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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r Journey Together 전체 보기'에 해당되는 글 309

  1. 2017.07.07 forgiveness
  2. 2017.06.23 위대한 믿음의 조상? 위대한 하나님?
  3. 2017.06.23 Humility
  4. 2017.06.01 Romans 8?
  5. 2017.05.24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6. 2017.04.28 Rapturous amazement: a gateway to understanding
  7. 2017.03.22 individualism and collectivism
  8. 2017.03.20 웃프다
  9. 2017.02.13 릴케: 젊은 시인에게 충고
  10. 2017.02.10 출산지도?
2017. 7. 7. 15:22

forgiveness 카테고리 없음2017. 7. 7. 15:22

어떤 강의에서 "Forgiveness must name and shame the evil, and find an appropriate way of dealing with it, before reconciliation can happen."와 비슷한 인용하는 걸 듣고 정확한 표현이 뭘까 검색하다가 발견한 책의 단락. 


용서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어정쩡하게 덮어버리며 지나가고 잊으려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밑도 끝도 없이 분노하고 정죄하는 것도 아니다.


Naming, shaming the evil, and finding an appropriate way of dealing with it.

blame 은 하나 punish 는 하지 않고,

exclusion 의 단계가 embrace 의 단계에 선행되어야 하고,

무조건 잊는 것이 아니며,

시간이 걸리는 ongoing process.


A struggle to forgive someone is a voyage of anguish and discovery.



여기 인용된 G.K Chesterton 의 예화는 그 위에 설명된 용서와 어떻게 어울리는지 잘 모르겠다. 

G. K Chesterton 의 예화가 원글의 어떤 맥락으로 쓰였는지 찾아봐야 하겠지만....

(앗, 거장의 예화게 도전하다니.... 내가 잘못 이해했거나 틀릴 가능성이 크지만 막 떠오른대로 써보자면...)


예수님께서 인간을 또 세상을 용서하심의 결과는,

인간의 죄로 인한 고생 후, 창세기 원점 회복이 아니라 (에덴동산? 에의 복귀?)

그와 비교할 수 없는 훨씬 더 발전된 관계와 상태에의 회복이라고 믿는다.

New Heaven and New Earth.


그와 똑같이...


인간관계나 공동체나 나라나 사회 속에서의 용서도 그렇지 않을지?

A 와 B 의 관계로 얘기하자면,

A 와 B 사이의 관계라는 거 자체는 똑같지만,

그 이전과 같은 양상 관계로 돌아감이 아닌 

exclusion and embrace 의 과정을 겪어,

A 도 B 도 변화된, 새창조?되고 관계도 새창조된 새로운 관계에로의 회복 아닌지 모르겠다.


오랜시간 일하고 와서 집에서도 일하고, 생각하려니 머리가 아프다. 

다음에 찾아보던지 생각해 보자. 






The Parish Handbook by Bob Mayo



:
Posted by pleasing2jc

최근 사도행전의 스데반의 설교를 대충 읽은 적이 있다. (Scripture U 의 Encounter with God 진도에 따라 5 분 QT)

아브라함부터 솔로몬까지 쭈욱 훑고, 그 믿음의 조상이게 주어졌던 약속의 완성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의 죄를 지적하는.


QT 인 만큼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면,

아브라함부터 솔로몬까지 하나님께서 주도하시고 인도하시고 일하신 역사라는 거다. 

인간적 관점으로 볼 때 아브라함--야곱 등은 위대한 업적이 그다지 없는 듯 하지만, (아브라함 할아버지께 죄송한 말씀)

모세나 여호수아, 또 솔로몬 같은 이들은 인간적 관점으로 볼 때도 어떤 위인성이나 영웅성을 띈 대단한 인물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인간의 위인성과 영웅성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없고, 철저히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으로 말되어지고 있다는 거다. 

그리고 그 역사와 약속의 중심에 예수님께서 계시고.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의 죄를 지적한 마지막 부분이 그 설교의 포인트이겠지만)


구약도 읽다보면 (열심히 읽지는 않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아브라함부터 쭈-욱 훑는 단락이 매우 많다. 

아브라함 - 이삭 - 야곱 - 요셉 - 모세 등등등...

그런데 구약에서도,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등이 얼마나 위대했다는 얘기는 별로 없는 거 같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나님의 사랑, 일하심 등에 관한 얘기 뿐이지....


히브리서 11 장에 보면 믿음의 조상들의 '믿음'과 '믿음'으로 인한 순종/행위 등을 나열하지만, 

그들의 특별한 재능/은사/영웅성 등을 칭송하진 않는다. 


독교의 역사나 교회의 역사 들을 살펴볼때도,

믿음의 영웅들의 특별한 삶에 관해서 배우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그들을 왜 부르셨는가 어떤 목적으로 부르셨는가, 그들은 어떤 믿음을 어떻게 순종했는가 등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biography 등을 읽는 관점을 확실히 해야겠다.

예를 들면 한 때 좋아했던 CS Lewis 의 개인사 에피소드 몇 가지에 환상이 와장창 깨졌지만, 그 시대에 CS Lewis 를 부르시고 그의 재능 등을 쓰신 하나님의 목적이 있고... 등등 뭐 그런... 


문득 한 가지 에피소드가 기억난다. 

몇 년 전 이 근처에서 한 사역을 하고 있는 분과 잠시 인사할 기회가 있었다.

그 분은 이 지역에서 특별한 (흔하지 않은) 사역을 하고 계시는 분이다. 

 사역/간증 모임 중 하나였는데, 그 분의 간증/강의가 끝나고 모인 이들이 그 분과 인사하면서 그 분을 칭찬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나도 그 분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그 분에게 인사를 하며 'you are amazing' 이라는 의미로 "amazing" 이라고 말을 시작했다.

그런데 말을 시작하면서 확 드는 생각이, 사람을 칭찬하면 안될 거 같다는 거였다.

그래서 뒤에 바로 "God" 를 갖다붙였다. Amazing God... 

(모두가 그 분을 칭찬하는 분위기에서 그 분을 칭찬하지 않고 하나님만 높이는 내가 좀 건방져 보이진 않을까 쬐금 염려하며)

그 분은 잠시 멈칫하셨다. 그리고 눈에 눈물이 살짝  돌면서 무척 좋아하시며 반가워했다.... 그래서 그 분이 더 멋져 보이긴 했지만서두.


살다보면, 사람들을 칭찬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분들 배후에 있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더 크게 보고 싶다

그리고...

영웅/위인의 개인사, 일정 모임/교회 등의 역사보다는, 

태초부터 그리스도께서 중심된 역사가 더 크게 보이는 것이 좋고, 또 그렇게 볼 수 있는 시각을 가졌음 좋곘다.




:
Posted by pleasing2jc
2017. 6. 23. 14:14

Humility 카테고리 없음2017. 6. 23. 14:14


... it is not sin that humbles us most, but grace.



It is only by the indwelling of Christ in His divine humility that we become truly humble. 


From Humility by Andrew Murray




Addition:


If we think we are not all that bad, the idea of grace will never change us. 

Change comes by seeing a need for a Savior and getting one.

- Tim Keller

:
Posted by pleasing2jc
2017. 6. 1. 16:31

Romans 8? 카테고리 없음2017. 6. 1. 16:31

무지 납득할 수 없고 어울릴 수 없는, 깨어진 세상 속에서, 

태초부터 groaning 해 온 세상의 아픔을 온 몸으로 품고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평정을 유지하며 일상을 사는 것에도, 

현재 이 상황을 허락하신 그 분에의 순종과 믿음이 요구된다.

사랑을 위해서 지느러미를 버리고 두 다리를 가지게 된 인어공주가 걸을 때마다 살을 찔리는 고통을 느꼈던 거처럼,

이미 다른 영역에 속한 이들이 이 세상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그러한지 모르겠다.

눈을 돌리면 보이는 깨어진 세상, 아프고 고통받는 이들, 인간의 교만과 자랑, 어리석음, 거짓... 

이제는 나만 괜찮다고 또 우리만 괜찮다고 괜찮은 게 아니다. 


훌쩍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고,

나 혹은 우리만의 성 안에서 나와 우리만 행복하고 즐거울 수도 없고...


지금 여기서 인내하고 기도하며 기다리며.

.

.

.

거품이 되어버린 동화 속 인어공주와 달리,

고작 왕자랑 결혼하고 행복해 한 애니메이션 속 인어공주와 달리,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그를 믿는 자들은 "more than conquerors" 다.

그래서 more than conquerors 로서 인내하고 기도하며 기다린다. 


:
Posted by pleasing2jc

Matthew 6:25-33

25 “Therefore I tell you, do not worry about your life, what you will eat or what you will drink,[j] or about your body, what you will wear. Is not life more than food, and the body more than clothing? 26 Look at the birds of the air; they neither sow nor reap nor gather into barns, and yet your heavenly Father feeds them. Are you not of more value than they? 27 And can any of you by worrying add a single hour to your span of life?[k] 28 And why do you worry about clothing? Consider the lilies of the field, how they grow; they neither toil nor spin, 29 yet I tell you, even Solomon in all his glory was not clothed like one of these. 30 But if God so clothes the grass of the field, which is alive today and tomorrow is thrown into the oven, will he not much more clothe you—you of little faith? 31 Therefore do not worry, saying, ‘What will we eat?’ or ‘What will we drink?’ or ‘What will we wear?’ 32 For it is the Gentiles who strive for all these things; and indeed your heavenly Father knows that you need all these things. 33 But strive first for the kingdom of God[l] and his[m]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given to you as well.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의 질문이, 의식주 자체가 결핍되어있는 많은 이웃에겐 생존여부가 걸린 이슈이다. 흙탕물이라도 길으러 하루 몇 킬로씩 먼 길을 오가는 아이들, 전쟁터의 아이들, 난민들...
똑같은 질문이 어떤 이들에겐 내 입맛과 내 취향에 맞는 것을 고르는 질문이다. 무슨 커피? 버블티?를 마실까? 무슨 차를 탈까? 어떤 옷을 입을까? 등등
또 한편, 기질 상 그런 질문들 자체가 귀챦은 이들도 있다. 메뉴판 음식 고르는 것, 패션에 신경쓰는 것 등도 귀챦고, 때로는 먹는 것조차 귀챦은.  nerdy 한 이들일 수도 있고, 마크 저커버그 등처럼 옷고르는 시간조차 아까운 high profile 사람일 수도 있고, 무슨 소원이든 말하라는 알렉산더 대왕에게 햇빛을 가리지 말고 비켜달라던 디오게네스같은 쿨한 철학자일수도 있고. 흠.. 우울증에 걸린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서두. 

예수님께선, 삶이 어려운 군중들 - 그래서 뭘 먹고 마시고 입는것이 선택의 고민이 아닌 생존의 "걱정"인 이들에게 말씀하고 계신거 같다.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시니, 생존의 걱정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는 고민이, 생존이 걸린 문제라기보다는, 선택의 고민인 이들.
또 그런 질문들이 걸리적 거리고 귀챦은 이들은 위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의 질문에 생존이 걸리지 않은 이들이,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건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 본다. 그냥 검소한 차 타고, 검소한 옷 입고, 그렇게 하면 되는건가? 어떤 기준을 정해서 어떤 차 이상은 타지 말고 고가의 음식은 먹지 말고 뭐 그러면 되는건가? 그건 옛 유교선비들의 청렴결백과 어떻게 다른 걸까? 혹은 가능한 한 작은 욕망을 가지자는 것이 표어였다는 디오게네스와 같은 철학과는 뭐가 다른 걸까? 모든 세상의 흐름에 무조건 반대로 가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건 아닌거 같고...

그보다는 좀 더 깊은 무언가가 있어야 할텐데.
그냥 어설프게 드는 생각은: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알고 그만을 신뢰하는 것일 거고...
그런 가운데 나의 죄성과 연약함을 알고 유혹과 우상이 될 수 있는 것들을 멀리 하는 것일 것이고,
또 더 나아가 어려운 이웃들과 나누는 것. 예를 들면 식수가 없어서 흙탕물을 길르러 몇 킬로씩 걸어다니는 이웃들에게 마실 물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  작게나마라도... 그를 통해 일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의식주의 문제가 절실한 생존의 문제가 되는 이들과 작게나마 연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큰 그림 속에서는 오병이어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지... 그들의 생존의 문제가 나의 생존의 문제가 되고 함꼐 고민하는 가운데, 함께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거기까지가 현재까지의 어설픈 understanding 이다. 그렇지만 온전히 내것으로 하기 어렵게 느껴지는.
(더 깊게 생각하고 길게 쓸 시간도 없고...)


====
오래 된 차의 엔진에 약간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어서 지켜보자는 말에, 차를 몇 개월 내로 새로 구입해야 할 듯 한데.
너무나도 많은 옵션 중 선택하고 구입하는 과정 자체가 귀챦아서.... 이런 저런 고민을 해 보며 한 생각이다.


:
Posted by pleasing2jc



 "The Big Question: Why We Can’t Stop Talking About Science, Faith and God" by AlisterMcGrath 시작부분.

  이 단락 자체에 amazed 되었다~ 캬....


:
Posted by pleasing2jc
2017. 3. 22. 15:58

individualism and collectivism 카테고리 없음2017. 3. 22. 15:58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민주주의.

그런 민주주의가 멋지게 회복되고 있는 것을 멀리서나마 지켜보면서 뒤죽박죽 많은 생각과 질문들을 하게 된다.


아주 오래전 어디선가, 교회나 기독교 신앙은 민주주의가 아니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인간 개개인의 autonomy 나 권리보다는,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림이 우선된다는 뜻이었겠지.  NT Wright 말처럼 theoracy 라는.

하나님께서 주권을 가지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 민주주의가 아닌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 다수의 의견이 하나님의 뜻도 아닐테고.


그런데 그런 하나님 나라는 실제 공동체나  교회 등 속에서 어떻게 실천? implement 되는가 하는 질문을 가지게 된다.

보이시지 않으시는 하나님, 성경은 있으나 실제 음성은 (audibly) 들리시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통치하고 계신가? (성령님을 통해서이지만) 아무래도 사람들을 통해서이다. 


그런 질문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아무래도 기독교 역사 속에서 교회 '권력'이 일부 리더에게 집중되는 일들도 많았고, 교회구성원을 교회나 공동체의 부속품처럼 보는 전체주의/집단주의 도 있어왔으니 말이다. 


뒤죽박죽된 a myriad of questions 중, 내 핵심 질문은 기독교는 (성경은) individualism 과 collectivism 에 대해서 어떻게 얘기하는가? 로 refine 되는 듯 하다. 


개인과 공동체를 어떻게 보는가가 공동체의 집합적 이익과 개인의 권리 등이 대립될 경우 어떤 결정을 내리는가 도움이 될 듯 하기에도 그렇다. 실제 살아가는데 필요한 답인거 같다. 


(위에 언급한 민주주의는 individualism 과 collectivism 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하는 건 또 다른 질문일테고 그에 관한 논문들도 많을테고...)


기독교가 individualim 과 collectivism 에 대해서 어떻게 얘기하는가 하는  질문은  구원 자체가 개인구원인가? 공동체 구원인가? 하는 질문으로도 연결될 수 있는 듯 하고.


게다가, 한국은 지난 수십여년간 급변해온 역사 속에 봉건주의, 전체주의, 개인주의가 뒤섞여있고, 그런 한국에서 또 다른 문화의 나라로 이주한 이들에게 더더욱 그러하다. 아무래도 전통적으로 동양은 collectivism 이 지배해 왔고, 서양은 individualism 이 더 발달해왔고. 스스로의 삶 속에서 각각의 요소들을 sort out 하고 생각해 보는 작업이 필요한 듯도 한다.


글쎄.. 아직도 질문들이 완전히 refine 되지 않았고, 질문의 scope 가 어떠해야 하는지, 용어나 개념들의 정의도 완전히 잘 모르겠고 아직은 뒤죽박죽이다~


그래도 여기저기 찾아보니 여러 자료들이 있고 도움이 되고 있다.

영어자료보다,  한국 글이나 책들이 훨씬 더 많은 것도 흥미롭네. 잘 읽어봐야겠다.


====

search 결과:


(1) "묻고 답하다: 강영안, 양희송 2 박 3 일의 대화" 의 6 - 10 장에서  위의 질문을 직접적으로 다룬다.  Great!

(2) Reinterpreting individualism and collectivism. Their religious roots and monologic versus dialogic person-other relationship. by Sampson EE ( 2000 Dec;55(12):1425-32) 은  rabbinic tradition (아마도 1 세기 유대주의 시각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에서의 individualism 과 collectivism 을 다루고 있어 흥미롭다.

기타등등


:
Posted by pleasing2jc
2017. 3. 20. 02:24

웃프다 카테고리 없음2017. 3. 20. 02:24


:
Posted by pleasing2jc
2017. 2. 13. 15:35

릴케: 젊은 시인에게 충고 카테고리 없음2017. 2. 13. 15:35

젊은 시인에게 주는 충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마음속의 풀리지 않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

인내를 가지라.

문제 그 자체를 사랑하라.

지금 당장 해답을 얻으려 하지 말라.

그건 지금 당장 주어질 순 없으니까.

중요한 건

모든 것을 살아 보는 일이다.

지금 그 문제들을 살라.

그러면 언젠가 먼 미래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삶이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 줄 테니까.



삶과 세상의 많은 문제들, 현상들, 사람들, 또는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서 쉽게 결론을 내리는 태도에 대해서 생각하던 중 마주친 시.  당장 결론을 내리려는 태도, 또 많은 것에 대해서, 사람들과 하나님에 대해서 쉽게 평가하고 단정하는 태도 또한 reductionism 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릴케가 시인 지망생에게 했다는 충고이라지만, 시쓰기/감상에 큰 관심이 없는 이에게도 참고가 된다. 


다음의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말 또한 떠오른다. 신앙은 답을 모른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 이라..


"나는 기독교 신학자다. 사람들은 내가 그런 질문에 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른다. (중략) 그러나 내가 볼 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답 없이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이렇게 사는 법을 배울 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너무나 멋진 일이 된다. 신앙은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위의 인용문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본다.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간다고 해서, 문제를 회피하고 내버려두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거 같다. 인생과 신앙의 문제들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struggle 하면서, 어설픈 결론을 내리려 하지 않고 인내를 가지며 나아가는 것. 어설픈 결론을 진리인 양 설파해서는 더더욱 아니되고. 어쩌다가 얻게 되는 답조차 하나님의 지혜에 못이르는 불완전한 결론일 지 모른다는 여지를 항상 남겨두고 열린 맘과 자세를 유지하는 것.


많은 경우, 해답은 커녕 질문조차 정확히 뭔지 모르고 헤매이고 고뇌할 때가 더 많은 거 같다.

 

기의 온갖 질문들과 어설픈 답들 끝 마지막 부분,  욥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질문들에 해답은 안 주시고 다른 말씀들을 하시며 (우문현답?)  모습을 드러내신 하나님이 문득 떠오른다. 그런  하나님을 마주하고 신뢰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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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
2017. 2. 10. 10:52

출산지도? 카테고리 없음2017. 2. 10. 10:52

출산지도를 다시 그려보았다는 오늘 신문기사

정부의 출산장려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기 위한 환경이 잘 안 되어 있다는 것이 기사의 결론이다.


작년 말, 가임여성 인구수 지도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분노했지만 나 또한 그러했었다.


옛날은 족보/계보나 농경사회 노동력  위한 출산의 의무를 여성들에게 명령하고 강요하는 전근대적 사회였다면,

(또 여전히 그러한 면이 남아있기도 하고), 

지금의 출산장려는 국가 생산력/경쟁력을 위한 것인 듯 하다.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는 환경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데,

앞뒤 안 가리는 출산장려/요구만 한다면, 

여성만을 애 낳는 기계나 가축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 더 나아가 모든 사람들을  가축취급하고 objectify 하는 사고방식이다.


상식을 가진 이들이라면 대부분 위와 같이 생각할 것이다.

인간 존엄성과 권리가 무시된 상태에서 출산의 의무를 요구당한 경험이 조금이라도 있는 여성들 뿐만 아니라.

(인종차별을 받아보지 않은 이들 또한 인종차별에 대해서 분노하는것이 상식인거처럼)


"사랑에 정복당할 시간도 없는 희한한 시대"에서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3 포 를 넘어선 7 포, 8 포세대라는 젊은이들이,

어떤 목적을 위해서 출산하라는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서,

사랑하기에 또 사랑하기 위해서 아이를 낳을 수 있고 잘 키울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이상적일텐데...

그런 환경에서 아이들도 사랑받고 존중받으며, 인간답게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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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