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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r Journey Together 전체 보기'에 해당되는 글 307

  1. 2017.09.11 진정한 중보
  2. 2017.08.26 소비와 투자 등등...
  3. 2017.08.18 encounter with God 본문순서
  4. 2017.08.08 already but not yet 유감
  5. 2017.08.03 그랜드 캐년 여행사
  6. 2017.08.01 Thirst, Living water, Holy Spirit
  7. 2017.07.25 Culture maps
  8. 2017.07.14 엉뚱한 묵상(?)
  9. 2017.07.07 forgiveness
  10. 2017.06.23 위대한 믿음의 조상? 위대한 하나님?
2017. 9. 11. 13:33

진정한 중보 카테고리 없음2017. 9. 11. 13:33

호떡집에 난 불이 아니다.

아니, 호떡집 불 구경도 안되지.


사건, 사고를 대할 때 호떡집 불 구경하듯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기도를 한다고 하지만, 진정한 중보기도를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자극적인 사건사고를 무의식중에 조금이라도 은근히 즐기는 죄성,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들을 감성으로 포장된 사진으로 찍는 빈곤 포르노라는 말도 있듯) 

중보기도를 하면서도 자신의 선함과 의를 의식하는 자기 중심성 또 죄성이 있다.

강건너 호떡집 사건을 자신에 관한 사건으로 해석하는 자기 중심성도 있다.

또는 강건너 호떡집 사건은 내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안도하는 이기적 자기 중심성 또한 있다. 


고통받고 아파하고 힘든 이들을 향한 진정한 중보자의 자비.

예수님을 구할 뿐이다.


지구상의 온갖 재해를 다룬 신문기사등을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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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
2017. 8. 26. 15:11

소비와 투자 등등... 카테고리 없음2017. 8. 26. 15:11

- 돈이 생기면 충청도 사람은 옷을 사 입고, 경상도 사람은 집을 고치고, 전라도 사람은 음식을 해 먹는다는 말을 어디선가 읽었다.  처음 듣는 얘기라서 흥미로웠다. 물론 어느 지역 사람들이 다 그렇다고  Stereotype 할 수는 없겠지만서도, 시대/지역/세대 별로 소비패턴 등의 트렌드는 분명 있는 듯도 하다. 

- 최근, 한국의 소비 유행과 미국의 소비 트렌드에 관한 기사를 몇 개 접했다.

- 불황 속에 '작은 사치'가 유행이라는 한국. 예를 들면 집이나 차같은 큰 품목에서 사치를 못 하니,  커피나 음식, 립스틱 등 비교적 비용이 적게 드는 품목에서 '사치'를 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단다. 수억원대 혹은 수천만원대 집&차 비해 훨씬 작은 사치인 몇 만원짜리 식사를 하거나 고급커피를 마시며 그 순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소비형태라고.

- 또 다른 기사는: 미국의 부유층 혹은 엘리트 중심으로 inconspicuous consumption 의 트렌드가 생기고 있단다.  시계, 가방, 차, 명품 등의 눈에 보이는 품목에의 소비가 아니라, 교육이나 건강, 문화생활, 은퇴 설계 등에 소비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고.  또 빌게이츠 부부처럼 자선사업에 집중하는 것도 inconspicuous consumerism 의 한 형태라고. (이런 경향은  한국의 일부 계층에도 물론 있겠지...) 

- 그 기사를 읽으면서 교육이나 은퇴 설계 등을 '소비'라고 보는게 흥미로웠다. 교육은 투자라고 말을 훨씬 더 많이 들어왔는데 말이다.  부동산, 주식 투자 등등과 더불어 교육도 투자의 한 형태로 꼽히기도 하니까. 그런데 소비의 면이 있다는 것이 새롭다. 

- 자선사업이나 기부 등도 소비가 될 수 있다는 것. 단기선교나 justice 사업 등도 consumerism 에 입각한 활동이 될 수 있다고 반성하는 걸 어떤 책에서 읽기도 헀다. 

- 소비와 투자, 기부나 헌금, 봉사, 등 다방면에 대해서 돌아본게 된다.

- Matthew 6:19-21 의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케 되고. 그 treasure 이 물질적인 걸 의미하는가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겠지만..... 지금은 너무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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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7 Sun

- 어제 하루종일 일하고 집에 와서 자기 전 위와 같이 끄적거렸었는데, 오늘 주일 설교가 investment 에 관한 거였다. 물질적인 것 뿐만 아니라 에너지, 시간, mind 기타 등등 모든 것을 포함한. (아무래도 이 지역의, 투자에 대한 관심이 무척 크기도 하다.)

빌립보서 3:8-10 이 key verse 였음.  

무엇에 투자하는가 보다 '누구'에 투자하는가? 라는 질문.

Philippians 3:8-10English Standard Version (ESV)  Indeed, I count everything as loss because of the surpassing worth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For his sake I have suffered the loss of all things and count them as rubbish, in order that I may gain Christ and be found in him, not having a righteousness of my own that comes from the law, but that which comes through faith in Christ, the righteousness from God that depends on faith— 10 that I may know him and the power of his resurrection, and may share his sufferings, becoming like him in his de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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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
2017. 8. 18. 00:56

encounter with God 본문순서 카테고리 없음2017. 8. 18. 00:56

Scripture Union 의 Encounter with God 의 본문순서가 흥미롭다. 매일 잠깐씩 읽는 수준이다. 

지난 몇 달간 창세기와 사도행전을 번갈아가며 커버했다.

창세기 도중, 사도행전 스데반 설교 본문이 샌드위치되어서 다시 창세기로 돌아갔다가 갑자기 스데반이 핍박받아 순교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헀다. 그러다가 창세기 37 장까지 하고, 사도행전 9- 12 을 한 다음 오늘부터는 에베소서다. 주일에는 시편이고. 신구약을 오가며 성경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어 좋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 또 이어진 이삭, 야곱, 요셉 등을 통해 언약백성, 언약자손 등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스데반의 설교와 베드로가 본  환상에 대해서 읽었다. 베드로가 본 환상은 보자기에 싸여진 부정한 짐승들을 잡아먹으라고 하시는 것. 


그 본문들을 통해서, 구약 언약백성이어야 하는 유대인에 의해서 죽임당한 예수님에 의해서 fulfill 된  새 언약을 묵상했다.

개인적으로 새로운 개념은 아니지만 창세기와 사도행전을 함께 나열해서 보는 것이 새로웠다.


오늘은  갑자기 에베소서 시작이다.

지금까지의 묵상의 흐름에 부합하는 오늘 에베소서 본문의 구절은 에베소서 1:11-13 이 아닌가 싶다.

"In him we were also chosen, .... marked in him with a seal, the promised Holy Spirit who is a deposit guaranteeing our inheritance..."

11 In him we were also chosen, having been predestined according to the plan of him who works out everything in conformity with the purpose of his will, 12 in order that we, who were the first to put our hope in Christ, might be for the praise of his glory. 13 And you also were included in Christ when you heard the message of truth, the gospel of your salvation. When you believed, you were marked in him with a seal, the promised Holy Spirit, 14 who is a deposit guaranteeing our inheritance until the redemption of those who are God’s possession—to the praise of his gl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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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
2017. 8. 8. 14:38

already but not yet 유감 카테고리 없음2017. 8. 8. 14:38

신학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는 concept 혹은 phrase, 'already but not yet' 에 괜히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다.

왜 Not yet 라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한 마무리를 했냐는 거다.


Not yet but already 도 아니고, 

Already however not yet 도 아니고,

왜 하필이면 already BUT NOT yet 인지?


Not yet 의 현실이 너무 길게 느껴진다.


뉴스, 세상, 인간역사,...


한 시대를 찬란하게 장식했던 제국의 유물이 전시된 박물관에 가도,

새파랗게 젊은 청년들이 목숨을 잃은 전쟁 역사 영화를 봐도

느껴지는 역사의 피로감과 허무함, 잔인함.


시리아난민들과 아프리카 가뭄 기타, 국제적 상황 등등...


종교 개혁 500 주년 기념이라는데 여전히 미완성이라는 종교개혁,


미래학 강의를 들어도 답답하기만 하다.

흥망성쇠의 역사는 수천년간 반복되어 왔는데 뭘 또 진보시키려 하는지...


Not yet... not yet... not yet...not yet..

앞으로 또 다른 이천년이 될지, 수만년이 될지?


괜스레, already but not yet 탓을 하며,

내 맘대로 위 phrase 를 바꿔본다. 그저 혼자 그렇게 되새기며, 비관주의에 빠지려하는 스스로의 시각을 좀 바꿔보고자.  

already but not yet, soon and forever?

already but not yet, BUT already, soon and forever?


(soon 이라고 해서 이단적인 soon 이 아니라 요한계시록 22: 20 에서의 soon ..)


신학적으로 올바른 구조를 가지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지만,

좀 더 온전한 큰 그림의 phrase 를 가지고 싶다.


하지만서도,

not yet 속에서  not yet 를 fully embrace 하고 groan 하고 lament 하는 것 또한 진정한 소망에 다다르는 길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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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
2017. 8. 3. 13:32

그랜드 캐년 여행사 카테고리 없음2017. 8. 3. 13:32

https://www.grandcanyonwest.com/ 에서 퍼옴




그랜드 캐년에 간 여행자들이 있었다.


그랜드 캐년을 제대로 보고 경험하고 배우고 싶어서,

그곳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여행사의 가이드들을 고용하기로 했다.


그 유명한 장관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그랜드 캐년 입구에 도착했다.

몇 년에 한 번 하는 소중한 여행이다.


여행사의 가이드들은 무척 숙련되어 보였다.

그랜드 캐년 가이드를 해 온지 수십년도 넘는다면서.

부르튼 손과 거친 발도 보여주고 무용담도 나누고 사진들도 보여주고...


여행자들은 무척 기뻐한다

그랜드 캐년을 제대로 경험해 볼 수 있겠다면서.

가이드들을 고용하길 잘했다고.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여행사 가이드들이 자신들의 여행사 역사를 장황하게 나눈다.

자신들의 여행 가이드 철학도 나눈다.

그러다가 갑자기 ceremony 를 하기 시작했다.  

가이드들 중 한 명이 그 일을 한지 20 년이 되었다고 그걸 기념해야 한다면서 기념패를 주고받고,

여행자들은 그 ceremony 를 지켜보며 박수를 쳐야 했다.


그랜드 캐년은요? 그랜드 캐년은 언제 보냐고요?


지루한 ceremony 가 끝난 후 드디어 하이킹을 시작하자,

가이드들은 어떤 trail 을 타야 한다는 걸로 다툰다. 자신에게 익숙한 trail 을 가자고 하는 이, 새로운 trail 을 개척해야 한다는 이.

또 다른 이슈들로도 다투기 시작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방법이 옳다면서. 

그러다가 갑자기 한 가이드가 외친다, "내가 그랜드 캐년의 산신령과 가장 가깝다. 나는 그를 잘 안다. 내 말을 들어야 한다!" 흠...

그러니까 또 다른 가이드가 소리친다. 자신이 그 산신령과 가장 가깝다고.

가이드 모두가 자신이 그렇다고 하며 웅성웅성대며, 여행은 뒤죽박죽 엉망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랜드 캐년을 제대로 구경할 수 있는 once in a lifetime opportunity 였는데... 

그랜드 캐년을 온전히 경험하기보다는,

그랜드 캐년 여행사의 악몽만을 안고 돌아왔다.


다음에는 다른 여행사를 이용하거나,

따로 리서치해서 self-guided tour 를 하든지 해야겠다. 



- 몇 년 전, 아이가 학교에서 참여했었던 연극 <캔터빌의 유령> (한 영국저택에서, 영국유령들과 그 저택으로 새로 이사온 미국인 가족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을 보면서, 위와 같은 satire 를 잠시 떠올렸었다.  그런데 어디서 들은 얘긴지 내가 생각해 낸 얘긴지 모르겠다. 뭘 풍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 그랜드 캐년이 보고 싶다. 아니, 그랜드 캐년이 꼭 아니더라도 자연 장관에 푹 잠기고 싶다....

:
Posted by pleasing2jc
2017. 8. 1. 16:10

Thirst, Living water, Holy Spirit 카테고리 없음2017. 8. 1. 16:10

최근 한 conference 에서 한 NT wright 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성령님에 관한 conference 였던 듯.

아... conference 에 간 건 아니고, 녹음된 설교들을 예약구입했었다.


요한복음 7 장, 19, 20 장 등을 다음과 같이 본 것이 기억에 남는다. (대충 기억나는 대로 써보자면)


요한복음 7:37-39 에 관해서

Jesus doesn't say, "Anyone who's thirsty, come to me. I will quench your thirst."

What Jesus meant was: When anyone who is thirsty comes to Jesus and drinks Him(?), out of THAT (thirsty) person's heart will flow the rivers of living water. 


그리고 요한복음 7 장과 요한복음 20 장을 연결시킨다.


요한복음 19:28 에서 십자가에 목박히신 예수님 본인께서 "I am thirsty" 라고 하시고.

The Cruxifiction 은  예수님께서 glorified 되는 시점 (John 7:39) 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20 장의 부활: New Creation 의 시작!!!



목마름을 생각할 때 개인의 목마름만을 생각하고 그것이 quench  되기만을 원할 게 아니라,

목마른 이들로 하여금 Rivers of Living water 의 채널이 되게 하심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living water 은 성령님이시고.



목마름...


=

:
Posted by pleasing2jc
2017. 7. 25. 13:57

Culture maps 카테고리 없음2017. 7. 25. 13:57

각나라의 leadership cultures map 은 다음과 같은 모양이 나온단다. 


hierarchical culture 이라고 리더만의 의견에 따라서 decision making 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일본의 경우처럼 위계질서가 강하더라도 공통의 의견에 따라서 decision making 이 되기도 한단다.

또 미국의 경우처럼 egalitarian 이더라도 공통의 의견보다는 리더의 의견에 따라서 decision making 이 되는 문화이기도 하고.

기사는 미국에서 일하는 한국사람의 예를 든다.






communicating, evaluating, persuading, leading, deciding, trusting, disagreeing, scheduling 등에도 각 문화에 따라 다른 culture map 을 만든 기사도 있다. 

http://www.businessinsider.com/the-culture-map-8-scales-for-work-2015-1



각국 출신 사람들과 함께 일할 때, 참고가 된다. 



이건 내 생각...
미국같은 경우 (내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서 볼 때..): 일부 hierarchical culture의 상하관계 속에서는 리더가 리더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의견에 무조건 '순종'한다. 그러나 미국과 같은  egalitarian culture 속에서는 모두 동등하지만, 맡고 있는 역할이 다를 뿐인데 (리더는 리더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고.) 리더의 전문성과 지식, 경험 등을  존중하기 때문에 그 리더의 의견을 따르는 것 아닌가 싶다. 그렇기에 리더의 의견이나 제안이 이해 안 될 경우, 질문해도 되고 나의 의견을 피력해도 된다. 그래도 그것이 '권위'에의 도전이 아니라, clarify 하고 improve 하기 위한 노력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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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
2017. 7. 14. 16:40

엉뚱한 묵상(?) 카테고리 없음2017. 7. 14. 16:40

오늘 encounter with god 본문 창세기 25 장의 시작부분을 읽다가,

이전에는 간과했던 사실에 충격을 좀 받았다. 아브라함에게 후처와 첩과, 그들을 통한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는 것. 

아니, 뭐란 말인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아이들이 많았다니? 이삭과 이스마엘 두 명 뿐만이 아니었구나.


그럼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아들인 이삭의 정통성은 아브라함에게서 오는게 아니라 Sarah 에게서 오는 것 아닌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했던 에피소드에서, 독생자 예수님에 비교되는 이삭은 아브라함에겐 독생자가 아닌데, Sarah 에게만 독생자다. 흠.....


그러고 보니 야곱도 어머니인 리브가의 favoritism 으로 인해 이삭의 축복기도를 얻어냈고,

성령님으로 잉태된 예수님에겐 마리아의 염색체만 있다. (인간남자 의 염색체는 없다.)

그러고 보니, 유태인은 모계사회구나. 그건 예수님 시대 훨씬 이후부터 그렇게 된 거 라는 거 같다.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내용: 마가복음 10:29-30 에서 예수님의 말씀. 29 절에서 언급된 집, 형제 자매, 어머니, 아버지, 자녀, 땅 등 중 아버지와 아내는 30 절에 포함되어있지 않다. 아버지가 "deliberately"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만이 진정한 아버지이시기 떄문이라고 한다. 가부장제 중심 공동체가 아닌, 하나님께서 아버지되신 공동체를 칭한다고. (그리고 다른 데서 찾아본 내용 중, 아내가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아내는 한 명이지 예수님을 위해서 아내를 버린다고 해서, 아내를 백 명 돌려받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ㅎㅎ -- 아내라고 했지만 배우자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겠지. )


흠.. 가부장 족장 시대에 가부장 중심의 시각에서 쓰여진 구약 스토리라인에선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었지만...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며 스토리를 쓴다면 믿음의 진정한 조상은 Sarah 가 아니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예수님께서 여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다빈치 코드 비스무레할 수 있는 가설 ㅎㅎ....        fiction 소재인데...

(이 모든 주제에 대해서 이미 그런 가설들을 세워서 논문도 쓴 이들도 많으리라.)


안타깝게도 정절을 지키지 못하셨던 아브라함 할아버지.

그 믿음의 조상님 덕분에 엉뚱한 생각들을 해 봤다.


8/6/17 사라도 아브라함과 같은 언약의 주체라는 기사 발견


..............................................

믿음의 조상이 Sarah 이건 Abraham 이건 뭐가 중요하랴?

예수님의 새언약, 성령으로 거듭남, 하나님의 신실하심, 등등등이 중요하겠지.




:
Posted by pleasing2jc
2017. 7. 7. 15:22

forgiveness 카테고리 없음2017. 7. 7. 15:22

어떤 강의에서 "Forgiveness must name and shame the evil, and find an appropriate way of dealing with it, before reconciliation can happen."와 비슷한 인용하는 걸 듣고 정확한 표현이 뭘까 검색하다가 발견한 책의 단락. 


용서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어정쩡하게 덮어버리며 지나가고 잊으려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밑도 끝도 없이 분노하고 정죄하는 것도 아니다.


Naming, shaming the evil, and finding an appropriate way of dealing with it.

blame 은 하나 punish 는 하지 않고,

exclusion 의 단계가 embrace 의 단계에 선행되어야 하고,

무조건 잊는 것이 아니며,

시간이 걸리는 ongoing process.


A struggle to forgive someone is a voyage of anguish and discovery.



여기 인용된 G.K Chesterton 의 예화는 그 위에 설명된 용서와 어떻게 어울리는지 잘 모르겠다. 

G. K Chesterton 의 예화가 원글의 어떤 맥락으로 쓰였는지 찾아봐야 하겠지만....

(앗, 거장의 예화게 도전하다니.... 내가 잘못 이해했거나 틀릴 가능성이 크지만 막 떠오른대로 써보자면...)


예수님께서 인간을 또 세상을 용서하심의 결과는,

인간의 죄로 인한 고생 후, 창세기 원점 회복이 아니라 (에덴동산? 에의 복귀?)

그와 비교할 수 없는 훨씬 더 발전된 관계와 상태에의 회복이라고 믿는다.

New Heaven and New Earth.


그와 똑같이...


인간관계나 공동체나 나라나 사회 속에서의 용서도 그렇지 않을지?

A 와 B 의 관계로 얘기하자면,

A 와 B 사이의 관계라는 거 자체는 똑같지만,

그 이전과 같은 양상 관계로 돌아감이 아닌 

exclusion and embrace 의 과정을 겪어,

A 도 B 도 변화된, 새창조?되고 관계도 새창조된 새로운 관계에로의 회복 아닌지 모르겠다.


오랜시간 일하고 와서 집에서도 일하고, 생각하려니 머리가 아프다. 

다음에 찾아보던지 생각해 보자. 






The Parish Handbook by Bob Ma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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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

최근 사도행전의 스데반의 설교를 대충 읽은 적이 있다. (Scripture U 의 Encounter with God 진도에 따라 5 분 QT)

아브라함부터 솔로몬까지 쭈욱 훑고, 그 믿음의 조상이게 주어졌던 약속의 완성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의 죄를 지적하는.


QT 인 만큼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면,

아브라함부터 솔로몬까지 하나님께서 주도하시고 인도하시고 일하신 역사라는 거다. 

인간적 관점으로 볼 때 아브라함--야곱 등은 위대한 업적이 그다지 없는 듯 하지만, (아브라함 할아버지께 죄송한 말씀)

모세나 여호수아, 또 솔로몬 같은 이들은 인간적 관점으로 볼 때도 어떤 위인성이나 영웅성을 띈 대단한 인물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인간의 위인성과 영웅성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없고, 철저히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으로 말되어지고 있다는 거다. 

그리고 그 역사와 약속의 중심에 예수님께서 계시고.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의 죄를 지적한 마지막 부분이 그 설교의 포인트이겠지만)


구약도 읽다보면 (열심히 읽지는 않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아브라함부터 쭈-욱 훑는 단락이 매우 많다. 

아브라함 - 이삭 - 야곱 - 요셉 - 모세 등등등...

그런데 구약에서도,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등이 얼마나 위대했다는 얘기는 별로 없는 거 같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나님의 사랑, 일하심 등에 관한 얘기 뿐이지....


히브리서 11 장에 보면 믿음의 조상들의 '믿음'과 '믿음'으로 인한 순종/행위 등을 나열하지만, 

그들의 특별한 재능/은사/영웅성 등을 칭송하진 않는다. 


독교의 역사나 교회의 역사 들을 살펴볼때도,

믿음의 영웅들의 특별한 삶에 관해서 배우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그들을 왜 부르셨는가 어떤 목적으로 부르셨는가, 그들은 어떤 믿음을 어떻게 순종했는가 등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biography 등을 읽는 관점을 확실히 해야겠다.

예를 들면 한 때 좋아했던 CS Lewis 의 개인사 에피소드 몇 가지에 환상이 와장창 깨졌지만, 그 시대에 CS Lewis 를 부르시고 그의 재능 등을 쓰신 하나님의 목적이 있고... 등등 뭐 그런... 


문득 한 가지 에피소드가 기억난다. 

몇 년 전 이 근처에서 한 사역을 하고 있는 분과 잠시 인사할 기회가 있었다.

그 분은 이 지역에서 특별한 (흔하지 않은) 사역을 하고 계시는 분이다. 

 사역/간증 모임 중 하나였는데, 그 분의 간증/강의가 끝나고 모인 이들이 그 분과 인사하면서 그 분을 칭찬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나도 그 분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그 분에게 인사를 하며 'you are amazing' 이라는 의미로 "amazing" 이라고 말을 시작했다.

그런데 말을 시작하면서 확 드는 생각이, 사람을 칭찬하면 안될 거 같다는 거였다.

그래서 뒤에 바로 "God" 를 갖다붙였다. Amazing God... 

(모두가 그 분을 칭찬하는 분위기에서 그 분을 칭찬하지 않고 하나님만 높이는 내가 좀 건방져 보이진 않을까 쬐금 염려하며)

그 분은 잠시 멈칫하셨다. 그리고 눈에 눈물이 살짝  돌면서 무척 좋아하시며 반가워했다.... 그래서 그 분이 더 멋져 보이긴 했지만서두.


살다보면, 사람들을 칭찬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분들 배후에 있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더 크게 보고 싶다

그리고...

영웅/위인의 개인사, 일정 모임/교회 등의 역사보다는, 

태초부터 그리스도께서 중심된 역사가 더 크게 보이는 것이 좋고, 또 그렇게 볼 수 있는 시각을 가졌음 좋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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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