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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r Journey Together 전체 보기'에 해당되는 글 309

  1. 2017.09.17 random thoughts on feminism
  2. 2017.09.12 individualism and collectivism
  3. 2017.09.11 진정한 중보
  4. 2017.08.26 소비와 투자 등등...
  5. 2017.08.18 encounter with God 본문순서
  6. 2017.08.08 already but not yet 유감
  7. 2017.08.03 그랜드 캐년 여행사
  8. 2017.08.01 Thirst, Living water, Holy Spirit
  9. 2017.07.25 Culture maps
  10. 2017.07.14 엉뚱한 묵상(?)
2017. 9. 17. 03:01

random thoughts on feminism 카테고리 없음2017. 9. 17. 03:01

(1) 지난 주 받은 이메일들 중 두 개의 제목

 -  Women in Tech: Sustaining a Successful Career (지금 technology 에 종사하고 있지 않기에 해당사항은 없지만)

 - What the World Needs Now is Women : SheLeads 라는 컨퍼런스에 관한 이메일

그리고 한국의 한 기독교 단체에서 진행되고 있는 페미니즘 강좌 (온라인으로 들으려고 간구 중.) 등등.

9 월 15 일자 타임 매거진 커버 <Firsts: Women who are changing the world>

여러면에서 여성지위 향상의 과도기에 있는듯 하다. 

많이 배우고 많이 고민해야 할 때인가 보다.  


(2) Asian female 로서 다인종 미국을 살아가면서, white male 에 비해서 minority 이긴 하지만, Asian female 이기에 가질 수 있는 advantage 도 많이 느끼고 있다.  

미국 사회 속에서는 대체적으로 만족하면서 살고 있다. 정치계에 입문할 것도 아니고, corporate world 나 academia 에서 아주 출세할 것을 꿈꾸는 것도 아니기에도 그렇지만. (만약 아주 '출세'하려고 맘 먹었다면 유리천장을 만났을 지도 모른다.)  

일을 하다보면 stereotypical asian female 보다는 stereotypical white male 처럼 행동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stereotypical asian female 의 장점을 활용해야 할 경우도 있다. Stereotypical white male 처럼 일하다가, 전형적 의미의 '여성적' 모임에 가거나 하면 모드전환이 빨리 안되어서 혼자 당황하기도 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3) 전투적 페미니스트의 urge 를 느낄 떄는 수구꼴통[각주:1][각주:2][각주:3]유교문화[각주:4] 나 극보수적 기독교 환경 등을 마주칠 떄이다. 

전통/종교의 이유로 그들이 define 하는 여성이라는 틀에 가둬버리고 그런 여성의 여성성이나 역할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무척 답답하다. 에를 들면 사회 속에서 재능을 잘 발휘하고 있고 학벌도 좋고 연봉도 많은 여성이건, 가족을 위해서 휴일도 없이 매일매일 24 시간 희생봉사하고 있는 전업주부건, 모든 여성의 역할을  그 공동체 속 전통적 여성상에만 한정시키는 보수적 교회 분위기 등.  


(4) 아이를 임신했을 때  Martin Luther King Jr. 의 <I have a dream> 연설을 태교처럼 읽곤 했다. 그걸 읽으면서 인종평등에서가 아니라, 남녀평등의 영역에서 그 연설을 적용했었다. 아이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제한받지 않는 세상을 꿈꾸며 .

(소싯적 누구나 그렇듯) 어린 시절 공부를 잘 해서,  전통적 옛 문화 속 장남에게 주어졌을 기대와 지원을 받으며 컸고, 남녀공학 학교를 계속 다니면서도 여성으로서의 불평등같은 건 크게 의식 못했는데 왜 그런 아이디어를 가지게 되었을까?  성인이 된 후 접한 제도적 문화 탓이 아닐지 모르겠다.


 (5) 파워를 동등하게 배분받는 페미니즘이라가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등한 위치에서 사랑하고 serve 하기 위한 페미니즘이어야 하겠지. 그런데 여성들은 처음부터 동등한 위치에서 시작해서 '낮아지며' 섬기는게 아니라, 처음부터 낮은 위치에 place 되어서 섬기기를 강요받는 경향이 크다. 그런 잘못된 고정관념과 구습이 우선 바로잡아져야 할 듯. 


(6)  아이가 페미니즘의 기반이 잘 다져진 환경과 사회 속에서 맘껏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갈 수 있길 기도한다.  

(7) 딸들이 (또 아들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내하시고 노력하시고 선견지명을 가지셨던  할머니, 어머니 세대는 위대하다 

(8) O 목사님이 몇 년 전 한 설교. Is Christianity Unfair to Women



  1. 정치적 수구꼴통의 아니라 수구꼴통의 사전적 의미에 따라서. [본문으로]
  2. 수구: 보통 정치적인 측면에서 많이 활용되나 정치적인 것 외에도 경제·문화 등 사회 각 분야에서 구질서를 옹호하는 것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본문으로]
  3. 꼴통: 머리가 나쁜 사람 [본문으로]
  4. 유교문화의 좋은 점도 많으나 안 좋은 점을 고수할 경우 [본문으로]
:
Posted by pleasing2jc
2017. 9. 12. 04:20

individualism and collectivism 카테고리 없음2017. 9. 12. 04:20


팀켈러 목사님이 한 강의에서 이런 얘길 했다. 대충 기억나는대로 써보자면:

한 문화에 속한 이들이 타문화권의 문화를 함부러 평가하고 정죄하면 안된다. 예를 들면 collectivism 이 강한 한국교회의 교인들이 individualism 이 강한 서구 교회를 평가하며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할 수 없다[각주:1]. (그건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Specifically, 한국 교회를 딱 집어서 예를 드는게 흥미로웠다. 아마도 한국인 교인 중 서구 교회/기독교의 개인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이 있었는지...

(어쨌거니 한 문화를 반성하는 목소리는 그 문화 공동체 안에서 나와야 한다는 게 그 목사님의 결론이었다. - 개인주의의 부작용도 물론 아주 많다)

교회를 집합주의 vs 개인주의 양축의 스펙트럼에서 구분한다면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집합주의가 강하다
이마도 전통적으로 끈끈한 친족 공동체, 강한 위계질서의 나라 공동체와, 독재시대와 조직사회 (학교,군대, 직장) 를 거쳐와서인지?

<교회 언니 '여성'을 얘기하다>책에 보면 한국문화에서는, 개인의 올바른 주체성, 객체성이 확립되기 전에 집단 공동체를 우선으로 하는 걸 먼저 배우기에 여러 부작용이 있음을 논한다. 그것이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라고.



------

공동체를 강조하는 걸 많이 접한다.
공동체 중요하다. 성경에서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의 몸이라 한다. 예수님의 몸 -- 아주 중요하지.
그 예수님의 몸에서 손, 발 등 모든 구성원이 소중하다고 한다.

예수님의 몸의 공동체란 집합주의도 아니고 개인주의도 아닌 신비로운 새로운 개념이다.

그런데 공동체를 강조하는 경향이 너무 강해서 그 주장을 하는 태도가 집합주의적인 경우가 종종 있다. 전체주의적이기도 하고.

그 때 집합주의적, 전체주의적이 진정한 의미의 집합 전체주의적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많은 경우 자기 주장 강하고 목소리 크고 때론 힘센 이들의 주장이 전체를 컨트롤하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로 많은 경우 그 힘 센 이들의 이기적 자기중심적 이익을 위해서 전체 공동체가 이용된다. 진정한 공동체도 아니고 집합주의도 아니고 아주 잘못된 모습의 개인주의라 할 수 있다. 소수의 이기주의. 그 소수가 예수님처럼 공동체 구성원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거나, 그 예수님 앞에 철저히 복종하는 지도자가 아닌 이상.

예수님이 머리되신 예수님의 몸인 공동체.
그 안에서 각각의 구성원인 소중한 지체.
또한 각 지체를 royal priesthood 로 부르신 예수님의 '민주적' 혁명 (톰 라이트의 표현)[각주:2]

공동체만이 모든 것의 해답이 아니다.
공동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 집합주의적 전체주의적인 주장은 아닌지.
공동체를 강조하는 배면에, 공동체 전체를 자신의 뜻대로 좌지우지 통제하고, 자신이 중심이 되려는 소수의 숨겨진 (스스로도 의식못하는) 의도가 있는 건 아닌지...



  1. 이게 그 강의의 주요 토픽은 아니었음. 주요 토픽의 여러 갈래 토론 중 나온 짧은 comment [본문으로]
  2. 어떤 강의에선가 예수님께서 "democratized the Vocation" 했다는 표현을 씀. [본문으로]
:
Posted by pleasing2jc
2017. 9. 11. 13:33

진정한 중보 카테고리 없음2017. 9. 11. 13:33

호떡집에 난 불이 아니다.

아니, 호떡집 불 구경도 안되지.


사건, 사고를 대할 때 호떡집 불 구경하듯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기도를 한다고 하지만, 진정한 중보기도를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자극적인 사건사고를 무의식중에 조금이라도 은근히 즐기는 죄성,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들을 감성으로 포장된 사진으로 찍는 빈곤 포르노라는 말도 있듯) 

중보기도를 하면서도 자신의 선함과 의를 의식하는 자기 중심성 또 죄성이 있다.

강건너 호떡집 사건을 자신에 관한 사건으로 해석하는 자기 중심성도 있다.

또는 강건너 호떡집 사건은 내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안도하는 이기적 자기 중심성 또한 있다. 


고통받고 아파하고 힘든 이들을 향한 진정한 중보자의 자비.

예수님을 구할 뿐이다.


지구상의 온갖 재해를 다룬 신문기사등을 보면서...



:
Posted by pleasing2jc
2017. 8. 26. 15:11

소비와 투자 등등... 카테고리 없음2017. 8. 26. 15:11

- 돈이 생기면 충청도 사람은 옷을 사 입고, 경상도 사람은 집을 고치고, 전라도 사람은 음식을 해 먹는다는 말을 어디선가 읽었다.  처음 듣는 얘기라서 흥미로웠다. 물론 어느 지역 사람들이 다 그렇다고  Stereotype 할 수는 없겠지만서도, 시대/지역/세대 별로 소비패턴 등의 트렌드는 분명 있는 듯도 하다. 

- 최근, 한국의 소비 유행과 미국의 소비 트렌드에 관한 기사를 몇 개 접했다.

- 불황 속에 '작은 사치'가 유행이라는 한국. 예를 들면 집이나 차같은 큰 품목에서 사치를 못 하니,  커피나 음식, 립스틱 등 비교적 비용이 적게 드는 품목에서 '사치'를 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단다. 수억원대 혹은 수천만원대 집&차 비해 훨씬 작은 사치인 몇 만원짜리 식사를 하거나 고급커피를 마시며 그 순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소비형태라고.

- 또 다른 기사는: 미국의 부유층 혹은 엘리트 중심으로 inconspicuous consumption 의 트렌드가 생기고 있단다.  시계, 가방, 차, 명품 등의 눈에 보이는 품목에의 소비가 아니라, 교육이나 건강, 문화생활, 은퇴 설계 등에 소비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고.  또 빌게이츠 부부처럼 자선사업에 집중하는 것도 inconspicuous consumerism 의 한 형태라고. (이런 경향은  한국의 일부 계층에도 물론 있겠지...) 

- 그 기사를 읽으면서 교육이나 은퇴 설계 등을 '소비'라고 보는게 흥미로웠다. 교육은 투자라고 말을 훨씬 더 많이 들어왔는데 말이다.  부동산, 주식 투자 등등과 더불어 교육도 투자의 한 형태로 꼽히기도 하니까. 그런데 소비의 면이 있다는 것이 새롭다. 

- 자선사업이나 기부 등도 소비가 될 수 있다는 것. 단기선교나 justice 사업 등도 consumerism 에 입각한 활동이 될 수 있다고 반성하는 걸 어떤 책에서 읽기도 헀다. 

- 소비와 투자, 기부나 헌금, 봉사, 등 다방면에 대해서 돌아본게 된다.

- Matthew 6:19-21 의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케 되고. 그 treasure 이 물질적인 걸 의미하는가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겠지만..... 지금은 너무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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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7 Sun

- 어제 하루종일 일하고 집에 와서 자기 전 위와 같이 끄적거렸었는데, 오늘 주일 설교가 investment 에 관한 거였다. 물질적인 것 뿐만 아니라 에너지, 시간, mind 기타 등등 모든 것을 포함한. (아무래도 이 지역의, 투자에 대한 관심이 무척 크기도 하다.)

빌립보서 3:8-10 이 key verse 였음.  

무엇에 투자하는가 보다 '누구'에 투자하는가? 라는 질문.

Philippians 3:8-10English Standard Version (ESV)  Indeed, I count everything as loss because of the surpassing worth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For his sake I have suffered the loss of all things and count them as rubbish, in order that I may gain Christ and be found in him, not having a righteousness of my own that comes from the law, but that which comes through faith in Christ, the righteousness from God that depends on faith— 10 that I may know him and the power of his resurrection, and may share his sufferings, becoming like him in his death,


:
Posted by pleasing2jc
2017. 8. 18. 00:56

encounter with God 본문순서 카테고리 없음2017. 8. 18. 00:56

Scripture Union 의 Encounter with God 의 본문순서가 흥미롭다. 매일 잠깐씩 읽는 수준이다. 

지난 몇 달간 창세기와 사도행전을 번갈아가며 커버했다.

창세기 도중, 사도행전 스데반 설교 본문이 샌드위치되어서 다시 창세기로 돌아갔다가 갑자기 스데반이 핍박받아 순교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헀다. 그러다가 창세기 37 장까지 하고, 사도행전 9- 12 을 한 다음 오늘부터는 에베소서다. 주일에는 시편이고. 신구약을 오가며 성경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어 좋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 또 이어진 이삭, 야곱, 요셉 등을 통해 언약백성, 언약자손 등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스데반의 설교와 베드로가 본  환상에 대해서 읽었다. 베드로가 본 환상은 보자기에 싸여진 부정한 짐승들을 잡아먹으라고 하시는 것. 


그 본문들을 통해서, 구약 언약백성이어야 하는 유대인에 의해서 죽임당한 예수님에 의해서 fulfill 된  새 언약을 묵상했다.

개인적으로 새로운 개념은 아니지만 창세기와 사도행전을 함께 나열해서 보는 것이 새로웠다.


오늘은  갑자기 에베소서 시작이다.

지금까지의 묵상의 흐름에 부합하는 오늘 에베소서 본문의 구절은 에베소서 1:11-13 이 아닌가 싶다.

"In him we were also chosen, .... marked in him with a seal, the promised Holy Spirit who is a deposit guaranteeing our inheritance..."

11 In him we were also chosen, having been predestined according to the plan of him who works out everything in conformity with the purpose of his will, 12 in order that we, who were the first to put our hope in Christ, might be for the praise of his glory. 13 And you also were included in Christ when you heard the message of truth, the gospel of your salvation. When you believed, you were marked in him with a seal, the promised Holy Spirit, 14 who is a deposit guaranteeing our inheritance until the redemption of those who are God’s possession—to the praise of his glory.



:
Posted by pleasing2jc
2017. 8. 8. 14:38

already but not yet 유감 카테고리 없음2017. 8. 8. 14:38

신학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는 concept 혹은 phrase, 'already but not yet' 에 괜히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다.

왜 Not yet 라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한 마무리를 했냐는 거다.


Not yet but already 도 아니고, 

Already however not yet 도 아니고,

왜 하필이면 already BUT NOT yet 인지?


Not yet 의 현실이 너무 길게 느껴진다.


뉴스, 세상, 인간역사,...


한 시대를 찬란하게 장식했던 제국의 유물이 전시된 박물관에 가도,

새파랗게 젊은 청년들이 목숨을 잃은 전쟁 역사 영화를 봐도

느껴지는 역사의 피로감과 허무함, 잔인함.


시리아난민들과 아프리카 가뭄 기타, 국제적 상황 등등...


종교 개혁 500 주년 기념이라는데 여전히 미완성이라는 종교개혁,


미래학 강의를 들어도 답답하기만 하다.

흥망성쇠의 역사는 수천년간 반복되어 왔는데 뭘 또 진보시키려 하는지...


Not yet... not yet... not yet...not yet..

앞으로 또 다른 이천년이 될지, 수만년이 될지?


괜스레, already but not yet 탓을 하며,

내 맘대로 위 phrase 를 바꿔본다. 그저 혼자 그렇게 되새기며, 비관주의에 빠지려하는 스스로의 시각을 좀 바꿔보고자.  

already but not yet, soon and forever?

already but not yet, BUT already, soon and forever?


(soon 이라고 해서 이단적인 soon 이 아니라 요한계시록 22: 20 에서의 soon ..)


신학적으로 올바른 구조를 가지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지만,

좀 더 온전한 큰 그림의 phrase 를 가지고 싶다.


하지만서도,

not yet 속에서  not yet 를 fully embrace 하고 groan 하고 lament 하는 것 또한 진정한 소망에 다다르는 길일지.


:
Posted by pleasing2jc
2017. 8. 3. 13:32

그랜드 캐년 여행사 카테고리 없음2017. 8. 3. 13:32

https://www.grandcanyonwest.com/ 에서 퍼옴




그랜드 캐년에 간 여행자들이 있었다.


그랜드 캐년을 제대로 보고 경험하고 배우고 싶어서,

그곳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여행사의 가이드들을 고용하기로 했다.


그 유명한 장관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그랜드 캐년 입구에 도착했다.

몇 년에 한 번 하는 소중한 여행이다.


여행사의 가이드들은 무척 숙련되어 보였다.

그랜드 캐년 가이드를 해 온지 수십년도 넘는다면서.

부르튼 손과 거친 발도 보여주고 무용담도 나누고 사진들도 보여주고...


여행자들은 무척 기뻐한다

그랜드 캐년을 제대로 경험해 볼 수 있겠다면서.

가이드들을 고용하길 잘했다고.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여행사 가이드들이 자신들의 여행사 역사를 장황하게 나눈다.

자신들의 여행 가이드 철학도 나눈다.

그러다가 갑자기 ceremony 를 하기 시작했다.  

가이드들 중 한 명이 그 일을 한지 20 년이 되었다고 그걸 기념해야 한다면서 기념패를 주고받고,

여행자들은 그 ceremony 를 지켜보며 박수를 쳐야 했다.


그랜드 캐년은요? 그랜드 캐년은 언제 보냐고요?


지루한 ceremony 가 끝난 후 드디어 하이킹을 시작하자,

가이드들은 어떤 trail 을 타야 한다는 걸로 다툰다. 자신에게 익숙한 trail 을 가자고 하는 이, 새로운 trail 을 개척해야 한다는 이.

또 다른 이슈들로도 다투기 시작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방법이 옳다면서. 

그러다가 갑자기 한 가이드가 외친다, "내가 그랜드 캐년의 산신령과 가장 가깝다. 나는 그를 잘 안다. 내 말을 들어야 한다!" 흠...

그러니까 또 다른 가이드가 소리친다. 자신이 그 산신령과 가장 가깝다고.

가이드 모두가 자신이 그렇다고 하며 웅성웅성대며, 여행은 뒤죽박죽 엉망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랜드 캐년을 제대로 구경할 수 있는 once in a lifetime opportunity 였는데... 

그랜드 캐년을 온전히 경험하기보다는,

그랜드 캐년 여행사의 악몽만을 안고 돌아왔다.


다음에는 다른 여행사를 이용하거나,

따로 리서치해서 self-guided tour 를 하든지 해야겠다. 



- 몇 년 전, 아이가 학교에서 참여했었던 연극 <캔터빌의 유령> (한 영국저택에서, 영국유령들과 그 저택으로 새로 이사온 미국인 가족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을 보면서, 위와 같은 satire 를 잠시 떠올렸었다.  그런데 어디서 들은 얘긴지 내가 생각해 낸 얘긴지 모르겠다. 뭘 풍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 그랜드 캐년이 보고 싶다. 아니, 그랜드 캐년이 꼭 아니더라도 자연 장관에 푹 잠기고 싶다....

:
Posted by pleasing2jc
2017. 8. 1. 16:10

Thirst, Living water, Holy Spirit 카테고리 없음2017. 8. 1. 16:10

최근 한 conference 에서 한 NT wright 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성령님에 관한 conference 였던 듯.

아... conference 에 간 건 아니고, 녹음된 설교들을 예약구입했었다.


요한복음 7 장, 19, 20 장 등을 다음과 같이 본 것이 기억에 남는다. (대충 기억나는 대로 써보자면)


요한복음 7:37-39 에 관해서

Jesus doesn't say, "Anyone who's thirsty, come to me. I will quench your thirst."

What Jesus meant was: When anyone who is thirsty comes to Jesus and drinks Him(?), out of THAT (thirsty) person's heart will flow the rivers of living water. 


그리고 요한복음 7 장과 요한복음 20 장을 연결시킨다.


요한복음 19:28 에서 십자가에 목박히신 예수님 본인께서 "I am thirsty" 라고 하시고.

The Cruxifiction 은  예수님께서 glorified 되는 시점 (John 7:39) 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20 장의 부활: New Creation 의 시작!!!



목마름을 생각할 때 개인의 목마름만을 생각하고 그것이 quench  되기만을 원할 게 아니라,

목마른 이들로 하여금 Rivers of Living water 의 채널이 되게 하심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living water 은 성령님이시고.



목마름...


=

:
Posted by pleasing2jc
2017. 7. 25. 13:57

Culture maps 카테고리 없음2017. 7. 25. 13:57

각나라의 leadership cultures map 은 다음과 같은 모양이 나온단다. 


hierarchical culture 이라고 리더만의 의견에 따라서 decision making 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일본의 경우처럼 위계질서가 강하더라도 공통의 의견에 따라서 decision making 이 되기도 한단다.

또 미국의 경우처럼 egalitarian 이더라도 공통의 의견보다는 리더의 의견에 따라서 decision making 이 되는 문화이기도 하고.

기사는 미국에서 일하는 한국사람의 예를 든다.






communicating, evaluating, persuading, leading, deciding, trusting, disagreeing, scheduling 등에도 각 문화에 따라 다른 culture map 을 만든 기사도 있다. 

http://www.businessinsider.com/the-culture-map-8-scales-for-work-2015-1



각국 출신 사람들과 함께 일할 때, 참고가 된다. 



이건 내 생각...
미국같은 경우 (내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서 볼 때..): 일부 hierarchical culture의 상하관계 속에서는 리더가 리더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의견에 무조건 '순종'한다. 그러나 미국과 같은  egalitarian culture 속에서는 모두 동등하지만, 맡고 있는 역할이 다를 뿐인데 (리더는 리더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고.) 리더의 전문성과 지식, 경험 등을  존중하기 때문에 그 리더의 의견을 따르는 것 아닌가 싶다. 그렇기에 리더의 의견이나 제안이 이해 안 될 경우, 질문해도 되고 나의 의견을 피력해도 된다. 그래도 그것이 '권위'에의 도전이 아니라, clarify 하고 improve 하기 위한 노력일 뿐이니까. 



:
Posted by pleasing2jc
2017. 7. 14. 16:40

엉뚱한 묵상(?) 카테고리 없음2017. 7. 14. 16:40

오늘 encounter with god 본문 창세기 25 장의 시작부분을 읽다가,

이전에는 간과했던 사실에 충격을 좀 받았다. 아브라함에게 후처와 첩과, 그들을 통한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는 것. 

아니, 뭐란 말인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아이들이 많았다니? 이삭과 이스마엘 두 명 뿐만이 아니었구나.


그럼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아들인 이삭의 정통성은 아브라함에게서 오는게 아니라 Sarah 에게서 오는 것 아닌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했던 에피소드에서, 독생자 예수님에 비교되는 이삭은 아브라함에겐 독생자가 아닌데, Sarah 에게만 독생자다. 흠.....


그러고 보니 야곱도 어머니인 리브가의 favoritism 으로 인해 이삭의 축복기도를 얻어냈고,

성령님으로 잉태된 예수님에겐 마리아의 염색체만 있다. (인간남자 의 염색체는 없다.)

그러고 보니, 유태인은 모계사회구나. 그건 예수님 시대 훨씬 이후부터 그렇게 된 거 라는 거 같다.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내용: 마가복음 10:29-30 에서 예수님의 말씀. 29 절에서 언급된 집, 형제 자매, 어머니, 아버지, 자녀, 땅 등 중 아버지와 아내는 30 절에 포함되어있지 않다. 아버지가 "deliberately"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만이 진정한 아버지이시기 떄문이라고 한다. 가부장제 중심 공동체가 아닌, 하나님께서 아버지되신 공동체를 칭한다고. (그리고 다른 데서 찾아본 내용 중, 아내가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아내는 한 명이지 예수님을 위해서 아내를 버린다고 해서, 아내를 백 명 돌려받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ㅎㅎ -- 아내라고 했지만 배우자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겠지. )


흠.. 가부장 족장 시대에 가부장 중심의 시각에서 쓰여진 구약 스토리라인에선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었지만...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며 스토리를 쓴다면 믿음의 진정한 조상은 Sarah 가 아니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예수님께서 여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다빈치 코드 비스무레할 수 있는 가설 ㅎㅎ....        fiction 소재인데...

(이 모든 주제에 대해서 이미 그런 가설들을 세워서 논문도 쓴 이들도 많으리라.)


안타깝게도 정절을 지키지 못하셨던 아브라함 할아버지.

그 믿음의 조상님 덕분에 엉뚱한 생각들을 해 봤다.


8/6/17 사라도 아브라함과 같은 언약의 주체라는 기사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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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조상이 Sarah 이건 Abraham 이건 뭐가 중요하랴?

예수님의 새언약, 성령으로 거듭남, 하나님의 신실하심, 등등등이 중요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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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