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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2. 7. 15:45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카테고리 없음2022. 2. 7. 15:45

보스턴에 살던 시절, 하ㅂ드 스퀘어 근처의 아파트 (off-campus housing) 에 산 적이 있다.
하ㅂ드 스퀘어를 지나칠 때면, 땅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정신없이 주워먹고 있는 참새들의 자유로움을 한없이 부러워하던 때가 있었다.
그렇다고 그 때 밥을 굶어야 해서 배가 고픈 시절은 절대로 아니었다. 배가 고프긴 커녕 오히려 다이어트에 신경 쓰던 시절이고, 아파트에 가면 날 돌봐주시러 오신 어머니께서 맛있는 집밥을 해 주시던 시절인데도 맘편하게 학업에 집중할 수 없이, 미래에의 불안감에 몸과 마음이 마비된듯 했었다.
교회생활로 인해 깨진 밸런스로 학업의 위기를 겪은 인생의 첫 좌절 후라서 더 그래했는지도 모르겠다.

https://www.tripadvisor.com/Attraction_Review-g60890-d102693-Reviews-Harvard_Square-Cambridge_Massachusetts.html 에서 퍼옴


마태복음 6: 25- 34 을 수없이 반복해서 읽었으나 염려는 멈출 수가 없었다. 미래에의 걱정과 부담감에 짛눌러서... 정말 심각했다.
그 당시의 내가 생각할 수 있는 하나님나라와 의는, 소위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하는 것 뿐이었다. 부모님께서 반대 하시는데도 교회생활을 지나치게 열심히 했다. 어느 순간 부모님께서 경제적 support을 끊으신 적도 있다. 나름 고심해서 결론낸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했는데, 먹고 마시는 길도 막힌 웃픈 상황을 마주쳤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미련하게 믿음생활을 하면서도 그게 옳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면서도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더하시리라는 '그 모든 것' 아니 좀 더 많은 것에의 욕심이 없다고 할 수 없는 모순을 살았다.
.
.
긴 세월이 흘러서...
이제는 길 위의 참새를 부러워하기는 커녕, 참새들에게 신경도 잘 안 쓴다.
앞 글의 팔자좋은 소나 개도 안 부럽다. 그들의 삶이 심심하진 않을까 한다. 차라리 자신의 의지로 (본능을 따라) 자유롭게 일하는 비버가 좋다. - 마태복음 6:25-34 에 비버를 끼어넣을 수는 없을까?
미래에의 불확실성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이라는 건 알고 있으나, 대학 시절처럼 미래에의 걱정과 염려로 몸과 마음이 마비될 정도는 아니다.
만약 "이 모든 것" 이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라면, 그 문제가 이전보다는 더 충족된 지금 읽는 마태복음 6:25-34 말씀은 더 비장해야 하는것 아닌가 한다.
이전에는 인간 본성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더해지는 것들"에의 어느정도의 사심이 섞여있었다면
현재 이 passage 를 읽을 때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에 온전히 집중해야 할텐데...
지금 이 stage 에서 구하길 원하시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뭘까? 잘 모르겠다.
지난 시간들, 인생의 고비마다 홍해를 건너는 모세와 여리고성 포함 가나안 땅 전투를 치루는 여호수아, 이스라엘백성들을 떠올리며 열심히 기도하곤 했었다.
지금은 그 시절보다 더 간절한 맘으로, 홍해를 건너고 여리고성을 돌듯 또 아이성 전투 아간같은 욕심은 철저히 경계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구하며 그가 원하시는 그의 나라와 그의 뚯이 무언인가 정말 하나님의 답을 구해야 하는 때인듯 하다.
어린 시절처럼 제한되고 모순된 세계관/신앙관에서 성급히 결론지어진 그의 나라와 그의 뜻이 아닌 , 진정으로 그가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매일매일 절실히 구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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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
2022. 2. 6. 09:51

열심히 일하는 동물 카테고리 없음2022. 2. 6. 09:51

아이아빠는 열심히 일하는걸 " 개처럼 일한다," 라고 말한다.
개가 일을 한다면 북극 썰매를 끄는 허스키들이나 광활한 초원에서 양이나 소를 모는 세퍼드, cattle dog 들일텐데, 우리가 성장한 한국에는 그런 개들은 많지 않았을거다. 어디서 그런 표현이 나왔는지? 여기저기 '개'를 갖다붙어 의미를 강조하는 신조어 표현인가 했다. '개꿀잼', '개이득' 같은 종류의 표현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아마도 "work like a dog" 라는 영어표현을 직역해서 쓰나보다.

내게 더 익숙한 표현은 개보다는 "'소'처럼 열심히 일한다" 다.  소띠라서 그 표현에 더 주의를 기울였던 듯 싶다.

근데 곰곰 생각해 보니, 오늘날에는 개도 소도 열심히 일하는 비유로 들기에는 부적합하다.
오늘날 많은 반려견들은 집안의 어린아이와 같은 대우를 받고 있고, 주인을 잘 만나면 '개팔자가 상팔자'라는 말이 참 맞다. 세계의 대부분의 소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 있는지도 모르겠으나, 옛날처럼 쟁기질을 하는 소들은 별로 없을 거 같다. 프리웨이를 지날 때 보이는 캘리포니아의 어떤 소들은 팔자가 정말 좋다. 넓은 초원을 하루종일 풀 뜯어먹으며 거닐며 논다 (태양볕이 뜨겁고 많이 지루하기는 하겠지만).

인터넷에서 퍼옴

 

켈리포니아 소 - 인터넷에서 퍼옴


그럼 동물들 중에 일을 열심히 하는 동물은 뭔가 떠올려보니.... 역시 비버!

인터넷에서 퍼옴

그러고 보니 아이아아빠와 내가 다닌 학교의 마스코트가 비버다.

인터넷에서 퍼옴

흠... 개도 소도 아니었다. 열심히 일하는 건, 비버처럼 일하는 거였다. 

 D*** 비버.  아, Dam 비버 라고 쓴거다.

 오래 전 한국 방송에 나온 비버. - 귀엽네.  

오래 전 한국 방송에 나온 비버 
:
Posted by pleasing2jc
2022. 1. 26. 17:36

긍휼 compassion 카테고리 없음2022. 1. 26. 17:36

작년 말 '긍휼'에 대해서 더 배워야겠다고 생각하고 관련 서적을 찾아보다가 헨리 나우웬 등이 쓴 책 Compassion 이 한국에서 <긍휼> 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있는 걸 발견하고 읽기 시작했다.
긍휼의 국어사전 정의: 불쌍히 여겨 돌보아 줌.
Compassion 의 정의: a strong feeling of sympathy and sadness for the suffering or bad luck of others and a wish to help them
이 책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긍휼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는 긍휼의 주체가 그 대상보다 더 나은 처지에 있고 그 대상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맘을 가지는 것이 아닌가 했다. 예를 들면 부유층에 속하는 이가 길에서 구걸하는 거지를 볼 때 가지는 마음, 추위에 벌벌 떨고 있는 유기견을 볼 때 드는 느낌 그런 종류의 sentiment
영어 compassion 이라는 단어를 대할 때도, 긍휼보다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처지 차이가 좀 덜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주제가 대상보다 좀 더 나은 형편이라는 걸 assume 했던 듯 싶다.
그런데 책 에서는

  • compassion 에 대비되는 인간본성을 competition (경쟁) 으로 본다
  • 책에서의 competition 의 개념은 다른 사람 위에 올라서려는 경쟁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해 차이를 두려는 모든 움직임을 포함한다. 나를 구별하려는 모든 움직임을 포함한다는 거다.
  • 그런 all-pervasive competition 은, 타인과 solidarity 를 맺는데 장애가 되고 compassion 을 가지는데도 방해가 된다.
  •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비우시고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인간들과 함께 하셨다. 그것이 "the mystery of God's compassion" 이다. (빌립보서 2:6-9)

성경사전에서는 긍휼을 mercy 라고 번역하는데, 그 어원이 '라함 (racham: 자궁) 이고 '같은 태에서 나온 이들에 대한 감정'이라는 기본적 의미라고.
젖을 빠는 아기에 대한 어머니의 반응 (사 49:15) ,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서 가지는 반응 (렘 31:20), 형제가 형제애 대해 기대하는 마음의 상태 (암 1:11) 을 나타내는데 이 단어가 쓰였다.
즉 다른 이들을 긍휼이 여기는 마음을 가지라 할 때는 내가 그들보다 더 나은 처지에 있다는 구별된 마음에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내가 solidarity 를 이룬 형제자매가족, 즉 하나라는 foundation 에서 그들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라는 말씀이라는 거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아들딸 삼으시고,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형제자매라 하시는것도,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씀도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니까 소위 봉사와 자선, 사역을 하면서 상대편보다 자신이 더 낫고 뛰어나기에 봉사/자선/사역을 한다는 태도를 가지는 것은 이미 compassion 이 아니고 competition 의 동기에서 시작되기에 하나님/예수님의 compassion 을 닮지 못한 거라 할 수 있을까?
남을 향해 불쌍하다는 말을 하는 경우, 그 말을 하는 자신의 깊은 내면에 어떤 동기가 있는가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알고보면 자신이 불쌍히 여기는 상대편으로 인해, 똑같이 (어떤 경우는 더) 불쌍한 자신이 생존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치열히 싸워야 하는 competition 의 인간본능과 전심으로 배워야 하는 예수님의 compassion.
올해, 위의 책을 한번더 읽으면서 생각해 봐야 할 주제다.


사족) 위 글을 쓰다가 그냥 떠오른 드라마. 불쌍한 인간들에 대한 드라마로 <나의 아저씨> 가 있다. 그 드라마에서는 심지어 드라마 속 악당마저 불쌍한 이였다는 결론이었다. 드라마 속 악당 도준영에게 그의 불륜녀/주인공의 아내 강윤희가 하는 말에서처럼:
너 불쌍해. 대학 때부터 불쌍했어. 가진 거 없는 거 티날까봐 여유있는척 다 가진척 연기하는 거 우리 다 알았어. 너가 잘 풀리기 시작하면서 좀 기뻤어"... "근데 여전히 짠하더라. 여전히 긴장하고. 그래도 나랑 있을 땐 네가 긴장하지 않는 거 같아서 내가 뭐라도 된 줄 알았다보지. 난 내가 똑똑한 여잔줄 알았어

vs.
남녀주인공 동훈과 지안의 대화
동훈: 너 나 왜 좋아하는 지 알아? 내가 불쌍해서 그래. 내가 불쌍하니까 너처럼 불쌍한 나 끌어안고 우는거야.
지안: 아저씬 나한테 왜 잘해줬는데요? 똑같은 거 아닌가? 우린 둘 다 자기가 불쌍해요.
서로의 불쌍함을 인정한 인간들의 연대와 극복기(?), 불쌍함을 감추려 했던 악당과 그런 그의 거짓 메시야가 되려고 헀던 이의 말로가 절묘하게 그려진 드라마이기에 그 드라마가 그토록 인기가 많았을까? 잘 모르겠다.
(그러나ㅡ 인간의 근본적 불쌍함을 인정하는 것을 벗어나, 나만 유난히 불쌍하다고 여기는 self-pity 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게 절대 아니라고 믿는다. 위의 기준으로 볼 때 자신을 구별하려는 competition 의 범주에 든다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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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