을 중시하는 형태의 신앙의 부작용이 위와 같을테고.  골방만 있는 신앙의 부작용이나 광장만 있는 부작용 등등,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형태의 신앙의 부작용이 다분하리라. 이 시대에 어떤 기독교인들이 되어야 하나 생각해 본다.  



:
Posted by pleasing2j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