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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0. 2. 00:21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음식 카테고리 없음2016. 10. 2. 00:21

누군가가 내게 좋아하는 음식을 물어본다면 금방 대답하기가 어렵다. 


꼭 먹어야 한다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잘 먹을 수 있다.

좋아하는 음식이 정해져있다기보다 새롭고 다양한 음식을 즐기는 편이다. 

가끔 crave 하는 음식 중에 갈비, 라면, 떡볶이, 각종 디저트 등을 포함한 고탄수화물/고지방 음식들이 있지만,

건강에 안 좋을 수 있기에 가능한 피하려 한다는 정도로 대답할 수 있을까?  


아... 물론 음식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며 사는 편도 아니다. 날이 갈수록 하루 세끼 꼭 먹는게 귀챦아지기도 한다. 

배가 고프면 힘이 빠지고 신경질/짜증이 늘기에 먹을 때가 더 많고... 

새로운 레스토랑을 try 해보는것도 맛있는 음식을 맛보려 가는것보다는 경험의 차원에서 간다.

(에니어그램으로 따지면 장형은 확실히 아니다)


어쨌거나 좋아하는 음식은 딱 꼽기 곤란하지만, 

싫어하는 음식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수 있다: 속빈 강정 & 빛좋은 개살구


흠.. 그런데 그것도 그것들 자체를 음식 혹은 과일로서 싫어한다기보다 

그것이 상징하는 것들이 싫기 떄문이라고 볼 수 있지... 허영, 허세, 겉멋,  속은 부실하면서 번쩍번쩍한 외관, 허례허식..


나이가 들어가면서,

(음식에의) 식탐이 강해지기보다는 -- (신진대사도 느려지는데)

속이 꽉찬 것들을 알아보는 눈을 더 가질 수 있음 좋겠고 그렇게 영글어갈 수 있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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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
2016. 9. 22. 11:56

화양연화를 통한 단상과 습작 카테고리 없음2016. 9. 22. 11:56


바쁜 한 주를 매듭짓고 방전되어서 몸을 조금도 움직이는게 싫었던 지난 토요일 오후. 한국어와 영어의 세계에의 권태를 느끼던 차, 다른 언어로 표현되는 정서와 사고는 어떨까 싶어,  한 기사에서 21 세기 best movies 중 하나로 뽑힌  <화양연화>를  찾아봤다. 중국어든 광동어든 전혀 모르기에 영어 자막의 도움을 빌려서 봤고 한국어로 감상문을 쓰고 있으니 언어영역에서의 완전한 일탈은 아니.

왕가위 감독,  양조위&장만옥 주연. 2000 (2001?) 년도 영화. 16 년전이니 "옛날" 영화다.  그 당시 20 대 중후반에 이 영화를 봤다면 중간에 꺼버렸을 것이다. 40 대 중반이 된 지금도 공감할 수 없을 뿐더러, 억지로 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두 주인공의 애정구도가 낯선 것이라서 따라가기 힘들었다. 소위 플라토닉 러브고는 하지만 불륜이다. 종교적 시각에서 이 영화를 평가하며, "죄" 같은 단어로 무식하게 매도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저, 종교/도덕과는 상관없이 에로스적 사랑을 허상이라 여기기에 감정이입이 안된다. 그런데 왜 공감도 되지 않는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데 시간을 할애하며 주저리 주저리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냥 볼만한 영화였네 하면서 지나가면 될텐데, 영화 한 편 본 경험을 왜 이리 분석하고 있는지?  통찰이나 배움을 준 영화도 아닌데 말이다.  

스토리라인과 상관없이 영화예술의 힘을 새삼 느꼈다고 해야하나? 소심한 사람들의 허락되지 않은 청승맞은 사랑 이야기를  아름답게 그려내었다는 것. 그런 이웃들이 옆집에 있었다면 추하다고 느꼈을텐데, 주인공들의 (양조위보다는 장만옥의) 빼어난 외모와 연기, 영상미, 배경음악으로 인해서 몰입해서 볼 수 있었던 거 같다. 애틋해야 할 연애감정에는 설득이 안되었지만,  영화 전반에 스며들어있는 상실감, 외로움, 갈망 등이 부각되어 보였다. 그런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거나 되새김질하는건  21 세가 Bay Area 에선 보기 어려운 일이다. 이곳은 entrepreneurship, 첨단기술, 효율, 생산성, 스피드 등등이 키워드인 곳이니까. 그런데도 이리 집중해서 볼 수 있었던 건, 그것들을 아름답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화끈한 결론도 없이 답답한 이야기를 심미안적, 감각적으 그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밑의) 유튜브 편집 영상이나 음악도 다시 찾게 만든다[각주:1].  

영화의 인상적 장면들을 그림 감상하듯 되돌려보다보니, 문득 ㄱㅎ 님의 문장이 생각난다. 빼어난 문장력으로 유명한 그 분의 책을 두 권 가지고 있긴 한데 아직 안 읽었다. 아니, 못 읽었다. 그의 문장 열 개도 채 안 읽은 사람이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거 자체가 황송한 일이지만, 그저 개인의 취향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문장은  도무지 머리에 입력이 안된다.  책의 첫문장을 가지고 몇 분 동안 낑낑거리다가 포기했다.  그 분은 그 문장을 쓰시느라 하루 온종일을 보내셨을지도 모르지만... 잡초 하나하나까지도 섬세하게 묘사하고 느끼는 그 정서를 이해하기 힘들다. 그의 문장 하나와 씨름하다 지쳐 떨어져서, 무례한 감상평을 쏟아내는 내면의 소리를 가까스로 억누르고 스스로의 메마른 정서를 탓했다. 그런데... 그의 문장을 칭송하는 다른 책에  인용된 "된장과 인간은 치정관계에 있다," 를 읽고는 심히 당황했다. 된장은 (우리에게 친숙한) 된장일 뿐이지 치정관계는 또 뭐란 말인가? 고정관념을 와장창 깨버린 상상력과 표현력에 큰 점수를 드리지만, 그 문장을 극찬까진 못하겠다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일 뿐이다). 언젠가 책을 소개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 한 출연진이  ㄱㅎ 작가와 유사한 문장에 대해서 공감안된다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걸 보고  나만 그런게 아니구나 안도한 적이 있다. 

그런데 영화 <화양연화>의 표현력 깊은 인상을 받고 보니, 그렇게 문장에 집중하는 마인드세트도 대충 이해가 될 듯은 하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렇지만서도 문장과 표현력보다는 알맹이?- 서사와 세계관 철학[각주:2] 을 더 중요시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글을 쓰는데 필요 이상으로 많은 시간을 썼다. Bullet point 몇 개로 끝날 감상평을 이리 길게 쓴 건위에 나열한 색다른 세계를 미숙하게나마 체험해보고자 하는 의도가 반영된 탓도 있다.  주제와 상관없이 짜임새있는 글을 써 보는건 뜨개질이나 모형조립을 하는것처럼 그 작업자체만으로도 성취감을 주고 기분전환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글이나 예술의 세계는 간접경험을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온전한 내 것으로 만들 수 없을 듯 하다. 낯선 것들을 경험케 해주는 예술작품과 예술가분들은 정말 많이 appreciate 한다. 하지만  어떤 일탈을 하고 싶어질때면, 예술작품을 즐기는 것도 도움이 되겠지만, 지금 이 시기에는  dental spanish/chinese 공부 등을 더 이상 루지 말고 시작하는게  더 좋을 듯 싶다[각주:3].  할 일 많다. 지금은  내가  속해 있는 현재 나의 세계에 충실한 것이 [각주:4] 가장 건강하다는 걸 알아야 하는 불혹+ 다 ---  런 불혹 사십대 의 중 2 병 걸린 듯한 글을 초딩 그림일기적 다짐으로 마무리한다. 




  1. 흠 그런데 유튜브 영상을 오늘 다시 보니 답답하다.... 헉... [본문으로]
  2. 소설가 황석영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본문으로]
  3. 마침, 스페니쉬를 하는 한 분이 내게 dental spanish 를 가르쳐주시곘다고 하시기도 했다. [본문으로]
  4. 예술을 한다면 예술에 충실했을테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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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

근 페미니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미디어의 영향이 크다. 

한국미디어도 미디어지만, 최근 오바마가 feminism 에 대해서 쓴 도 있었다. 오바마의 글은 힐러리를 지지하는 정치적 동기가 배면에 있는걸 무시할 수는 없지만  오바마가 자신의 딸 둘을 생각하는 맘도 잘 나타나 있다.  패션, 화장품, 이성관계 등에 대한 기사가 대부분인 여성잡지[각주:1]에 미국 대통령의 페미니즘에 관한 글이 실렸다는것도 상징성이 있다. 최근 십대 남 vs 여학생이 보는 미국잡지를 비교한 기사를 봤다. 진로/커리어 등등에 관한 기사가 대부분인 남학생 잡지에 비해서 여학생을 대상으로 한 기사들은 위의 잡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오바마 뿐 아니라 많은 딸 가진 부모들이 그러하겠지만 나 또한 아이가 살아갈 삶과 세상에 대한 바람이 있다.  아이는 몇 년 전부터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한다. 그건 남녀평등/동등을 추구하는 것이지 여성우월/남성혐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뚜렷이 밝힌다.  아이와 가벼운 대화를 하다가 가끔 남성을 깎아내리는(? 특정남성들이 아닌 불특정다수의 남성들) 농담이라도 하면 그건 (페미니스트가 아닌) man-hater 적 발언이라고 한다[각주:2]  Man hater 라는 표현도 아이에게서 배웠다. 그런 순간들이  아이의 perspective 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 밖에도 내게 페미니즘을 들여다 볼 동기를 부여한 개인적 경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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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책을 읽고 있는 중. 책을 읽으면서 배우는 건 feminism 이라기 보단 gender debate 이라는 term 이 더 적절하다는 것.

속독하며, Critical reading 보다는 초보자로서 overview 를 하는 것과 배움에 중점을 두고 있음. 


다 읽은 책들:


(1) Neither Complementarian nor Egalitarian: A Kingdom Corrective to the Evangelical Gender Debate by Michelle Lee Barnwell. 신학교수가 쓴 책. complementarian 과 egalitarian 이 있다는 것도 모르던 내게 좋은 입문서가 되었음. 


(2) Jesus Feminist: An Invitation to Revisit the Bible's View of Women by Sarah Bessey. 샛노란색 표지에 비교적 큰 활자를 지닌 얇은 책의 겉모습때문에, 읽기 전부터 괜한 편견을 가졌다. sophomoric 한 책이 아닐까? 그런 편견을 가지고 읽기 시작해서인지 중간중간 그렇게 여겨지는 일부 단락이 있긴 했지만, 무척 유익한 책이었다. 그 중 한 챕터는 마르틴 루터 킹 쥬니어의 "I have a dream" 연설을 떠올리게 할 정도의 호소력을 가졌다. 


위 책들의 결론: egalitarian 이나 complementarian 이라는 게 중요한게 아니라 Unity in Christ 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 다음 말씀처럼:


28 There is neither Jew nor Gentile, neither slave nor free, nor is there male and female, 

for you are all one in Christ Jesus. (Galatians 3:28)



적용에 대해서 크게 다루지 않는다. 특히 Sarah Bessey 는 자신도 잘 모르겠다며 각자의 처한 곳에서 기도하며 지혜를 구하며 예수님께 충성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냐고. 


(3)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기독교책이 아님. 20 분 동안 훑어보기만 했다. 일본의 상황이 한국과 비슷하다는 것. 




읽고 있거나 읽을 책들.

다음 책들은 적용점을 더 다룰 듯 하다. 두 책 모두 다 egalitarian 시각.


(1) What Paul Really Said About Women: The Apostle's Liberating Views on Equality in Marriage, Leadership, and Love by John T Bristow 

(2) Partners in Christ: A Conservative Case for Egalitarianism by John G Stackhouse Jr. 



(3) Exclusion and Embrace by Miroslov Volf 에도 Gender debate 에 대한 한 chapter 가 있던 걸로 기억된다. 다시 읽어봐야겠다.



성경의 controversial 한 구절들을 다루는 것은 어느 한 책에 집중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이 책 저 책에 흩어져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 읽은 바로는). 언제 시간 나면 그것들을 노트에 정리하던지 해야겠다. 


짧은 예를 들자면, 

(1) 남성이 가정의 head 라고 했을 때 그 head 의 원어적 의미는 가장/리더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전쟁터에 뛰어드는 군대의 선발(선두?)의 의미가 크다는 것. 

(2) 창세기에 여성을 남성의 helper 로 창조했다는것도 여성만 남성의 helper 라는 것이 아니라 상호간 helper 라는 것.... 등등. 

helper 로 번역된 히브리어 원어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묘사할 때도 사용되는 '강한?' helper 를 의미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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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면에 지닌 남성혐오 및 여성혐오 도 다뤄야 하고, 그와 더불어  인종 & 국적 & 종교 & 나이 & LGBTQ+ &기타 등등 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편견들도 들여다 보고 고쳐야 하고 요즘 이래저래 바쁘다.  일터에서 워낙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더더욱 그렇다.



  1. 잡지 이름 탓(glamour) 인지, 필터를 걸어놓은 우리집 인터넷에선 잡지 페이지가 열리지도 않는다. [본문으로]
  2. LGBTQ+ 등에 대해서도 한번 잘 못 얘기했다가 기독교 근본주의자로 찍히기도 했다. 진땀빼며 아니라고 설명해야했음. [본문으로]
:
Posted by pleasing2jc




  • 지난 몇 주 정도 동안 John Piper 와 NT Wright 의 Justification debate 책을 다시 좀 읽으면서 정리해 봤다. 
  • NT Wright  의 The New Testament and the People of God 와 Jesus and the Victory of God 도 좀 읽었음.
  • 일상을 살며, 또 다른 책들도 읽으면서 정리하는 거라서 진도는 더디게 나감.
  • 여기저기서 접하게 되는 칭의론에 대한 잡다한 "정보들" 속에서 혼란스러워서 시작한 작업이다. 최근 갈라디아서를 다시 읽으면서이번 기회에 꼭 칭의논쟁에 대해서 정리하고자 싶었다.
  •  칭의논쟁에 대해서 오래전부터 들어왔고, 이전에 책을 좀 읽기도 했고, 또 다른 이들의 요약을 읽기도 했다. 그래도  이해가 안되어서 디사 책을 읽고 본격적으로 정리해보자 결심했다.
  •  몇 년 전에 조금 읽었을 때보다 다시 읽으니 더 이해가 잘 되는 편. 지금까지 두 사람의 책을 약 70% 정도 읽었다. 
  • 신학초보로서, 숙제하듯 그 책들을 읽으며 드는 생각은 "이건 정말 신학적 논쟁이구나," 라는 것.  
  • 이런 신학적 논쟁은 자연현상이나 화학반응 등을 잘게 쪼개고 분석해서 그 mechanism 을 밝히거나 modeling 을 하는 과학적 작업과 많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동안 (본격적) 신학 혹은 교파 등에 약간의 거부감을 가져왔는데 , 그랬던 이유는 하나님을 알기 이전에 신학 등에 섣불리 사로잡히는 것이 마치 경이로운 대자연을 알기 전에 과학 공식이나 수식에만 집중하는 모습 같아서였다. (이건 한 때 과학/공학 을 공부한 이로서 개인적 경험에 비춘 지극히 personal statement)
  • NT Wright 이 잘 하는 얘기, "성경은 (doctrine 의 모음이 아니라) 이야기다. 시나 드라마, 교향곡과 같다" 등등의 이야기도 그런 이유에서일 듯 하다. 
  • 신앙의 계보를 이어온 힘은 witness 들의 testimony 이지, 신학논쟁은 아니다. - 여기서 testimony 는 간증일수도 있지만 일반적 의미의 간증보다는 증언의 의미가 크다. 
  • John O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나? --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런 책들을 읽고 하는 이유가 "What's the minimum requirement to be saved?" 라는 질문에서 시작해선 안될듯. 이 모든 것을 drive 하는 원동력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인간이 그에 반응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다. 


What is the Gospel?

1. NT wright: Jesus is the King, Jesus is the Lord.  -- Mata-narrative 을 강조

2. 전통적(?) 관점: Justification by Faith  -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 개인 구원을 강조.

 

"Justification" 의 차이. 


1.  Piper 가 옹호하는 칭의 :  

Justification by faith, 그리고 그로 인한 imputed  righteousness  를 강조한다.

Martin Luther 의 신학


2. NT Wright 의 칭의:  

                     God's righteousness 즉 God's faithfulness to His covenant 로 인해 인간은 justify 되고, 

                      covenantal  membership 을 가지게 된다. 

                     John Calvin  의 "In Christ" 신학을 더 지지 (마르틴 루터보다)


첨부:   Justification debate 에 관한 강의 podcast 를 대충 들었다. 루터를 지지하는 이의 강의지만 Thomas (토마스 아퀴나스) - Luther/Calvin 의  doctrine 의 Justification 을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Calvin 또한 imputed righteousness 를 얘기했다고. acquittal of guilt 의 의미에서? - 글쎄 그 정도 수준이라면 상당히 얄팍한 justification 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니, Calvin 의 논리를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그러나 debate 의 세세한 부분까지 알려면 줄기보다 가지로 빠지는 양상이 될 수도 있으니  개요만 이해할 정도면 될 듯 하다 - To be done much later. 


God's righteousness 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의 차이가 칭의의 outcome 의 차이를 가져오는듯 하다. (outcome 이라는 용어 자체가 적절한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서두)


1. NT Wright 가 믿는? righteuosness 정의

God's faithfulness to His covenant (하나님의 백성과의 관계적인 면이 크다)

2. John Piper 가 믿는? righteousness 정의 

God's faithfulness to preserve His Glory, His Holiness. 

(관계적 요소보다는 하나님 그 분 자체의 영광 등에 초점을 더 맞춘듯 느껴진다.)  John Piper 가 그의 설교에서 정의한 하나님의 Holiness 는 "완전함/완벽함" 에 가깝다  (source 를 다시 찾기가 귀찮아 다시 안찾음. 간단한 web search 를 하면 나옴)



 (몇 페이지만 읽어본) Alister McGrath 의 칭의에 관한 책에 따르면, NT Wright 의 관점과 일치한다. 히브리어 등 어원을 따지면, 
하나님의 righteousness 는 그의 covenantal faithfulness  에 가깝다고 한다.


 


어떤 세계관에 기반을 두는가?


1. NT Wright 이 강조하는 칭의론은: 1 세기 유대인의 세계관 혹은 second temple 유대교의 세계관의 framework 에 큰 기반을 둔다.  

즉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 => Exile => Return of Israel 등등. 그렇기에 Justification 의 Covenant 적 의미를 강조하고, 회복된 하나님 나라는 아브라함과의 언약과 (Genesis 12, 15) 더 상관관계가 있다. 

    하나님과의 아브라함과의 언약 자체가 아담 &이브의 죄로 인해 타락한 인류를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 구원하고 복주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2. John Piper 의 책에 직접적으로 언급되진 않지만 유추해 볼 때, 전통적인(?) 칭의론은 Creation-Fall-Redemption-Restoration 의 framework에 기반을 두지 않았을까 싶다. 회복된 하나님 나라는, 아담&이브의 죄  (창세기 3 장) 이전의 상태와 더 상관관계가 있다고 해야 할지?




(NT Wright 에 따르면)1 세기 유대인들의 믿고 있던 바 (narrative) 는 대충 다음과 같다.


1.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받고 귀환하고 언약을 회복하시고 성전을 재건되고 하나님께서 시온에 오심으로서..

2. 이스라엘 백성을 온 세상을 축복하는 통로로 삼으신다는  세계관. 

3.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은 로마통치 하에서 Torah 를 철저히 잘 지키면 그 시대가 앞당겨질거라고 생각했다고. 

4. 그들의 메시야관은 영광 속에서 오시는 화려한 정치적 메시야. 

5.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에겐 정치적 동기가 있었다.  



(NT Wright 에 따르면) 그런데 예수님 사건은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 백성이 중심인 위의 흐름의 framework 는 그대로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참이스라엘 예수님이 중심이 되는 narrative 다.


1. 참이스라엘은 예수님. (ethnic group 으로서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2. 이스라엘 민족이 겪으리라 믿어졌던 고통과 고난을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으로 겪으신다.

3. 에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로 참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4. 예수님께서 왕이신 하나님 나라가 열린다.


부: NT Wright 이 지양하고자 하는 칭의는:


(1) 위와 같은 meta-narrative 를 깡그리 무시해 버리고 아래와 같은 과정만 쏙 빼 와서 그것에만 집중하는 것.


죄인  --- (justification by faith)-----> 의인 (imputed righteous)  


(2) 그렇기에 영혼 구원에 집중하고 개인구원. 죄의 용서&개개인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십자가의 의미 전부가 되어버린 현상.

NT Wright 이 죄의 깊이나 죄의 용서 측면을 약화하는 것은 아니다. "(Membership in God's family) includes as its central element the notion of having one's sins dealt with: "family membership" is not opposed to "forgiveness of sins," but is its proper and biblical context,"  (Justification, p134) 

NT Wright 이 강조하는 것은 죄를 사함받는데서 끝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것. 그에 한정되지 않은 장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데 왜 죄사함에만 집중하느냐 하는 것이다.

(3) 영혼이 구원되어서 사후 heaven 가는 것이 목적인 크리스챤의 삶 

(4) Righteous 를 moral righteous 로 정의하는 것. 

(5) Faith 를 하나님의 faithfulness 로 보기보단 인간의 믿음으로 보는것
(6) Imputed righteousness  는 아니다? - Law court setting 에서 법관의 righteousness 가 죄인에게 전가되지 않는것처럼.  Imputed righteousness 보다는  declaration of status of the righteousness 를 더 옹호. (흠...  이건 잘 수긍이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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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w"의 목적? 혹은 "Law"를  지키는 동기의 차이: 이것을 정확히 아는 것이 마르틴 루터의 갈라디아서 해석과 NT Wright 의 해석의 차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거 같고  (이건  NT Wright 이 정리한게 아니라 내가 정리해 본것.. 틀릴 수 있음)

 

1.  아브라함 언약 그리고 모세의 Torah - 하나님 언약 백성으로서의 표시와 삶의 방식?

2. Second Temple Judaism:  하나님 언약 백성으로서의 표시도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Redemption 을 위해서 더 열심히 지킴

3. 갈라디아서 시대: 

NT Wright 에 따르면 Judaizers in Galatians - Gentile Sinners 가 아닌, 하나님 백성 (인 유대인) 이 되기 위해서 circumcision 이 필요하고 Law 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  

마르틴 루터 등에 따르면: 갈리다아에 율법을 지켜야 justify 된다던 무리가 있었다. 하나님 백성 vs. 이방 죄인의 구도라기보다는 의인 vs 죄인의 구도

4. Martin Luther 시대의 Catholicism - Salvation by faith and moral good works.  구원받기 위해서 moral good works 도 필요하다고? 그에 반대한 마르틴 루터는 Justification by faith 를 주장했고.
5. 현대의 율법주의 (legalism) - Justification 보다는 성화를 위해서 율법적인 것들을 강조하는 면이 크기도 하다? 하지만 구원의 여부와 시점 등이 중요시되던 시절, 특정 종교활동을 안 하거나 어떤 "세상적" lifestyle 을 고수할 경우 " 그 사람 구원받은 거 아닌거 같다," 뭐 그런 질문들을 하기도 한 걸 보면 굳이 성화의 범위에서의 legalism 은 아닌 듯.


Second Temple Judaism 의 유대인들이 법을 지킨 동기와 구약 시대 유대인들이 법을 지킨 동기는 좀 다르다. 하나님 언약 백성으로서의 표시인가? 아니면 법을 지킴으로서 하나님 언약 백성의 redemption 을 앞당기려했나 뭐 그런 차이. 다른 시대의 율법주의들도 미묘한 차이가 있다. 



Question: Law, Life, Action, Work, Obedience 의 연관관계는?

Holy Spirit?

성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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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나 로마서를 어떻게 읽어야 할 지는 아직도 온전히 정리가 안된다. 사도바울(Great uncle Paul in God's family !)  본인이 되지 않는 한 어떤 맘으로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썼는지 다 이해는 못 하리라. 더 공부하면서 tidy up 해야 할 듯. 


그러나 그 책들을 어떻게 읽느냐 보다는, 어떻게 살아내느냐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을 볼 수 있는가? 그 안에 어떻게 머물까가 더 큰 질문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큰 그림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웅장한 뜻과 사랑을 더 깊이 알아간다는데 이 작업의 의미를 둬야 할 듯. Unfathomable God...


33 Oh, the depth of the riches and wisdom and knowledge of God! How unsearchable are his judgments and how inscrutable his ways! (Romans 11:33 ES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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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 wright 의 최근 설교/강의

그가 얘기하는 성경의 narrative 도  진화되고  더 comprehensive 해 지는걸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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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혐오 사건들, 공무원의 망언 등등 으로 인해 분노하고 있는 한국에서도...

최근 여러 사건으로 큰 아픔을 겪고 있는 미국에서도...

John O 목사님이 오늘 인용한 갈라디아서 말씀과 같은 복음의 은혜와 능력이 충만해지도록 기도한다....


 26 for in Christ Jesus you are all sons of God, through faith. 27 For as many of you as were baptized into Christ have put on Christ. 28 There is neither Jew nor Greek, there is neither slave[g] nor free, there is no male and female, for you are all one in Christ Jesus. 29 And if you are Christ's, then you are Abraham's offspring, heirs according to promise. (Galatians 5:26-29 ES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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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
2016. 6. 8. 02:10

from scattered readings and thoughts 카테고리 없음2016. 6. 8. 02:10

Evil, Narcissism, and Lack of empathy 


1. 20 년만에 다시 읽은 M Scott Peck 의  "People of the Lie" 책에서 요약하길 악의 two ingredients 를 게으름 (laziness)과 악성 자기애 (malignant narcissism) 이라고 했다. 20 세기 정신과 의사의 입장에서 그렇게 요약한것.


- 게으름에 관한 부분은 그의 다른 저서 "The Road Less Travelled" 에서 다뤘고, 악성 자기애에 관한 부분은 "People of the Lie" 에서 다룬다.


2. 21세기 뇌과학자인 Simon Baron-Cohen 의 "The Science of Evil: On Empathy and the Origins of the Cruelty":

 인간 잔인함의 원인을 공감력의 침식됨 (empathy erosion) 에 두고 있다. 공감능력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대상화 (objectify) 한다. 그리고 철저히 나 중심적 ("I" mode) 로 살아간다. 


3. 저자는 공감능력이 아예 없는 상태를 "Zero Degrees of Empathy" 라고 칭한다. 그리고 그 상태는 크게 네 가지로 나눠진다: (1) 경계성 인격장애, (2) 싸이코패쓰 (3) 자기애성 인격장애 (4) 아스퍼거 증후군 . 첫 세 상태는 부정적이지만 아스퍼거 증후군의 상태는 긍정적일 수도 있다.  아스퍼거 증후군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인간에 집중하기 보다는 시스템에 집중한다고. 그렇게 시스템에 집중하는 습성을 잘 이용하면 그런 면에서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4. (실험에서) 공감능력을 measure 할 떄, 다른 이의 eye expression 을 보고 감정을 읽는 테스트를 쓴다고 한다. 


5. M Scott Peck 은  (malignant) narcissism 은  한 가족 안에 발현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을 잠깐 썼고 Simon Baron-Cohen 은 empathy 를 담당하는 뇌부분과 유전자가 있다는 과학적 근거를 든다 (still in hypothesis stage?).  그렇게 공감능력을 familial pattern/genetic predisposition 의 면으로 보는 건 위험할 수도 있지만 부분적으로 타당한 이론일 수도 있다. 


 => M Scott Peck 이 악의 근원 중 하나로 본 malignant narcissism 의 뿌리는 결국 공감력 부재가 이유라는 것. 공감력 부재로 인해 오로지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고 타인을 인간으로 존중하지 못하고 대상화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타인에게 잔인해 질 수 있다는 것.


 - Narcissism epidemic 이라는 책도 있고 이곳저곳에 기사화되듯 자기애의 증상이 더 심해지는 시대이다. 산업화와 자본주의, 물질주의, 온갖 과학기술 문명 발전, 포스트 모더니즘 등등으로 인간을 대상화 (소모품 내지는 funtional unit,  audience 등으로 보는...) 하는 것이 심해지는 동시에, 자기애의 증상이 더 심해지는 시대.


- 물론 성경에서 말하는 죄/악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거역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order 가 꺠어진 것이다.  narcissim은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 스스로를 올려 놓는 것이고 하나님조차 objectify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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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and empathy


6. 세상에는 자기애가 없는 사람이 없고 백프로 완벽한 공감능력을 가진 사람도 없다.  누구나 스펙트럼 상에 있다. 그것이 건강한 자기애인지 건강한 공감능력의 범주에 있는지 그것이 question 이다. 자기애가 없어도 공감능력이 지나쳐도 그것은 건강하지 못할 수 있기에. 


7. 해은 건강한 자기애와 공감능력의 밸런스를 찾고자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 건강하지 못한 자기애를 이기고 heal 하는 방법은 사랑이다. 


8. M Scott Peck 의 책에서도 narcissism 을 이기고 치유하는 방법은 사랑이라고 한다. 책의 제일 끝부분의 쓰여있는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떠올리게 한다


9. 다른 사람을 objectify 하지 않고 --- 심지어는 다른 사람을 "나의 사랑과 사역의 대상"으로 objectify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한 인간으로 온전히 존중하고 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지혜롭게 사랑하려면 공감능력이 필요하다. 타인의 사고체계 이해 라는 이성적 측면의 공감 뿐만 아니라 상대편의 감정을 공감하는 감성적 능력도 똑같이 중요하다. - Both cognitive and affective empathy    만약 공감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만의 사랑을 강요한다면 핀트가 안 맞을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M Scott Peck 이 "People of the Lie" 에 든 예가 그런 예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 형제를 키우고 있는 부모가 있었는데, 큰 아들이 권총으로 자살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부모는 동생에게 그 권총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다. 형이 자살한 바로 그 권총을. 우울증에 걸린 동생을 만난 저자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그 부모에게 묻는다. 왜 그런 총을 동생에게 선물로 줬냐고. 그건 형처럼 죽으라는 얘기 아니냐고. 그런데 그 부모의 변명은 이러했다 "그 나이 때에 총을 가지는 건 좋은거라고 생각했다. 그 총으로 형이 자살했다는 건 전혀 생각지 않고 선물했다. 우리는 새로운 총을 살 경제적 여유도 없다. 또 우리는 당신(책의 저자) 처럼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단순하기에 다른 이유는 생각하지 않았다." 


- 그 케이스를 읽고 든 질문들: 그 부모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까? 그 총을 선물하면서 그 선물이 해석될 수 있는 여러의미를 정말 전혀 생각도 못할 정도로 무지한 사람들이었을까? 정말로 그들이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작은 아들에게 그 총을 선물했다면? 그들의 잠재의식 속의 의도가 그 총을 작은 아들에게 선물하는 것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을까? 


- 하여튼 저자는 그 부모들이 evil 이라고 한다 (malignant narcissism). 


-  만에 하나, 그들이 정말로 정말로 선한의도 (그들 방식의 사랑?) 를 가지고 그런 선물을 했다면, 작은 아들의 입장에서 그 선물이 어떻게 받아들여 질 수 있는지 생각할 수 있는 공감능력이 결여된 이들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M Scott Peck 의 표현대로 하자면  malignant narcissism 이고 또 다른 저자의 표현대로 하자면 zero degrees of empathy 인 것이다.

 



10. Roman Krznaric 의 "Empathy why it matters & How to Get it": 공감력이 뛰어난 사람들의 6 가지 습관을 설명하고 공감력을 기를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한다. 


11..20 세기는 age of introspection (내성, 자기성찰의 시대) 였고 이제는 age of empathy 로 넘어가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Introspection 혹은 self-reflection 뿐만 아니라 outrospection 이 동시에 이뤄저야 한다고 한다.  다양한 사람들과 문화 등을 대하고 그들의 사고와 감정, 삶 등을 이해하고 공감하는기회를 많이 가져야 한다는 얘기다.  


  --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영화 등을 보는 것들 또한 지평을 넓히는 것: 다른 이들의 생각과 감정, 시야, 세계관등을 이해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12. M Scott Peck 의 The Road Less Travelled 에서도 사랑을 이렇게 얘기한다: “Love is the will to extend one's self for the purpose of nurturing one's own or another's spiritual growth. 자신을 확장시켜 다른 이들을 포함해서 모두의 성장을 도모하는 것. 


 => 자신의 범위를 넓히는 것 -- 스스로를 큰 하나님과 큰 세상에 비추어 보며 자신의 한계와 작음 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다른 이들의 존재와 시야를 수용하고 존중하는 것. 


    성경에 나오는 Deny yourself 라는 말씀 실천: 중세시대의 수도승들 등은 자신의 몸을 때리고 온갖 고난을 self-inflict 하면서 그 말씀을 실천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그런 실천이 어떤 면에선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런데 Deny yourself 라는 말씀을 다르게도  해석 실천할 수도 있을 듯 하다:  

하나님이 구원하신 세상 & 타인들을 향한 사랑으로 "나"를 채워나감으로서, 나의 old self 가 죽고 하나님 안의 new self 로 거듭나는 것을 경험하는 것. "나"의 존재를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 (세상과 타인을 향한 사랑) 으로 채움으로서 내가 작아지고 "죽는다". 물론 나의 근본적 죄성 ( 자기애와 공감능력의 부족 등등등)을 거슬러 세상과 타인을 사랑하는 과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그렇게 할 때 "내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큰 하나님의 나라 속에서 타인들과 세상과 함께 화목하게 하는 "나로 거듭나" 그 하나님 나라 안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 

  

중세시대 수도승들처럼 자신의 몸을 때리고 고행을 하면 나의 죄성이 온전히 다 죽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생길까? 글쎄, 그 수도승님들의 기록들을 읽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아무리 고행을 해도 끝이 없는 죄성과 마주치게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고통 속에 있는 이웃들과 공감하고, 즉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느끼려고 하며 그들을 사랑하며 --- 그러나  때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예수님처럼 사랑하긴 커녕, 근본적 도움 이 되지 못하고, 또 나름대로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해가 되기도 하는 나의 사랑할 수 없음과 한계를 마주하며 회개하며 예수님의 소망에 의지하는 것그것이 스스로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아닌가 싶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러했다. 절대 유일신으로서의 스스로를 버리고 인간이 되셔서 이 세상 속에 적극적으로 들어오셔서 철저히 "타인"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사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서 사랑의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셨다. 그 사랑의 클라이맥스인 십자가 사건 -  스스로를 부인하시고, 그 시대와 그 지역에 한정되지 않은 온 세상과 온 인류를 향한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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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Mercy, and Forgiveness overcome evil 


13. 예수님의 말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말씀.


14. 그것은 단순히 "나 좋고 너 좋자"는 " 홍냐홍냐"수준의 사랑이 아니다. 


15.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역은 많은 의미가 있다. God's Kingdom inauguration . 그러나 어떤 kingdom 인가 하는 것? 

예수님 시대 바리새인들은 Torah 를 엄격히 지키는 purity를 중요시 했고, 그런의미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꿈꿨는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의 Kingdom 은 Love and Mercy 의 Kingdom 이다. (NT Wright  의 책 어디선가 나온 말 paraphrase) 


16. 그런 love and mercy 로 예수님께선 악 (cosmic evil) 을 이기셨고 하나님의 나라를 inaugurate 하셨다. Love and Mercy --  하나님의 nature 이시다. God is Love.


17.  그리고 그런 love and mercy 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용서이다. - NT Wright 이 그의 책 < Evil and the Justice of God> 의 가장 마지막 장을 용서에 할애하듯  evil 을 이기고 하나님의 justice 를 이루는 것이 용서이다. 그것은 남을 용서하는 것 뿐 아니라 자기 용서를 포함한다. 예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건 당연하고. 


18.  구체적으로 어떻게 용서 하고 사랑할 것인가? 십자가 은혜와 사랑,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에 근거를 둔 쉽지 않는 그러나 꼭 해야 할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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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자비, 용서 - 구체적 실천의 부분. 


19. NT Wright 의 <Evil and the Justice of God> 의 마지막 장에서 Miroslov Volf 의 <Exclusion and Embrace> 를 잘 요약한다. 이전 크리스챤들은 exclusion 의 스텝 없이 무조건 embrace 하는 용서에 익숙했다. 그러나 Volf 가 얘기하듯 용서에는 embrace 이전에 exclusion 의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잘못이 무엇인가 뚜렷이 밝히고 대면하는 exclude 하는 작업이다. 그 후에 참된 embrace 가 이뤄질 수 있다는 얘기다. 


등등등. --- 아직 더 많이 공부하고 기도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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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
2015. 12. 16. 10:18

루시드폴: 아직 있다 카테고리 없음2015. 12. 16. 10:18




친구들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축 처진 어깨를 하고

교실에 있을까 


따뜻한 집으로

나 대신 돌아가줘

돌아가는 길에 

하늘만 한 번 봐줘


손 흔드는 내가 보이니 

웃고 있는 내가 보이니 

나는 영원의 날개를 달고 

노란 나비가 되었어 


다시 봄이 오기 전 

약속 하나만 해주겠니 

친구야,

무너지지 말고 

살아내 주렴


꽃들이 피던 날

난 지고 있었지만 

꽃은 지고 사라져도 

나는 아직 있어


손 흔드는 내가 보이니 

웃고 있는 내가 보이니 

나는 영원의 날개를 달고 

노란 나비가 되었어 


다시 봄이 오기 전 

약속 하나만 해주겠니 

친구야,

무너지지 말고 

살아내 주렴 




누가 누군지 잘 모르겠는 아이도르  등과, 공감하기 힘든 감성팔이 사랑노래들만 있는 가요계인줄 알았는데 

관심을 갖고 들어보니 깊이 있는 노래들이 많다. 

이 시대 (젊은) 세대 등 의 아픔을 노래하고 위로하고 희망을 암시하기도 하는 그런 곡들.


이 시대의 사람들이 만해 한용운님이나 윤동주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일제시대를 살아간 이들의 심정을 느끼듯,

먼 훗날의 사람들은 이 시대의 노래들을 들으면서 이 시대가 어떠했나 피부로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곘다.


<Prophetic Imagination> 책에 보면, prophetic imagination 은 prose (산문)이 아니라 lyrics (운문, 시, 가사?) 를 통해서 표현된다는 말이 있다. 

그런 lyrics 가 오늘 날 기독교에 있는가.. 문득 궁금해진다.  잘 모르겠다. 없다는 의미의 잘 모르겠다가 아니라 진짜로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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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

한국에서 미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지 20 여 년이 지났다. 미국생활 초기, 대학생일 때는 매년 한국에 갔었다. 지금과 비교해 자주 나갔어도 인터넷이 발달이 안 되어서인지, 유행어나 표현이 바뀌는것등에 적응 안 될 때가 있었다. 미국 온 후 1-2 년 후 갔을 때, 친구들이 "당연히" 라는 표현을 "당근" 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 안 되었고 (당근은 채소의 한 종류인데 왜 그런 표현을 쓸까?  적응 안되었음.) 또 언젠가부터는 "맛있다"를 "맛나다" 라고 하는 것이 생소했다. 


그와 더불어 한국에서 사회 속 다양한 사람들을 분류하는 기준에도 소위 유행이 있다는 걸 본다. 물론 빈부격차나 신분에 따른 분류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보편적이다.. 한국에서 특이한 점이 있다면 신조어로 한가지 기준이 표현되고 그  한가지 기준이 다른 기준들에 비해서 더 부각된다는 것이다. 그 유행이 미국의 내게는 아직 생소한데, 어느 새 한국사회에선 일반적인 것이 되어 있을 때 놀란다. 


그동안 notice 한 흐름은 다음과 같다.

  • 강남 vs. 비강남 : 1980 년대 중반 - 1990년대 초반부터 강남과 비강남을 구분하는 경향이 있긴 있었지만 1990 년대 중반 이후 경향이 더 강해진 걸 느꼈었다. socio- economic status (SES) 의 기준?
  • 좌파 vs. 우파 (이건 정치적 성향) :  언젠가부터는 좌파와 우파가 흑백처럼 나눠져서 그것이 사회를 양분하는 잣대가 된듯 싶었다. 물론 그 경향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긴 하다.전에는 전라도와 경상도 등 지역에 따른 정치성향 양분화가 더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경상도 좌파도 있고 강남 좌파도 있고 뭐 그러니, 좌파와 우파의 term 을 더 많이 쓰는듯?
  • 갑을 구도: 얼마전부터는 갑을 구도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역시 SES 에의 기준이라고 볼 수 있을까?)
  • 수저론?: 그리고 최근에는 신계급론으로 수저론이 등장했다는 소식을 인터넷 상에서 접했다. 부모의 재산정도에 따라서  흙, 동, 은, 금수저로 나눈대나 뭐래나. (이도 SES 의 기준?)
람을 분류하는 것을 한가지 기준으로만 하는 것은 무척 일차원적이다. 좌표(coordinate?) 로 치자면 x-axis 하나만 존재하는 좌표다.  y axis 나 z axis 등등은 생략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좌표가 먼저 생기고 사회구조와 인간사고가 그것에 지배당하는 것 아니다. 그런 특정한 혹은 특이한 좌표가 부각되는 것은 그 사회의 지배적 가치가 반영되어서일것이다. 한국의 지금 상황이 그렇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지만 그 반대의 경향도 있다. 사회구조/인간사고를 지배하는 좌표가 모든 현상과 사람들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버리는 경우다.한가지 좌표에 의해서 사고가 지배되는 사회의 세계관은 단순하기도 하고 어떤 의미로선 왜곡된 세계관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A 라는 사람이 B 라는 사람에게 특별한 친절을 베푼다고 하자. 그럴 때  B 라는 사람은 "A 라는 사람이 참 친절한 사람이구나" 해석할 수도 있다. 한편 모든 것을 갑을구도로 해석하는 사람은 "A 가 내게 친절을 베푸는걸 보니 내가 이 관계에서 갑인가 보다" 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수저론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로 분류된다면 더 쉽게 좌절/좌조할 수도 있고.... 

그런 일차원적 사회에서 청년기를 맞았다면 탈출을 꿈꿨을 거 같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그런 사회현상에 대해서 오래전 그곳을 떠난 이로서 멀리서 방관하면서 이렇게 얘기하는 거조차 미안하고 가슴아프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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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기준으로 현상이나 사건,  일상을 해석할 것인가는 매일매일의 고민이다. 
그것은 내가 어떤 좌표 위에 존재하는가를 명확하게 알 때 가능한 일이다.

요즘 이런 생각을 많이 한다. 아니, 꽤 오래전부터 그런 기도를 해 왔다. 세상이나 사람들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시각으로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음 좋겠다는 기도. 개인이나 사회의 고정관념과 한계 등에 의해서 왜곡될 수도 있는 시각을 벗어나 하나님의 시각에서 모든 걸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기도.  하나님의 cosmic coordinate 위에서 세상을 분별할 수 있음 좋겠다는 기도. 그런 분별력을 가진 성숙함으로  하나님과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기도.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분별(discern)과 판단(judge)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분별하되 판단/정죄하지는 않는 성숙함이 중요하다.

편으로 치우친 편협한 좌표가 내 삶에 불쑥 들어와, 나를 그 좌표 위에 올려놓고 내 삶을 컨트롤하고 나를 제한하려 할 때가 있다. 그런데 그 편협한 좌표를 와해시킬 힘이 내게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그 편협한 좌표를 피하고 그 좌표와의 접촉을 최소화하게 된다.  그에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자신이 없을 떄 그렇게 한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아직 내공이 부족해서도 그렇고, 내 존재 안에 그 편협한 좌표의 흔적이 내재해 있기 때문에도 그럴 것이다. 소위 시험드는걸 피하고 싶어서다. 

고등학교 어린 시절 한국을 떠나긴 했지만, 어린 맘 한구석에도 일부 한국 사회의 한계적 좌표를 떠나고 싶다라는 맘이 컸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는, 미국에도 똑같이 존재하는 편협한 세상적 기준들을 떠나서 큰 하나님 나라에 속하고 싶다는 맘이 컸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하나님의 가치기준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외적인 것에 치중하지 않고 영적인 것을 구한다는 뭐 그런 얘기다.  

그런데 최근 십수년간 이미  어린시절에 떠났다고 여겼던 특정한 세상적 좌표가 내 삶에 끼치는 영향이  좀 컸기에 힘들 때가 있었다. 그것은 어린 시절 내가 떠나고자 했던 좌표와 다시 연결되는 그 시점에 시작되었다. 그것이 내 안에서 해결되지 않은 그런 문제들과 부딪혀 많이 힘들었다. 오랫동안 힘듦의 원인이 뭔지 정확히 파악 못하고 헤매고 힘들어하다가 최근에야 갈피를 잡기 시작했다. 고민과 기도 중이다.  언젠가는 피하지 않으며 그에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잡고 그 편협한 좌표를 초월하고 그 좌표를 흐리게 만들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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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오늘 읽은 빌립보서 1:9-11 의 사도바울의 기도가 떠오른다.  사랑을 지헤와 총명으로 풍성케 하사..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그런 사도바울의 기도를 따라하게 된다. 사랑을 지혜와 총명으로 풍성케 하사 (하나님의 기준으로) 지극히 선한것을 분별하며....

아마도 사도바울 본인이 하나님의 기준으로 선한것을 분별하는 기준을 가졌나 보다. 그러니까  시기와 분쟁, 이기적 야심 등으로 하나님을 전하는 일들 이들을 판단(정죄)하지 않고, 그런 그들을 통해서도 그리스도가 전해짐을 기뻐했겠지. 심지어 그들이 자신을 해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것은 사도바울 자신의 인간적 기준으로 그 사건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봤기에 그럴 수 있었으리라. 그런 사도바울의 분별력과 시각, 포용력과 사랑을 닮고 싶다.

And this is my prayer, that your love may overflow more and more with knowledge and full insight 10 to help you to determine (discern) what is best, so that in the day of Christ you may be pure and blameless, 11 having produced the harvest of righteousness that comes through Jesus Christ for the glory and praise of God.  (Philippians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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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
2015. 1. 31. 02:00

무제 카테고리 없음2015. 1. 31. 02:00

 

그들에게도 아픔이 있고 힘듦이 있어도 그런 것이 없는듯 행동한다.

그렇다고 그런 행동이 따뜻함과 사랑이 넘치는 진정한 밝음이 아닌,

뿌리깊은 자기연민 위에 덧붙어진 가벼운 농담이 어우러진 피상성의 연속이다.

그리고 때론 상대편에게도 그런 것을 요구한다.

 

상대편이 최상의 컨디션일 때는 다가온다.

그러나 상대편이 힘들고 아플 때는 멀리 떨어져서 

최상의 컨디션을 홀로 회복하길 기다린다.

 

혼자서 버둥버둥 해결해야 하는 것이  반복되고 나면,

그들에게 똑같이 무관심해진다. 맞다, 똑같이 무관심이다.

 

그들에겐,

 

그들만의 눈물은 진정한 눈물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눈물은 악어의 눈물이 되어버린다.

 

다른 사람의 부는 졸부의 것이 되어버리고,

다른 사람의 성공은 다른 조건들 때문에 이루어진 성공이 되어버리고 운이 따랐을 뿐이다.

 

다른 사람의 수나 잘못은, 그가 머리 나쁜 이니까 그런거고.

나의 실수나 잘못에는 온갖 변명이 다 붙는다.

 

나의 아픔은 참아픔이나,

다른 사람의 아픔은 진짜가 아니다.

 

그들은 세상의 중심이다.

그들 안에서도 서로가 중심이 되어 관심을 차지하려고 암투를 벌인다.

그들 안의 다른 이가 주인공이 되려 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관심을 자기에게로 끌려는 어린아이가 되어 떼쓴다.

그리고 그 구성원들을 하나하나 주인공 만들어주면서 은근히 자신의 세력을 즐기는 숨어있는  주인공 또한 있다.

그러나 자신들이 스스로 내세운 주인공임을, 

또 그 구성원 사이에서도 자신 각자 모두가  주인공임을 모른체,

쓴 맘을 가지고 각자 홀로 아파하는 바보들이다.

 

 

그런 세상과 자아에 갇혀있으면 답답하다.

그들, 우물 안 개구리 말고 더 넓은 세상에 나가고 싶다.

내가 한없이 작게 느껴져도 좋으니 더 넒은 세상에서 숨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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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
2015. 1. 5. 06:20

Prayer for 2015 Epilogue2015. 1. 5. 06:20



Ecotone in many dimensions


Jug Handle State Natural Reserve 1. 2. 2015 

Family trip to Mendocino, CA 



An ecotone is a place at which two ecosystems come together, where they meet and blend into one another. It is a place unstable, shifting, and fragile but also fertile, characterized by diversity, fluidity, and transformation. (definition from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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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