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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2. 10. 15:30

이상과 현실 카테고리 없음2022. 2. 10. 15:30

요즘 보고 있는 시트콤이다. 주말마다 하는걸 본다.


인터넷에 소개된 개요는 다음과 같다.

1도 슬기롭지 못한 초짜 개원의의 ‘웃픈’ 현실을 그려낸 메디컬 코미디로,
진정한 의사를 꿈꿨으나 오늘도 파리 날리는 진료실에서 의술과 상술 사이를 고민하는 박원장의 적자탈출 생존기

안그래도 인기 많았던 드라마 <슬기로운 ㅇ사생활> 속 의사들과 병원이 판타지인가 아닌가 의견이 분분했덨 듯 싶은데, 이 시트콤은 의료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과장되게???) 그린 시트콤이라 할 수 있다. 극중 개원의들이 자신들이 장사하는 거라고 하고, 환자들을 손님이라 칭하는 드라마 속 설정이 과연 어디까지 현실적인가 궁금하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실수로라도 환자들을 client (손님)이라고 칭하는 것에 질색하는 편이다. 그건 언젠가 읽은 The Gift of Pain 의 다음글같은 이유 떄문이기도 하다.

We don't talk much about patients here; we talk about 'syndromes' and 'enzyme failure.' They encourage us to use the word 'client' rather than 'patient,' which implies that we're selling services rather than ministering to persons....but I haven't had single class session on bedside manner. After a while, it's easy to forget that the 'product' we're dealing with is a human being... The current biomedical approach, which narrows the focus from the patient to the disease itself, has taught us much about hostile organisms, but at the risk of devaluing the patient's own contributions...
(p242 The Gift of Pain by Dr. Paul Brand anand Philip Yancey.)

환자를 client 라고 부르는건, biomedical 혹은 engineering 적 approach 로 질병을 고치는 데 초점을 둔 서비스장사 같다는 거다. 환자를 client 가 아닌 patient 라고 부르는게 오히려 그들을 persons 로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minister 하는 걸 의미한다는거다.
위글에서는 그 당시 bedside manner 를 가르치는 클라스가 없었다고 했는데, 내가 학교를 다닐 때 우리 학교에는 patient-doctor I 이라고 해서 의사와 환자 사이의 rapport 을 buildup 하는 걸 가르치는 클라스가 있었다. 그 클라스에서도 의학의 biomedical/biochemcial 측면에만 집중하지 말라고 했었다. (그걸 얼마나 지금 잘 실천하고 있는가 하는건 매일매일의 도전이다.)

친지 어른들 중에 개원의들도 많으셨는데, 그 분들은 개업의들의 heyday 시대에 병원을 하셨다고 볼 수 있기에 시트콤 속처럼만큼 아둥바둥 병원운영을 하시지는 않으셨던듯 싶다. 병원운영에 재테크까지 잘 하신 분들의 자손들은 몇 대가 금수저이기도 하다. 3+ 대째 의사가족도 있고 한 가족이 다 MD 인 집도 있다. 그 친지 어른들이 환자들을 치료하는걸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내가 어린시절부터 가지고 있는 이상적 의사의 모습은 슈바이처나 나이팅게일에 가까웠다 (나이팅게일은 간호사였지만). 혹은 <슬기로운 ㅇ사 생활> 의 등장인물들 같은 이들.

그러나 현실 속에서 만난 의사들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최악의 의사는 자신의 병원을 찾아온 타지방 사람들을 "야만"스럽다고 하거나, 건강에 대해 질문하는 이에게 '건강염려증'이 있다고 빈정대는 이였다. 내게 하는 말은 아니었고 그 의사가 사석에서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런 일을 겪고 보니, 일부 내시경실/수술실에서 의료인들이 환자들에게 저질렀다는 언행에 관한 신문기사들도 당연하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환자들에 대해서 무례한 태도를 가진 이들이 있는데, 위의 시트콤처럼 차라리 '손님'으로 대하는건 훨씬 낫다.

또 현실을 살아가면서 의학/치의학의 business aspect 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도 많이 깨닫는다. 심지어는 교회나 non-profit 단체들도 business aspect 가 중요한데, 병원/의원들이 안 그러하겠는가?

그렇기에 시트콤 속 등장인물들의 고군분투하는 삶을 그저 웃어넘길 수는 없는거 같다.
또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할듯.

--------------

오늘 치료한 환자 한 분이 정신적, 육체적 질병이 있어서 그 질병으로 인해 치과치료가 너무 힘들었다. 치아자체도 아주 어려운 anatomy 였고. 얼마 전 비슷한 분을 치료했는데 그 때는 괜찮았는데 오늘은 내 멘탈 컨트롤이 살짝 삐긋했다. 겉으로는 잘 안 보였을지 모르지만 속으로 온갖 짜증을 내고 있던 나. 그 치료가 끝나고 나가시는 그 분을 보면서 가슴이 찡하고 넘 미안한 맘이 들었다 (치료 중간에 코골며 주무시기는 하시더라) 담에 뵈면 잘 해 드려야지.  요즘 좀 더 confident   했던 면이 없지 않은데 여러모로  humbling experience였다. 사람을... 사람을 치료한다는 것. whole person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자..

:
Posted by pleasing2jc
2022. 2. 7. 15:45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카테고리 없음2022. 2. 7. 15:45

보스턴에 살던 시절, 하ㅂ드 스퀘어 근처의 아파트 (off-campus housing) 에 산 적이 있다.
하ㅂ드 스퀘어를 지나칠 때면, 땅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정신없이 주워먹고 있는 참새들의 자유로움을 한없이 부러워하던 때가 있었다.
그렇다고 그 때 밥을 굶어야 해서 배가 고픈 시절은 절대로 아니었다. 배가 고프긴 커녕 오히려 다이어트에 신경 쓰던 시절이고, 아파트에 가면 날 돌봐주시러 오신 어머니께서 맛있는 집밥을 해 주시던 시절인데도 맘편하게 학업에 집중할 수 없이, 미래에의 불안감에 몸과 마음이 마비된듯 했었다.
교회생활로 인해 깨진 밸런스로 학업의 위기를 겪은 인생의 첫 좌절 후라서 더 그래했는지도 모르겠다.

https://www.tripadvisor.com/Attraction_Review-g60890-d102693-Reviews-Harvard_Square-Cambridge_Massachusetts.html 에서 퍼옴


마태복음 6: 25- 34 을 수없이 반복해서 읽었으나 염려는 멈출 수가 없었다. 미래에의 걱정과 부담감에 짛눌러서... 정말 심각했다.
그 당시의 내가 생각할 수 있는 하나님나라와 의는, 소위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하는 것 뿐이었다. 부모님께서 반대 하시는데도 교회생활을 지나치게 열심히 했다. 어느 순간 부모님께서 경제적 support을 끊으신 적도 있다. 나름 고심해서 결론낸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했는데, 먹고 마시는 길도 막힌 웃픈 상황을 마주쳤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미련하게 믿음생활을 하면서도 그게 옳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면서도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더하시리라는 '그 모든 것' 아니 좀 더 많은 것에의 욕심이 없다고 할 수 없는 모순을 살았다.
.
.
긴 세월이 흘러서...
이제는 길 위의 참새를 부러워하기는 커녕, 참새들에게 신경도 잘 안 쓴다.
앞 글의 팔자좋은 소나 개도 안 부럽다. 그들의 삶이 심심하진 않을까 한다. 차라리 자신의 의지로 (본능을 따라) 자유롭게 일하는 비버가 좋다. - 마태복음 6:25-34 에 비버를 끼어넣을 수는 없을까?
미래에의 불확실성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이라는 건 알고 있으나, 대학 시절처럼 미래에의 걱정과 염려로 몸과 마음이 마비될 정도는 아니다.
만약 "이 모든 것" 이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라면, 그 문제가 이전보다는 더 충족된 지금 읽는 마태복음 6:25-34 말씀은 더 비장해야 하는것 아닌가 한다.
이전에는 인간 본성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더해지는 것들"에의 어느정도의 사심이 섞여있었다면
현재 이 passage 를 읽을 때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에 온전히 집중해야 할텐데...
지금 이 stage 에서 구하길 원하시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뭘까? 잘 모르겠다.
지난 시간들, 인생의 고비마다 홍해를 건너는 모세와 여리고성 포함 가나안 땅 전투를 치루는 여호수아, 이스라엘백성들을 떠올리며 열심히 기도하곤 했었다.
지금은 그 시절보다 더 간절한 맘으로, 홍해를 건너고 여리고성을 돌듯 또 아이성 전투 아간같은 욕심은 철저히 경계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구하며 그가 원하시는 그의 나라와 그의 뚯이 무언인가 정말 하나님의 답을 구해야 하는 때인듯 하다.
어린 시절처럼 제한되고 모순된 세계관/신앙관에서 성급히 결론지어진 그의 나라와 그의 뜻이 아닌 , 진정으로 그가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매일매일 절실히 구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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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
2022. 2. 6. 09:51

열심히 일하는 동물 카테고리 없음2022. 2. 6. 09:51

아이아빠는 열심히 일하는걸 " 개처럼 일한다," 라고 말한다.
개가 일을 한다면 북극 썰매를 끄는 허스키들이나 광활한 초원에서 양이나 소를 모는 세퍼드, cattle dog 들일텐데, 우리가 성장한 한국에는 그런 개들은 많지 않았을거다. 어디서 그런 표현이 나왔는지? 여기저기 '개'를 갖다붙어 의미를 강조하는 신조어 표현인가 했다. '개꿀잼', '개이득' 같은 종류의 표현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아마도 "work like a dog" 라는 영어표현을 직역해서 쓰나보다.

내게 더 익숙한 표현은 개보다는 "'소'처럼 열심히 일한다" 다.  소띠라서 그 표현에 더 주의를 기울였던 듯 싶다.

근데 곰곰 생각해 보니, 오늘날에는 개도 소도 열심히 일하는 비유로 들기에는 부적합하다.
오늘날 많은 반려견들은 집안의 어린아이와 같은 대우를 받고 있고, 주인을 잘 만나면 '개팔자가 상팔자'라는 말이 참 맞다. 세계의 대부분의 소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 있는지도 모르겠으나, 옛날처럼 쟁기질을 하는 소들은 별로 없을 거 같다. 프리웨이를 지날 때 보이는 캘리포니아의 어떤 소들은 팔자가 정말 좋다. 넓은 초원을 하루종일 풀 뜯어먹으며 거닐며 논다 (태양볕이 뜨겁고 많이 지루하기는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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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리포니아 소 - 인터넷에서 퍼옴


그럼 동물들 중에 일을 열심히 하는 동물은 뭔가 떠올려보니.... 역시 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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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아이아아빠와 내가 다닌 학교의 마스코트가 비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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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개도 소도 아니었다. 열심히 일하는 건, 비버처럼 일하는 거였다. 

 D*** 비버.  아, Dam 비버 라고 쓴거다.

 오래 전 한국 방송에 나온 비버. - 귀엽네.  

오래 전 한국 방송에 나온 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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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