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5

« 2024/5 »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Our Journey Together 전체 보기'에 해당되는 글 307

  1. 2017.01.27 일하며 사랑하며
  2. 2017.01.26 narrative
  3. 2017.01.25 From Darkness to Light
  4. 2017.01.18 공동체?
  5. 2017.01.17 믿음
  6. 2016.11.28 추수감사절
  7. 2016.11.22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8. 2016.10.22 정의와 신뢰와 기도
  9. 2016.10.02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음식
  10. 2016.09.22 화양연화를 통한 단상과 습작
2017. 1. 27. 14:53

일하며 사랑하며 카테고리 없음2017. 1. 27. 14:53

직업의 특성 상, 12-1  월은 가장 바쁜 시기다.

좀 과장하자면 대학교 때 학기말기사 기간이 떠오를 정도로 바쁘다.

작년에도 그랬지만 올해도 그 기간에  어머니께서 오셔서 많이 도와주셔서 한결 수월했다. 감사하다...


화장실을 갈 틈도 없이, 점심 먹을 시간도 없이 일을 하면서...

왜 이렇게 일하고 있지? 여러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random thoughts.


1. 중,고등학교 때 나는 독신주의자였고 외과의사가 되고 싶었다. 개인생활없이 환자들을 치료하며 수술실에서 수술만 하며 지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일에 빠져 살고 싶었다.


2. 대학생 시절, 세계에서 가장 tough 한 학교로 꼽히는 곳에서 대학생활을 하면서, 사생활이 거의 없이 일에 빠져 사는 이들을 많이 봤다. 과학과 공학의 발전을 위해서 밤낮없이 헌신한 이들. 어둑어둑한 캠퍼스에서  실험실이나 도서관을 향해 터벅터벅 걸으며, life 없이 일에 빠져 사는 것이 어린 시절 생각했던 거처럼 의미있고 낭만적인 걸까 회의가 들었었다.


3. 대학원 공부까지 하고 직종을 바꾸기로 한 이유는 정말 여러가지가 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왜 내게 그런 결정을 했냐고 물었다. 질문을 하는 사람에 따라서 답이 달라진다. 이제는 그 이유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사람들도 적어졌고 그 당시 이유가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먼 훗날 간략하고 솔직하게 정리해 보고 싶긴 하다. 먼 훗날.... 


대학교 시절, 선교사가 되겠다고 어머니와 argue 한 적도 있고, 남편에게 함께 선교를 가면 어떡겠냐고 막연한 아이디어를 나눴더니, 남편이 자신의 소명은 선교에 있지 않다고 해서 그런가 보다 하기도 했다. 또 선교라는 것이 낭만적이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고... 하지만 항상 이 일상에 온전히 뿌리 내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일상에의 passion 이 없다는 것... 깊은 내면은 허무주의에 가깝다는 것. (전도서 -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4.  왜 이렇게 일하고 있지?  지금도 계속 질문을 던진다. 며칠 내내 웬종일 수술만 하는 외과의사는 아니지만, 어떤 날엔  응급실에서 일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신없다. (외과의사인 동생은 긴 수술을 하긴 하지만 매일 수술만 하는 건 아니란다. )


5. 생각해 보면 2015 년 11 월인가? 까지는 좀 더 여유있는 스케줄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lay-off 를 당한 기간 동안, 일을 늘렸었다. 그 당시 장래에 대한 불안으로 힘들었다. 아이는 11 학년 고등학생인데, 남편 직장이 어디 되는가에 따라 다른 주로 이사를 가야 하나? 미국에 계속 살 수는 있을까? 아이 대학은 보낼 수 있을까? 등등... 남편이 내게 와서 (아마도 자신도 힘이 들어서 그랬겠지만) 아이 학비를 나보고 책임지라고 했다. 


6. 남편이 lay off 되어있던 기간, 불안하고 힘들긴 했지만,  불확실성 마주하고 약 3% 의 excitement 가 있었다. 그 excitement 의 정체는 잘 모르겠다. 글쎄... 대학시절 내 개인적 위기, 아님 남편 대학원 졸업 직후 job 을 구할 떄까지의 어려움 등을 겪어서 단련되어서일지, 아님 믿을 구석이 있다는 믿음 떄문인지? 그 excitement  의 정체는 아직도 모르겠다.

 

7. 그 당시 영화 <Martian> 을 봤다. 최악의 위기 상황 속에서 주인공이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problem solving 을 하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그 주인공처럼 한 번, 나도 panic 하지 말고 기도하면서 이 문제를 풀어가 보자고 결심했었다.  이미 일하는 곳 몇 군데에는, (경험이 쌓였으니) compensation 을 좀 더 올려달라고 부탁했고, rigorous search 와 negotiation 후에 새로운 job 을 찾아서 더 add 했다. 그래서 금요일 밤 늦게까지 일하기도 하고, 토요일에도 일하고, 크리스마스 이브와 new year's eve 에 저녁 8 시까지 일하기도 했다. 그렇게 된 건 영화 덕분도 있지만 은혜라고 믿는다. 광야에서 만나를 공급해주시는 은혜. 


8. 그래서 그 시기부터 무척 바빠지기 시작했다... 


9. 아이가 고등학교를 가면서부터, 아니 그 훨씬 전부터 대학학비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항상 염려가 되었다.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제는 아예 도달 못할 황당한 목표는 아닌듯도 싶다. 


10. 나와 내동생 모두 미국 사립대를 갔다. 25 년 전이긴 하지만, 나와 내동생은 대학 학비나 학업에 필요한 비용 등은 전혀 걱정 안 해도 되는 환경에서 자랐다. 우리 부모님께선 우리에게 명품은 커녕, 학창 시절 나이키 운동화같은것도 안 사주셨지만 (사 달라고 한 적도 없지만) 교육에는 전혀 아끼지 않으셨다. 지금 우리는 아이가 summer program 을 갈 때도 비용을 염두에 둘 수 밖에 없는데, 나와 내동생은 동부 사립대 summer school class 들을 부담없이 다녔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 혜택을 입고 자랐으니 미안해서라도 아이에게도 그렇게 해야 하는거 아닌가 싶은데, 그렇게 해 줄 수 있을지, 또 그렇게 해 줘야 하는지 생각이 많다. 


11. 우리 부모님 세대는 안 그러셨는데, 왜 우리 세대는 이럴까 가끔 곰곰히 생각해 볼 때도 있다. 우리 부모님 세대 또한 절약하시며 규모있게 사시긴 하셨지만 집장만, 자녀 학자금 대출 같은 거 안하셔도 되었었다. 어머니는 일을 안 하셨어도 가족 생활이 충분히 되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모두가 일을 꼭 해야 한다. 요즘 어머니께 가끔 농담한다. 부모님은 부르조아 세대고 우리는 프롤레타리아라고(진짜 노동계급이 들으면 분노할 얘기지만). 미국에서 오래 살아온 일부 노동계급은 이전에 부동산 투자와 은퇴계획 등을 잘 해서 삶의 여유가 있기도 하다. 또 한국도 그렇다. 사회 전반적으로 어려운 분들이 더 많겠지만 일부 시골 농업 종사자들 (이전에) 땅값이 올라서 서울의  중산층보다도 녀들 support 를 더 잘 해서 자녀들은 서울에서 좋은 직장 잡아서 잘 살기도 한단다.  한 번은 경기도 시골의 한 카페에 놀러가서, 그 근처의 무너져가는 기와집을 보면서 저런데서 사는 이들은 참 안 됐다고 말했었다. 그 말을 들으신 어머니께서, "저 사람들은 땅값이 많이 올라서 너희보다도 훨씬 더 부자다," 라고 하시며 웃으셨다. Bay Area 우리의 삶은 중산층을 넘지 않는다. 어떤 친구가  자신이 서민이라고 했는데 우리도 서민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부모님 세대와 우리 세대의 차이가 뭘까?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지만 여기 쓸 필요는 없을 듯 하다. 그것도 먼 훗날에나 정리할 수 있을지...


12. 엇을 위해서 일하고 있지? 분명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면은 있다. 내가 지금 가진 직업에 대해서 많은 이들은 "돈 (물질적 보상)"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그런 연상작용을 내 내면 속에서는 꺠려고 많이 노력한다. 그것을 첫째 목표로 삼지 않으려 애써 노력한다. 그러나 감사하긴 하다. 아니, 때로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육체&정신&감정 노동이라는 생각도 든다. 문화personality 등의 차이에 의한 관계 속에 오는 감정측면을 대하는게 참 어려운 순간도 있다.  더더구나 극심한 육체의 통증을 이미 겪고 있는 이들과 interact 한다는 건 인격수양과 공감능력&냉철한 이성적 판단의 균형 등을 요구한다. 요즘도 참 많이 배운다.  대체적으로 치료 성공률이 95% 로 높은 편이지만 (연구결과, 그리고 Retreatment (재치료) 성공률은 60-85% ), 치료를 해도 잘 안 될 경우 맘이 많이 힘들기도 하다. 지금은 1-2 시간이면 끝나는 procedure 를, 학생 때는  8 시간이 걸려서 했으니, 그만큼 수련이 요구되고 전문성이 요구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자리를 빌러 내 직업을 defend 해 본다)


12. 학생/수련의 떄와 비교해서 월등히 늘어난 spending 은 (헌금/보험/학회 membership fee 등 을 제외하곤) 책구입비다. 


13.  왜 일하고 있지? 아침에 일하러 가면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이 오고, 때로는 응급환자도 오고, 그들의 필요에 따라서 decision making 을 신속히 해서 행동으로 옮겨서 치료를 시작해야 하고. 일단 시작하면 최선을 다 해서 치료를 끝내야 하고... 그렇게 하루가 진행된다. 일의 byproduct 를 통해서 조금이나마 아이를 support 할 수 있다면 많이 감사한 일이다. 언젠가 내 오피스도 열긴 해야 하는데... 내 오피스에 관한 뭔가 뚜렷한 소명의식이 생기면 시동이 걸릴 듯 하다. 아직은 관심이 안간다.  


14. 그냥 그저 지금 하는 일을 참 좋아하긴 한다.. 감사한다. 직종을 바꾸길 참 잘했다고 지금까진 생각된다. 여러모로 그렇다. 앞으로 사람 일이 어찌 될 지 모르기에 또 어떻게 변할지도 모르지만... 이미 한 번 직종을 바꿨기 떄문에 이제는 더 이상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임하기에  감사하며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5. 어쨌거나 그런 이유같은거 지금은 크게 생각 안 하고  그냥 하루하루 매순간 매순간 최선을 다 하고 싶다.. 내가 치료하는 이들에게도 그래야 하고.


16. 어느 순간에나 그를 바라보자. 



17. 문득....

일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하다가, 왜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한다.

원래의 나는 삶에 큰 애착이 있진 않다 (지금도 그렇다).  예수님 만나기 전, 애써 삶의 목표를 높이 정했던 것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서였는지 모르겠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허무주의에 빠져서 어찌 되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예수님 만난 이후의 삶을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도바울의 빌립보서 1:21-26 을 떠올린다.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게 낫지만 그가 사는 이유는 빌립보 서신을 받는 이들을 위해서라고. 사도바울처럼 그렇게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 살고 누고 또 저항하고? 투쟁하고? (ㅋ) 섬기는 삶... 사랑하는 이들이 나의 삶의 이유가 되는 그런 삶.... 그런 삶이 되면, 삶을 계속해 나가려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계속 쭉 많이 있어야겠구나. 일터에서 만나는 이들도 그렇고. 


그러고 보니 이 생각은 몇 년전, 삶에 염증을 느낄 때 일기에 이미 썼던 거다. 다시 되새겨본다.


 

21 For to me, to live is Christ and to die is gain. 22 If I am to go on living in the body, this will mean fruitful labor for me. Yet what shall I choose? I do not know! 23 I am torn between the two: I desire to depart and be with Christ, which is better by far; 24 but it is more necessary for you that I remain in the body. 25 Convinced of this, I know that I will remain, and I will continue with all of you for your progress and joy in the faith, 26 so that through my being with you again your boasting in Christ Jesus will abound on account of me. (빌립보서 1:21-26)




:
Posted by pleasing2jc
2017. 1. 26. 15:14

narrative 카테고리 없음2017. 1. 26. 15:14

누가 narrative 를 장악하는가가 power 인 게 확실한 거 같다.


post-truth 가 2016 년의 단어로 선정되었었고,  

며칠 전에는 alternative facts 라는 말이 문제였다.

한국에서의 국정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도 그렇고,

한국이나 미국의, 언론과 정치권과의 마찰도 그렇고...


인간사에서의 크고 작은 모든 문제가 그렇다.

세계관, 관점의 차이 등에 따라서 narrative 가 완전히 바뀌고,

사소한 사실을 드러내고 말고, 또 어떻게 말하는가에 따라서, 잘못된 정보에 의해서 어떤 사람은 영웅이 되기도 하고 누명을 쓰기도 한다. 


모든 narrative 를 facts 에 근거함으로 하면 좋으련만.

세상이 요상하여 alternative facts 라는 말까지 나왔다.


거짓되고 꼬여진 정보들과 조각난 정보들, 

post-truth, alternative facts 가 흘러 넘치는 세계

매일매일의 일상 속에서도 어떡하면 true narrative 를 볼 수 있는가?...

:
Posted by pleasing2jc
2017. 1. 25. 14:47

From Darkness to Light 카테고리 없음2017. 1. 25. 14:47



늘 받은 소식지 하나.

정크 메일로 버릴 수도 있는 소식지인데, 그 제목이 눈에 확 들어온다.

From Darkness to Light.


칠흙같은 어두움 속에서 빛으로 구출되어서 자유를 찾아 회복하고 있는  소녀의 소식.

오늘 하루종일 가슴에 머문다.


그녀가 겪은 어두움과 그녀가 지금 거하게 된 빛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만약 구출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처참한 삶을 계속해서 살고 있을것이다.

그런 어두움. 그런 빛...

 


그래, 어두워만 보이는 세상....

세상이 총체적으로 변화되어 세상 전체에 눈부시게 찬란한 빛이 비치 날은 언제 올지 모른다.

그러나 그 어디선가, 세상이 무관심한 그 어딘가, 작은 사람 한 명이 어두움에서 빛으로 옮겨진다면,

바로 그곳에서 그는 한없이 기뻐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찬란한 빛의 미소를 짓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그 어디선가,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들판[각주:1]에 남겨두시고, 길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오시며 기뻐하시고 계실지.

그리고.... 칠흙같은 어두움 속에서 길잃은 어린 양들을 찾아 온 산을 헤매고 계실지. 

  1. 들판: wilderness 라고 되어있는 version 이 많으니 들판이라기보다는 황무지라고 해야할까? 아주 안전한 목장을 지칭하는 건 아닐듯하다. 원어로는 어떤 의미일지? [본문으로]
:
Posted by pleasing2jc
2017. 1. 18. 13:50

공동체? 카테고리 없음2017. 1. 18. 13:50

경제 공동체- 한 뉴스에서 새로운 유행어가 될 지도 모른다고 힌 용어 (정확히는 기억안나고 대충 그리 얘기한 듯 하다)

그들의 목적은 너무나도 잘 못 되었는데,
그들의 공동체적 삶은 무척 완벽하다.
평생을 함께 해 왔고
한 맘 한 뜻으로 모든 걸 나누고
함께 결정하고 실행하고
서로를 위해서 안타까워하며 눈물 흘리기도 한다.
한 지갑 경제 공동체까지..

그 형태만 보면 일부 기독교인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공동체의 모양일 듯도 하다.
그들을 포함한 사이비종교나 일부 문제 교회의 공동체성은 무척 철저하고 투철하다.

많은 것에의 답이 공동체가 되어버린 듯 한데..
공동체 이전에 우선되어야 할 것들은...?


:
Posted by pleasing2jc
2017. 1. 17. 05:56

믿음 카테고리 없음2017. 1. 17. 05:56

혼란스러운 역사 속에서도 한결같이 이어져온 사랑의 언약 하나님을 바라보고
인간 역사 속에 오셔서 그의 나라를 임하게 하신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데,
그런 소망이 한없이 갸날프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어그러진 세상의 뉴스들. 

환한 곳에서 빛을 보는 것을 믿음이라 할 수 없고,
어두운 가운데 빛을 볼 수 있는것이 믿음일텐데...

깜깜한 곳에서 빛을 보게 하는 믿음은:
빛을 보리라고 굳게 맘 먹는 결심이나 신념 (의지)도 아니고,
어두움 속에서 빛을 그려보는 상상력도 아니고,
긍정적/낙천적 사고방식도 아니고,
지식을 더 쌓는 것에 의한 것도 아니고.
어두움에 무관심해지고자 해서도 안되고,
화려한 가짜 빛을 쫓는 것도 아닐테고...
(맘이 힘든 가운데, 위와 같은 노력을 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었다.)

그저 아프고 힘들고 황망한 가운데 무릎 꿇고
진정한 빛이신 그를 바라는 것.
또한 우리로 하여금 빛(과 소금)이 되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바라는 것.
그의 사랑과 약속을 신뢰하는 것

그의 Good News 를 믿음. 


Now faith is the assurance of things hoped for, the conviction of things not seen -Hebrews 11:1


:
Posted by pleasing2jc
2016. 11. 28. 04:58

추수감사절 카테고리 없음2016. 11. 28. 04:58

 

(1) 온갖 자극적 소식들을 다 팔로우하느라, 피로감이 훨씬 커졌는데, 어떤 프로그램에서 그 사건의 핵심은 약품사용이나 드라마가 문제가 아니라 국가권력의 사유화라고 짚어줘서 좋았다. 그래서 자잘한 뉴스들은 스킵하기로 했다. 현지 시간 11.26 저녁, 이곳은 한밤중이었는데, 방송을 켜놓고 자다깨다 하며 봤다. 멋진 사람들이다. 그런 훌륭한 국민들을 잘 섬길 수 있는 사람들과 시스템이 확립되면 좋겠다는 기도를 절로 하게된다. 

 

(2) 어제 사촌 중 한명이 SNS 에 자신의 아버지, 즉 나의 고모부 사진을 올리며 "민주화 운동 선수(?)"셨다고 자랑(ㅋ) 했다. 그걸 보니 기억났다. 어린 시절 어렴풋이 들었던 얘기: 고모부는 한 신문사 기자를 하시다가 80 년대 초반 민주화 운동으로 해직당하셨었다. 그랬었지... 해직당하신 후 어려움을 겪으셨다는 얘길 들은 기억도 이제야 난다. 그 분은 전라도 출신이시다. 어디 출신이라는게 나 개인에겐 크게 중요하진 않지만 특정한 한 잣대로 볼 때는 특이할 거다. 경상도 출신 친가에 전라도 출신, 그것도 민주화 운동을 한 사위가 있었다는게.

 

(3) 돌아보면 친가 (또한 외가도) 경상도 출신이시지만 정치색은 그다지 짙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 몇 년동안, 들쑥날쑥했던 한가지 정책 탓으로 특정 정치인을 참 싫어하시긴 했다. 그 전까지는 부모님께서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에 관한 말씀을 안 하셨었다. 외가에도 전라도 출신 이모부가 한 분 계셨다.  그 분 또한 정치성향이 뚜렷하셨다고 들었지만, 어른들이 정치에 대한 대화/논쟁을 하시거나 뒷담화를 하시는걸 들어본 기억이 없다. (어린 아이들은 어른들의 대화를 안 듣는척 해도 다 듣고 거의 다 이해한다. 그렇게 엿듣던 이야기들이 재미있었다 ㅎㅎ)  

 

어쩄거나:

 

(3) 그런 가족 분위기 탓인지 어떤지, 격동의 역사 흐름이나 정치 변화 속에서도 sheltered 되어서 큰 관심없이 지냈다. 가족 분위기 탓도 있었겠지만,  십대이후 미국에서 쭉 살아왔다는 이유와 정치혐오, 신앙 등의 다른 이유들도 있다. 

 

(4) 20 대 중반까지도 내 뿌리(?)가 경상도라는 걸 그다지 의식 못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십대 미국에 오기 전까지 서울에 살았다. 아버지 근무지가 P 시였던 내 생애 첫 4-5 년만 빼곤 말이다. 아버지께선 고등학교부터 서울에 사셨고 어머니는 대학 시절부터 서울에 사셨다.  나의 초중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의 집안이 어느 지방 출신인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미국에 와서 만난 한국친구들도 마찬가지다.  남편을 만나고 남편집안이 전라도 출신이라는 걸 알았으나 내겐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 부모님께서도 사윗감을 보시고 정말 많이 기뻐하셨다. 미국에서, 정치적 이유가 아닌 종교적 이유로 운동권 학생처럼 하고서 염려가 되던 딸이 멀쩡해 보이는 남자를 데려왔으니 말이다. 나중에 남편의 정치적 (또 종교적인 것도) 성향에 관한 글들을 읽으실 때는, 아주 조금 불편해 하시긴 하셨다. 아님  진짜 민주화 투사 매부에 비하면 가소롭다고 (ㅋ) 여기셨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께서 나보고 외국인 결혼하지 말라는 말씀은 하셨어도 특정지방출신을 피하라는 말씀은 하신 적이 없었다.

 

(5) 내가 경상도 집안 신이라는 걸, 피부로 느낀 건 결혼하고 나서였다. 아이 아빠가 2000 년대 초반, 한 잡지에 기고한 짧은 에서 나를 "골수 경상도 출신"이라고 지칭한게 생경했지만, 뭐 그러려니 지나갔다. 남편 글의 요지는 출신지역, 인종 등에 상관없이 편견을 가지지 말자 라는 거였다. 그런데 지난 20 정치성향 뚜렷한 남편과 살면서 정치와 지역성의 깊은 연관관계를 무시할 수 없음을 배웠다. 치에 무관심하기에 남편의 정치 성향에도 별로 관심없긴 했지만, 남편의 에서 특정 정당을 특정 지방이 지지한다고 하면 괜한 자격지심을 느꼈다.  타지역인의 경상도인에 대한 편견을 배운 것도 결혼 후였다. 가끔 한국을 방문할 때 뵙는 먼 친척 어른들의 말씀을 통해서.  "경상도 사람들은 교양이 없는데 교육으로 그걸 커버한다," "영화 <친구>에 나오는 경상도 사투리가 너무 심해서 보는 내내 머리가 아팠다," "경상도는 남존여비 사상이 심하다" "경상도 남자들은 무뚝뚝한데 너네 아버지도 그러시니?" 등등. 처음 한참 민감하던 결혼초기엔 "(유일한 경상도 집안 출신인) 나 들으라고 일부러 하는 말인가?" 상처를 받았지만 나중에는 무시했다. 한편, TV 를 보다가 "화려한 휴가"같은 영화가 방영되기라도 하면 혼자 괜한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

 

(6) 도 마찬가지다. 이 국에 집안이상도 출신이라는 왜 이렇게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 한국상황은 지역성이나 지역감정으로 인한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경상도의 지지를 받은 경상도 출신 정치인들이 저지른 국정농단을 지켜보면서, 어떤 연대의식을 가지고 회개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바다 건너 멀리에서, 그 세대외 지역에 온전히 속하지도 않는 사람의 회개가 무슨 소용이겠냐마는. 

집안에 민주화 투쟁하신 고모부 같은 분이 계시고, 서로 다른 지역 출신들임에도 불구하고 조화롭게 사셨던 가족이 있었음을 위안 삼아야 하는지. 

 

(7) 바다건너에 있지만서도 고 2 국사 이후, 25 년간 제대로 접할 기회가 없었던 한국사를 다시 돌아보는 지난 며칠을 보냈다. 어느 정도 상식은 가져야 할 듯 해서다. 

 

(8) 고딩을 떠올려보니 학생들은 이미 부조리한 현실에 눈을 떴었다.  여러가지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다 나열하긴 그렇고 (위장전입같은거야 그 시절부터 흔했고)... 고 2  미국오기 직전 (90년대 초), 전교임원회의에서 전교회장 선거가 있었다. 준재벌 집안 아들을 회장으로 밀어주자는 선생님들의 농담같은 유혹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합심해서 더 자격이 있는 다른 친구를 회장으로 뽑았다. 미국오기 직전 경험은 사회 부조리의 빙산의 일각이긴 했어도작은 학생저항?의 승리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긴 하다. 

 

(9) 추수감사절 휴일 후 내일 당장 일상에 돌아가면, 나는 내가 서울출신인지 경상도 출신인지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갈 거다. 지난 며칠 집에 머물며 모든 관심은 한국에 쏠려있었으나, 내일부터는 다시 이 땅 베이에어리어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가 더 큰 이슈다- 한국보다 훨씬 더 다양한 nationality, ethnicity, religion, culture 등,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과 조화롭게 살아가야 하는가가 더 큰 관심이다. 한국 또 동양계 일인으로도 그리해야하지만, 영원한 citizenship holder 로서 말이다 (빌 3:20).  

 

(10) 그러나 그 땅의 참 멋진 국민들이 이뤄내고 있는 역사의 한 장. 진심으로 "존경하는 민들"은 내게 평생 기억되는 자랑거리가 될거다. 또한 앞으로도 계속될 역사의 한장 한장을 멀리서나마 함께 살아갈 때, 닮고 싶은 모습으로 두고두고 기억될 그들이다. 감사드린다.

 

:
Posted by pleasing2jc
2016. 11. 22. 13:30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카테고리 없음2016. 11. 22. 13:30


1993 년도 즈음, 대학교 기숙사에서 친구들과 옹기종기 모여앉아 봤던 영화. 


어느 곳에나  있을 수 있는 일그러진 영웅들. 소설을 찾아 읽어본다.


픽션이지만, 학교, 교회, 사회. 조직, 어떤 모임에서든 엄석대와 한병태의 학급과 비슷한 면들을 찾을 수 있어 쉽게 몰입할 수 있다. 소설 결말에도 사회의 모습을 꼬집지만.


비밀독서단에서 토론하는 대로,

그 엄석대 (일그러진 영웅)를 또 다른 엄석대가 replace 하기도 하고.

우리 안에 내재한 엄석대의 모습.

변화는 아래에서부터 올라와야 한다는데 그렇게 아래로부터 올라온 변화의 물결을 자신의 권력과 위치 강화에 전혀 이용하지 않고 잘 수렴할 수 있는 이들이 과연 있을 수 있는가 궁금해진다  그 유혹에서 백프로 자유로울 수 있는 이가 있을까? (정치계 인물들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저 일반적 이야기일뿐)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하나,[각주:1]

Ultimate 영웅은 '아래'에 머무르셨고 그 아래에서 스러져가셨다는 것. (세상적 시각으로 볼 때)











위 영상에는 편집되어 안 나오는, 그 전 부분에 인용된 단락. 영웅되기를 격려?받고 꿈꾸던 세대?가 떠오른다. :


나는 먼저 그날 내가 겪고 본 엄석대의 짓거리를 얘기한 뒤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아버지에게 물으려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겨우 엄석대가 그날 한 일들을 모두 얘기한 내가 막 충고를 바라는 물음을 던지려는 아버지가 불쑥 감탄 섞어 말했다.     

「거, 참 대단한 아이로구나. 엄석대라고 그랬지?  벌써 그만하다면 나중에 인물이 돼도 큰 인물이 되겠다.」

  도무지 불의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은 소리였다.  

후끈 단 나는합리적으로 선거되고 우리의 자유를 제한한 적이 없던 서울의 급장 제도를 얘기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버지에게는 그 합리와 자유에 대한 내 애착이 나약의 표지로만 이해되는 것 같았다.

  「약해 빠진  놈. 너는 왜 언제난 걔를 뺀 나머지 아이들 가운데만 있으려고 해?  어째서 너 자신은 급장이 될 수 없다고 믿어?  만약 네가 급장이 되었다고 생각해봐.  그보다 더 멋진 급장 노릇이 어디 있겠어?」







  1.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은 긍정적 표현 으로 많이 쓰이는듯 한데, 데 이 해석도 일리가 있는듯 하다 --- 난세에 영웅이 난다’[亂世英雄]는 말은 평화로왔다면 나타나지 않았을 인재(人才)가 혼란기에는 두각을 드러낸다는 뜻이 아니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다수의 민중들은 좀 폭력적이고 비윤리적으로 정치를 하더라도 세상을 안정시킬 독재자를 지지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허소(許劭)는 조조에게 세상이 평화로운 시기에는 범죄자[奸賊]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조용히 초야에 묻혀 지낼거라 하지 않았다. 난세영웅이 권력을 얻으면, 그 비윤리에 맞서는 소수의 충의지사들 또한 영웅이 된다. 촉나라 영웅들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결국 난세가 이래저래 영웅을 대량생산 하는 것이다. http://playin.innori.com/5811 [본문으로]
:
Posted by pleasing2jc
2016. 10. 22. 13:10

정의와 신뢰와 기도 카테고리 없음2016. 10. 22. 13:10

The Locust Effect (by Gary Haugen)   책 앞쪽에 보면 human trafficking 등이 공공연히 이뤄지는 나라들의 정의가 얼마나 타락해 있는가 이야기한다. 그런 나라들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맘이 너무 많이 힘들어진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는 게 힘들어 진도가 무척 느리게 나가고 있다.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히 생각하는 법의 보호가 부재된 곳에서 일어나는 불의하고 잔인한 일들... 가슴이 찢어지는 일들이다. 


물론 미국이나 선진국도  예외는 아니다. 올해 일어났던 S 모 명문대의 수영선수 성범죄 사건을 둘러싼 논란 등등.


하지만 문 밖을 나서기만 해도, 아니 집에 있어도 맘 놓고 살 수 없는 불의가 공공연히 이뤄지는 끔찍한 나라들이 있다. 그리고 공권력조차도 그 불의를 덮어버리는 악이 되어버리는 그런 나라들 (The Locust Effect 에 나온 나라들..)


그런 곳에 산다면 당연히 타인과 국가기관/사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수 밖에 없다. 또 적개감, 혐오, cynicism (냉소) 등이 몸에 밴 일부 사람들도 있을테고. 


그런데, 만약 그렇게 불의한 곳에서 태어나서 계속 살았기에 타인과 국가 등을 신뢰 못 하는 이들을 조금이라도 더 정의로운 나라에 옮겨 놓는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게 옮겨진 이들이 곧바로 타인과 국가를 신뢰하며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

잘 모르지만 몸에 배어있는 불신의 자세를 곧바로 버리긴 어려울 거다. 


한 사회의 가해자의 몸에 밴 악함은 큰 문제다. 

예를 들면, 힘없는 자를 착취하고 권리를 남용하면서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조금의 죄책감도 못 느끼고 심지어 그것이 나라와 사회를 위하는 등의 선한 목적 때문이었다고 굳게 믿는등의...

그와 더불어 불의한 사회에서 산 피해자들의 몸에 밴 습성도 풀어나가야 하는 큰 과제이고 치유되어야 하는 상처다.


약에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세상이 열려도 

여전히 서로 불신하고 주어진 자유와 권리를 충분히 못 누리고 겁쟁이처럼 항상 경계하며 살지도 모른다. 적개감, 혐오, 냉소 등의 자세도 쉽게 버리기 힘들 거고. "상처"가 치유되고 기억이 "성화"되는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혼란한 "세계 곳곳" - .지금 무너진 세상 속에서 무너진 관계들의 양상이 "세계 곳곳"에 사는 많은 이들의 몸에 밸까봐 염려가 된다.

(최근 "그곳"에서 온 몇몇을 접하며 든 생각이다. 그리고 이 시대와 이 땅을 살아가는 그 누구도 예외는 없다 - 스스로를 포함해서. ) 


.

.

.

.

.

.


은 framework를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구도로 옮겨보자면: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Already 의 하나님 나라) 그 나라의 자유와 권리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1) 외부적 요인:  Already 이지만  not yet 의 하나님 나라. 아직 이 세상에 그 세력을 발휘하는 공중의 권세잡은 자가 있기 때문이고 --- 이 세상의 한계와 악함으로 인해 자유와 권리를 못 누림. 

(2) 내면적 요인: Already but not yet 상황에서도 그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충만한 권리와 자유가 있음에도, old self/life/world 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불신하고 (믿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이유도 있을 듯 하다. 믿지 못하기에 스스로를 제한하는.... 물론 new life 의 의무 또한  있겠지만 그 의무란  (예수님에의 전인격적 ) 믿음과 신뢰 성격이 크다.


결론은, 뭐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2000 년 전이나, 50 년 전 이나, 어제나 오늘이나 혼란한 세상에도 불구하고,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그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이 세상의 습성을 버리고 그를 신뢰하며  하나님 나라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며 사랑하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임한다는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며 그의 아들딸 답게 살아가는 것.  


믿음과 신뢰의 문제다.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가?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보고 그 안에 속해있다는 걸 알고 있는가? 그의 사랑을 알고 신뢰하고 있는가?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 백성의 습성/가치/삶의 방식의 차이를 알고  하나님 나라의 것들의 비교할 수 없는 우월함을 믿는가?  그를 의지하고 신뢰하며 그렇게 살고 있는가? 온전히 이뤄질 그의 나라의 소망믿는가? 

.

.

.

.

.

The Locust effect 에 나온 거 같이 터무니 없는 불의가 행해지는 곳에도 하나님의 나라와 정의가 임하길 기도한다.

그 기도 또한 그를 믿고 신뢰하는 자녀의 자유와 권리이며 의무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목숨걸고 싸우는 이들 (몇 달 전 살해된 채 발견되었던 케냐 변호사 같은 이들) 을 위해서 기도한다...


------------


이런 글들은 보통, 세상/자신에게 실망하거나 discourage 된 조금 힘빠지는 하루를 보내고, 참된 좌표 안에 속한 스스로를 확인하고 스스로를 encourage  하기 위한 외침의 기도와도 같다. 또한 무엇이 중요한가 다시 확인하는 기도. 시선을 세상과 나에게서 돌려 그와 그의 나라를 바라보기 위한 기도. 내가 겪고 있는 것과는 비교도 안되는 아픔과 고통을 겪고 있는 세계 곳곳의 이웃들과 연대하는 한 방법.

:
Posted by pleasing2jc
2016. 10. 2. 00:21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음식 카테고리 없음2016. 10. 2. 00:21

누군가가 내게 좋아하는 음식을 물어본다면 금방 대답하기가 어렵다. 


꼭 먹어야 한다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잘 먹을 수 있다.

좋아하는 음식이 정해져있다기보다 새롭고 다양한 음식을 즐기는 편이다. 

가끔 crave 하는 음식 중에 갈비, 라면, 떡볶이, 각종 디저트 등을 포함한 고탄수화물/고지방 음식들이 있지만,

건강에 안 좋을 수 있기에 가능한 피하려 한다는 정도로 대답할 수 있을까?  


아... 물론 음식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며 사는 편도 아니다. 날이 갈수록 하루 세끼 꼭 먹는게 귀챦아지기도 한다. 

배가 고프면 힘이 빠지고 신경질/짜증이 늘기에 먹을 때가 더 많고... 

새로운 레스토랑을 try 해보는것도 맛있는 음식을 맛보려 가는것보다는 경험의 차원에서 간다.

(에니어그램으로 따지면 장형은 확실히 아니다)


어쨌거나 좋아하는 음식은 딱 꼽기 곤란하지만, 

싫어하는 음식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수 있다: 속빈 강정 & 빛좋은 개살구


흠.. 그런데 그것도 그것들 자체를 음식 혹은 과일로서 싫어한다기보다 

그것이 상징하는 것들이 싫기 떄문이라고 볼 수 있지... 허영, 허세, 겉멋,  속은 부실하면서 번쩍번쩍한 외관, 허례허식..


나이가 들어가면서,

(음식에의) 식탐이 강해지기보다는 -- (신진대사도 느려지는데)

속이 꽉찬 것들을 알아보는 눈을 더 가질 수 있음 좋겠고 그렇게 영글어갈 수 있음 좋겠다.


:
Posted by pleasing2jc
2016. 9. 22. 11:56

화양연화를 통한 단상과 습작 카테고리 없음2016. 9. 22. 11:56


바쁜 한 주를 매듭짓고 방전되어서 몸을 조금도 움직이는게 싫었던 지난 토요일 오후. 한국어와 영어의 세계에의 권태를 느끼던 차, 다른 언어로 표현되는 정서와 사고는 어떨까 싶어,  한 기사에서 21 세기 best movies 중 하나로 뽑힌  <화양연화>를  찾아봤다. 중국어든 광동어든 전혀 모르기에 영어 자막의 도움을 빌려서 봤고 한국어로 감상문을 쓰고 있으니 언어영역에서의 완전한 일탈은 아니.

왕가위 감독,  양조위&장만옥 주연. 2000 (2001?) 년도 영화. 16 년전이니 "옛날" 영화다.  그 당시 20 대 중후반에 이 영화를 봤다면 중간에 꺼버렸을 것이다. 40 대 중반이 된 지금도 공감할 수 없을 뿐더러, 억지로 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두 주인공의 애정구도가 낯선 것이라서 따라가기 힘들었다. 소위 플라토닉 러브고는 하지만 불륜이다. 종교적 시각에서 이 영화를 평가하며, "죄" 같은 단어로 무식하게 매도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저, 종교/도덕과는 상관없이 에로스적 사랑을 허상이라 여기기에 감정이입이 안된다. 그런데 왜 공감도 되지 않는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데 시간을 할애하며 주저리 주저리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냥 볼만한 영화였네 하면서 지나가면 될텐데, 영화 한 편 본 경험을 왜 이리 분석하고 있는지?  통찰이나 배움을 준 영화도 아닌데 말이다.  

스토리라인과 상관없이 영화예술의 힘을 새삼 느꼈다고 해야하나? 소심한 사람들의 허락되지 않은 청승맞은 사랑 이야기를  아름답게 그려내었다는 것. 그런 이웃들이 옆집에 있었다면 추하다고 느꼈을텐데, 주인공들의 (양조위보다는 장만옥의) 빼어난 외모와 연기, 영상미, 배경음악으로 인해서 몰입해서 볼 수 있었던 거 같다. 애틋해야 할 연애감정에는 설득이 안되었지만,  영화 전반에 스며들어있는 상실감, 외로움, 갈망 등이 부각되어 보였다. 그런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거나 되새김질하는건  21 세가 Bay Area 에선 보기 어려운 일이다. 이곳은 entrepreneurship, 첨단기술, 효율, 생산성, 스피드 등등이 키워드인 곳이니까. 그런데도 이리 집중해서 볼 수 있었던 건, 그것들을 아름답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화끈한 결론도 없이 답답한 이야기를 심미안적, 감각적으 그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밑의) 유튜브 편집 영상이나 음악도 다시 찾게 만든다[각주:1].  

영화의 인상적 장면들을 그림 감상하듯 되돌려보다보니, 문득 ㄱㅎ 님의 문장이 생각난다. 빼어난 문장력으로 유명한 그 분의 책을 두 권 가지고 있긴 한데 아직 안 읽었다. 아니, 못 읽었다. 그의 문장 열 개도 채 안 읽은 사람이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거 자체가 황송한 일이지만, 그저 개인의 취향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문장은  도무지 머리에 입력이 안된다.  책의 첫문장을 가지고 몇 분 동안 낑낑거리다가 포기했다.  그 분은 그 문장을 쓰시느라 하루 온종일을 보내셨을지도 모르지만... 잡초 하나하나까지도 섬세하게 묘사하고 느끼는 그 정서를 이해하기 힘들다. 그의 문장 하나와 씨름하다 지쳐 떨어져서, 무례한 감상평을 쏟아내는 내면의 소리를 가까스로 억누르고 스스로의 메마른 정서를 탓했다. 그런데... 그의 문장을 칭송하는 다른 책에  인용된 "된장과 인간은 치정관계에 있다," 를 읽고는 심히 당황했다. 된장은 (우리에게 친숙한) 된장일 뿐이지 치정관계는 또 뭐란 말인가? 고정관념을 와장창 깨버린 상상력과 표현력에 큰 점수를 드리지만, 그 문장을 극찬까진 못하겠다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일 뿐이다). 언젠가 책을 소개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 한 출연진이  ㄱㅎ 작가와 유사한 문장에 대해서 공감안된다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걸 보고  나만 그런게 아니구나 안도한 적이 있다. 

그런데 영화 <화양연화>의 표현력 깊은 인상을 받고 보니, 그렇게 문장에 집중하는 마인드세트도 대충 이해가 될 듯은 하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렇지만서도 문장과 표현력보다는 알맹이?- 서사와 세계관 철학[각주:2] 을 더 중요시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글을 쓰는데 필요 이상으로 많은 시간을 썼다. Bullet point 몇 개로 끝날 감상평을 이리 길게 쓴 건위에 나열한 색다른 세계를 미숙하게나마 체험해보고자 하는 의도가 반영된 탓도 있다.  주제와 상관없이 짜임새있는 글을 써 보는건 뜨개질이나 모형조립을 하는것처럼 그 작업자체만으로도 성취감을 주고 기분전환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글이나 예술의 세계는 간접경험을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온전한 내 것으로 만들 수 없을 듯 하다. 낯선 것들을 경험케 해주는 예술작품과 예술가분들은 정말 많이 appreciate 한다. 하지만  어떤 일탈을 하고 싶어질때면, 예술작품을 즐기는 것도 도움이 되겠지만, 지금 이 시기에는  dental spanish/chinese 공부 등을 더 이상 루지 말고 시작하는게  더 좋을 듯 싶다[각주:3].  할 일 많다. 지금은  내가  속해 있는 현재 나의 세계에 충실한 것이 [각주:4] 가장 건강하다는 걸 알아야 하는 불혹+ 다 ---  런 불혹 사십대 의 중 2 병 걸린 듯한 글을 초딩 그림일기적 다짐으로 마무리한다. 




  1. 흠 그런데 유튜브 영상을 오늘 다시 보니 답답하다.... 헉... [본문으로]
  2. 소설가 황석영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본문으로]
  3. 마침, 스페니쉬를 하는 한 분이 내게 dental spanish 를 가르쳐주시곘다고 하시기도 했다. [본문으로]
  4. 예술을 한다면 예술에 충실했을테고... [본문으로]
:
Posted by pleasing2j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