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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r Journey Together 전체 보기'에 해당되는 글 309

  1. 2020.02.09 Waiting expectantly for
  2. 2020.02.03 The Two Popes
  3. 2020.01.27 Longing for Revival
  4. 2020.01.01 2020 Royal Priesthood
  5. 2019.12.24 Christ - the sole Mediator in All relationships
  6. 2019.12.24 칠천 인
  7. 2019.12.02 God, Neighbor, Empire
  8. 2019.11.28 Thanksgiving
  9. 2019.11.22 ㄷ백꽃 필 무렵
  10. 2019.11.11 피아노 이모
2020. 2. 9. 03:49

Waiting expectantly for 카테고리 없음2020. 2. 9. 03:49

1. 국민학교 5-6 학년 교회 수련회에서 마태복음 25: 1-13  에 관한 극기훈련 (혹은 상황극?) 을 한 적이 있다.  등불 기름을 준비하고 신랑을 기라려야 했던 처녀들 비유처럼, 밤늦게까지 자지 않고 불시에 오실 예수님을 기다려야 했다. 물론 모든 아이들은 안 잤고, 한두시간 후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announcement 가 나왔고, 아이들은 부리나케 방에서 뛰쳐나가서 '예수님'을 맞이하러 갔다. 그런데 그 커트라인이 많이 높았던게, 나는 풀러진 신발끈을 묶느라고 몇 초 더 늦었을 뿐인데, 내가 거기 도착했을 때는 '문이 닫혀버렸었다.' 

그게 뭐라고 많이 속상해서 합격못한 친구들과 투덜거렸던게 기억난다, "잠이 들어서 못 일어난것도 아니고 신발끈 묶는라 몇 초 늦었는데 그것도 안 봐주냐?" 등등.  또 친구들에게 얘기는 안 했겠지만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당첨?된) 누구누구보다 더 모범생이고 공부도 잘 하고 선생님 부모님 말씀도 잘 듣는 착한 아이니까 실제로 이런 일이 있으면 천국에 꼭 갈 수 있을거야."

별 것 아닌 어린 시절 극기훈련인 거 같지만, 몇 년 후 대학생이 되어 예수님을 영접할 때 위의 경험이 기억났다. 3 대째 모태신앙으로 대학생이 될 때까지 교회는 계속 다녔으면서  은혜와 구원이 뭔지 전혀 모르고 있었고, 선행과 자기의가 신앙이라고 생각했었다는 걸 꺠달았다.  대학생이 되어서야 예수님의 은혜에  눈을 떠가기 시작했다. 아직 긴 여정 중이다. 


2. 작년 말 QT 말씀 본문에 다시  열처녀의 비유가 나왔다. 준비하고 깨어있는 삶에 대해서도 묵상했지만,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곰곰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졌다. 

3. 그리고 또 다른 QT 본문에서 하나님꼐서 솔로몬에게 한 가지 소원을 묻는 장면이 나왔다. 내가 솔로몬이라면 뭘 구할까 스스로에게 질문해봤다.

4. 심사숙고 후에 내린 결론은, 깨어서 기다려야 하는 한가지 소원은 "예수님 빨리 오세요," 여야 하지 않을까 였다. (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이 땅에 임하는 날,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한 그 날. 

----  흠.. 출제자가(하나님께서) 원하는 '정답'은 뭘까 고려한 답이라고 할 수도 있다. 

5. 어찌 보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이래 (대학생 시절 이래) 그 날을 기다리며 살아온거나 마찬가지다. 모든 크리스챤들이 그러하리라.

6.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난리라는 뉴스에 대해서, 일터의 한 라티노 계열 사람이 "God is coming" 농담한다, 그러니까 마침 옆을 지나가던 중동계 사람이 "ooo (야), STOP preaching in front of the patients" 라 받아친다. 그 상황이 웃겨서 한참 웃었는데, 그처럼 기독교에서 예수님(하나님)께서 언젠가 다시 오신다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세계관이다.

7. 물론 2000 년 전 예수님께서 already 의 세계를 여셨지만 not yet 의 삶을 살아가면서, 기다림과 인내는 크리스챤 삶의 자연스런 모드다. 



8. 어떤 기다림인가?

9. 1996 년인가 1997 년인가, 보스턴에서 다니던 한인교회에 한참 새벽기도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을 때, 새로 부임하신  청년부 목사님께서 누가복음 2 장의 시므온 (Simeon) 과 안나 (Anna) 에 관한 설교를 하셨었다. 그 전까지 크게 주목하지 못했던 인물들인데, 한 설교를 다 할당해서 그들을 조명하시니 신선해서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 중 안나라는 인물의 삶이 특이하게 느껴졌다. 긴 세월동안 성전을 떠나지도 않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예배하던 인물. 그렇게 기다린 끝에 아기 예수님을 만난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

10. 누가복음 2 장의 본문을 영어 the message 로 보면:

In Jerusalem at the time, there was a man, Simeon by name, a good man, a man who lived in the prayerful expectancy of help for Israel.....

 At the very time Simeon was praying, she showed up, broke into an anthem of praise to God, and talked about the child to all who were waiting expectantly for the freeing of Jerusalem.


Prayerful expectancy  그리고 waiting expectantly, 즉 expectancy 라는 표현을 쓴다. 


11. Expectancy 는 좀 낯선 표현이다. 평소 expectancy 라는 말은 잘 안 쓰고 expectation 을 더 많이 쓰는데 한국어로는 둘 다 "기대"라고 번역된다.  그 두 단어의 차이에 대해서 <Longing for Revival> 책에 자세히 설명되어져있다. 책 본문을 옮겨오면:


Expectaions demand a certain result; expectancy trusts and hopes. Expectations create anger and disillusionment in our faith when they aren't met; expectancy is an openness to any outcome God desires. Expectations force God into a box to act as we want; expectancy allows God to be God in our lives, acting on his own will. Broken expectations, on their own, lead us to despair; expectancy takes our broken expectations back to God to rebuild our faith. The crisis gives us an opportunity to relinquish our expectations so that expectancy can grown in our soul.  (p53, Longing for Revival) 


러니까 인간이 원하는 모습의 것들을 기대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긴 모습이라 할 수 있겠지. 책에서 "Surrender is the essential posture (p54)" 라 한다. 


12. waiting expectantly  의 모습의 근본은 하나님께 surrender 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인간이 그리는 예수님의 재림이던, revival 이건 무엇이든지간에의 expectation 을 버리고 하나님의 것들을 기다리는 것인가보다.

기다림의 자세는 waiting expectantly/surrender 가 근본 foundation 이지만 그 기다림이 manifested 되는 모양은 여러가지다. Anna 처럼 성전에서 기도/예배/금식하며 기다릴 수도 있고 히브리서 11-12 장의 믿음의 조상들의 모습일 수도 있고 사도바울이나 히브리서 12;1-2 장처럼 믿음의 경주를 뛰는 전투적 모습일 수도 있을테고.



13. 큰 천재지변이나 큰 사건들이 있을 때마다, 위의 라티노 계열 coworker 처럼, 말세라고 또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농담(?) 하기도 하지만 에수님께서 언제 다시 오실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앞으로 천년후가 될지 만년후가 될지 언젠가 될지 기약이 없다. 

14. 그런 가운데 <Longing for Revival> 에서 revival 을 longing 하는거처럼, 갈망하게 되는 것은 "메마른 땅에 단비와 같은 은혜" 일텐데...  <Longing for Revival> 에서는 "breakthrough" 라는 표현을 쓴다.  (outpouring (of) grace, ourpouring (of the) Holy spirit, 부흥, breakthrough, 하나님의 임재, 기타등등 결국 다 같은 현상? 을 다르게 표현하는 것 아닐까? )

 

15. "단비와 같은 은혜" 조차 expectation 이 아닌지. 메마른 은혜도 있는거 아닌지 --  십자가를 치열하고 잔인하고 아픈 은혜라 할 수 있을까?

16. 또한 2000 년 전 오신 예수님도 그 시대 사람들이 기대 (expectation) 하던 메시야의 모습이 전혀 아니었지...


16. 결국 집중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실 것들에 대해서 expectation 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인내하며 기다리며 깨어있어야 하는 거구나.  열처녀 비유에서처럼. 

17. 그런데 지금 곰곰 생각해 보니, 2000 년 전 이미 오셔서 새 세상을 여신 예수님도 깊이 알지 못하면서 더 "큰" 것만을 바라는 거 아닌가 자각한다

18. <Longing for Revival> 에 2000 년 전 오신 예수님에 대해 써 놓은 다음 문장이, 거의 1 주일간 내 존재 안에서 resonate 했었다.

Heaven broke through (p33) 

헉.. 


19. 그래, 물론 앞으로의 은혜들도 약속된 것들이고 믿는 자로서 마땅히 expectantly 기다려야 하지만, 이미 부어주신 엄첨난 은혜를 제대로 깨달아가는 것도 어마어마한 복 (heavenly blessing) 이구나 깨닫는다. 

20. 그걸 제대로 깨달아가는 여정이 breakthrough 의 나날인지도 모르겠다.

.

.

.


21. 조금은 지치는 일상을 살아가며 이렇게 waiting expectantly for 하려고 하루하루 struggle 하고 있다. 

(Hope is a fuction of struggle - Brene Brown, Daring Greatly - cited in <Longing for revival>, p 35)

:
Posted by pleasing2jc
2020. 2. 3. 12:33

The Two Popes 카테고리 없음2020. 2. 3. 12:33



Two Thumbs up.


왼쪽이 공식 포스터.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이미지 중 오른쪽 장면이 맘에 든다. 

영화의 줄거리가  fiction 이라는 사실이 무척 아쉬웠다. 


영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라틴어, 약간의 독일어가 뒤섞여서 나온다.

자막이 꼭 필요하다.



:
Posted by pleasing2jc
2020. 1. 27. 14:55

Longing for Revival 카테고리 없음2020. 1. 27. 14:55






지난 7 월 pre-order 해서 올해 받은 책. 

부흥/Revival 에 관한 책은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 책이 대표적인데, 아무래도 그 분의 책은 그 시대 스타일이고 ,이 책은 오늘날의 문체와 구성이다. 

그래도 두 책이 말하는 부흥의 기본적 특성들은 일치하겠지.


저자 중 한명 (J. Choung) 이 한국계다 보니, 평양대부흥 등의 역사를 소개한다. (선대 어른들이 그 부흥의 영향을 받아서 교회도 세우고 했다고) 

부흥기도와 부흥회가 끊임없던 미국 한인교회에서 성장하면서 부흥에 대해서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던 저자가  시각을 바꾸게 되었다는 것도  흥미롭다. 


지금을 굳이 오른 쪽 도표에 끼어맞추자면 어디쯤일까 생각케 된다. 

:
Posted by pleasing2jc
2020. 1. 1. 17:01

2020 Royal Priesthood 카테고리 없음2020. 1. 1. 17:01

2020 년의 내 키워드는 Royal Priesthood 로 정했다.  


밑에 옮긴  1 Peter 2: 9 에 royal priesthood 라는 것만 쏙 뺴놓기에는, verse 전체가 주옥같은 하나님 말씀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올해의  journey 에서 맞닥뜨릴 것들이 단어 하나나 성경 한 구절 한정되지는 않으리라. 

(그 외 소소한 개인적 resolution 들은 몇 있긴 하다. 예를 들면 spanish 배우기 등등)


1 Peter 2:9 English Standard Version (ESV)

But you are a chosen race, a royal priesthood, a holy nation, a people for his own possession, that you may proclaim the excellencies of him who called you out of darkness into his marvelous light.


A new way of being human (<= The Day the Revolution Began 책에서 쓰인 phrase)

The biblical vision of what it means to be human, the "royal priesthood" vocation, is more multidimensional than either of the regular alternatives. To reflect the divine image means standing between heaven and earth, even in the present time, adoring the Creator and bringing his purposes into reality on earth, ahead of the time when God completes the task and makes all things new. The "royal priesthood" is the company of rescued humans who, being part of "earth," worship the God of heaven and are thereby equipped, with the breath of heaven in their renewed lungs, to work for his kingdom on earth. The revolution of the cross sets us free to be in-between people, caught up in the rhythm of worship and mission.  (p363 The Day the Revolution began by NT Wright)



지금까지 들은 설교들

Real Friendship and the Pleading Priest 

왕같은 제사장의 특권 

하나님의 형상과 다스림 


:
Posted by pleasing2jc


“[Jesus] stands between us and God, and for that very reason he stands between us and all other men and things. He is the Mediator, not only between God and man, but between man and man, between man and reality. Since the whole world was created through him and unto him (John 1:3; 1st Cor. 8:6; Heb. 1:2), he is the sole Mediator in the world...

The call of Jesus teaches us that our relation to the world has been built on an illusion. All the time we thought we had enjoyed a direct relation with men and things. This is what had hindered us from faith and obedience. Now we learn that in the most intimate relationships of life, in our kinship with father and mother, bothers and sisters, in married love, and in our duty to the community, direct relationships are impossible. Since the coming of Christ, his followers have no more immediate realities of their own, not in their family relationships nor in the ties with their nation nor in the relationships formed in the process of living. Between father and son, husband and wife, the individual and the nation, stands Christ the Mediator, whether they are able to recognize him or not. We cannot establish direct contact outside ourselves except through him, through his word, and through our following of him. To think otherwise is to deceive ourselves.

But since we are bound to abhor any deception which hides the truth from our sight, we must of necessity repudiate any direct relationship with the things of this world--and that for the sake of Christ. Wherever a group, be it large or small, prevents us from standing alone before Christ, wherever such a group raises a claim of immediacy it must be hated for the sake of Christ. For every immediacy, whether we realize it or not, means hatred of Christ, and this is especially true where such relationships claim the sanctions of Christian principles.,,

There is no way from one person to another. However loving and sympathetic we try to be, however sound our psychology, however frank and open our behavior, we cannot penetrate the incognito of the other man, for there are no direct relationships, not even between soul and soul. Christ stands between us, and we can only get into touch with our neighbors through him. That is why intercession is the most promising way to reach our neighbors, and corporate prayer, offered in the name of Christ, the purest form of fellowship.”


― Dietrich Bonhoeffer, The Cost of Discipleship (Discipleship and the individual 챕터 에서)


<God, Neighbor, Empire> 책에서 설명된 관계성 (relationality) 의 하나님과, 드라마 <ㄷ백꽃 필 무렵> 에 나오는 마을에 대해서 이리저리 생각해보다가 떠 올리게 된 본훼퍼의 글. 


예수님께서 모든 관계의 mediator 가 되신다는 것.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인간들 사이에서, 인간과 reality 사이에서. 

예수님께서 모든 관계의 mediator 가 되신다는 건, 예수님께서 모든 것의 중심, 즉 주인이자 왕이시라는 사실과 통한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mediator 가 되지 않는 관계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한 배를 탄 한 운명 공동체이거나, 아주 친밀한 공동체일지라도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신앙 공동체는 아닐 수도 있다. 

--- <God, Neighbor, Empire> 책에서는 이웃이 된다는 것에는 친밀감보다는 같은 운명을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물론 "관계성의 하나님 안에서" 라는 조건을 내포하고 있는 거겠지. 

<ㄷ백꽃 필 무렵> 의 마을의 예를 들자면, 서로의 집에 뚝배기(?) 가 몇 개인지 서로 아는 친밀감의 공동체보다는, 남자 주인공 어린 시절, 이웃 아주머니들이 다 함께 그를 키운 거나 다름없다는 운명 공동체가 더 이웃다운 걸까?

물론 신앙 공동체 안에서는 예수님께서 mediator 가 되신 관계 속에서 그래야 하는 거겠지.


 

어쩄거나,

하나님의 공동체 밖에서 한 개인이 홀로 생존하거나 성장/성숙할 수 없듯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지 않은 개개인들이 모인 공동체는 생존하거나 성숙/성장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위 본훼퍼 글의 마지막 부분 - Christ stands between us, and we can only get into touch with our neighbors through him. That is why intercession is the most promising way to reach our neighbors, and corporate prayer, offered in the name of Christ, the purest form of fellowship. 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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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
2019. 12. 24. 14:02

칠천 인 카테고리 없음2019. 12. 24. 14:02


어지고 어두워 보이는 세상 속에서, 전혀 기대치 못한 곳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접할 때 놀란다.

오늘, A 국 출신의 지인이 자신의 교회 이야기를 나누는데 감동이었다. 

A 국은 난민이 많이 나오는 나라들 중 하나이다. 그 지인은 난민은 아니고 오래 전에 이민온 케이스

기독교가 주된 종교가 전혀 아닌 나라인데, 그 지인은 자신이 크리스챤이라고 자랑스럽게 나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다니는 교회에 대한 얘기를 해 주는데, 콘서트 등을 해서 선교모금을 하고 그 모금으로 다양한 일들을 (A 국을 위해서도)  하고 있는데, 헌금 사용 등을 모든 교인과 transparent 하게 나눈다고.   수도(물) 와 전기 등을 공급해 주는 사업 등 많은 일들을 하고 있었다.  그 교회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노인들도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고 선교지에 보내기 위한 선물들을 함께 포장한다는 얘기등. 



전혀 예상치 못한 나라출신사람들의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의 교회라서 더 감동이었다.

passionate 하게 얘기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어두운 밤을 밝히는 작은 크리스마스 불빛을 본 느낌이다. 


그 교회 홈페이지를 찾아보니 위와 같은 다양한 모임과 예배가 있다. 

(next "new membership service" 가 2016 이란다. 교회 홈피는 잘 업뎃 안 하는 교회군 :) )


혼자 남았다고 생각하며 우울해 하는 엘리야에게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사람 칠천 인을 남기리니" 하신 그 시절 하나님처럼,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곳에서 여전히 그의 일을 꿋꿋이 하시고 계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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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
2019. 12. 2. 03:53

God, Neighbor, Empire 카테고리 없음2019. 12. 2. 03:53

  부 교양서적처럼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종류의 책이 아니다.

  풀러신학교에서의 강의 시리즈를 묶은 만큼 공부하듯 읽어야 효과적인 책이다. 

  아주 좋은 책이다. 챕터 구성을 왜 그렇게 했을까 의문을 가졌는데, 책을 다 읽고나서 preface 와 introduction 을 읽으며 이해되었다.      

   풀러신학교에서 이 강의 시리즈를 준비한 목적은 "we discerned that church leaders need opportunities to reflect on the integration of the justice, grace, and law in the mission of God..." 라고.

  책 전체가 형광펜, 및 볼펜 밑줄 동그라미 투성이가 되었다. 아직도 여전히 이해되지 않은 개념과 연결고리 등이 있어서 반복해서 읽을 듯하다. 

  실천의 문제는 무겁기만 하다...

 책을 읽다가 아이아빠에게 물었다, "저자는 이렇게 살고 있을까요? 부담감 팍팍 주는 책을 썼는데...  (이렇게 무거운 과제만 던져주는 거 아닐까? --저자 본인은 책 가득한 방에서 연구만 하는 거 아닐까?..)"

 그랬더니 아이아빠 답, "훌륭한 분이야," 

 흠... 어떤 분인가 찾아봐야겠다 


   인터넷의 요약 및 리뷰는 여기 있다 

   http://readingreligion.org/books/god-neighbor-emp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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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
2019. 11. 28. 03:36

Thanksgiving 카테고리 없음2019. 11. 28. 03:36


어린 시절 한국에 있을 때 교회의 추수감사절 예배는, 추수를 celebrate 하는 추석행사로 여겨졌다. 쌀가마니와 송편이 연상되는.


미국에 와서, 또 해가 거듭될 수록 썡스기빙의 본래 의미를 조금씩 더 발견하고 있다.

'추수'감사절보다는 Thanksgiving 의 명칭이 더 어울린다.

 어딘가 보니 모세가 Thanksging 을 "invent" 했다는데..

광야를 헤매서 가나안 땅으로 가던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과

자유를 찾아 영국을 떠나 미국까지 온 필그림의 여정이 비슷해서 그렇단다..


그러니 정착해서 사는 농경민들의 추석과 필그림의 thanksgiving 은 그 성격이 좀 다르다,


얼마전     QT 본문이었던 민수기의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에서의 불평불만은 엄청나서 하나님의 분노를 살 정도인데,

 그에  대비되는 모세의 광야에서의 thanksgiving 이라.


그 thanksgiving 의 의미를 더 깊이 되새기는 기간이 되었음 좋겠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 이주한 이로서,

영적 이집트를 떠나 광야생활 혹은 포로생활을 하는 동시에 이미 이 땅에 임하신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이로서. 


그렇지만  퍽퍽하고 양이 넘 많은 터기를 매년 썡스기빙마다 챙겨먹는 전통까지 따라하기는 싫다.


그림은 여기서 https://www.dailyartmagazine.com/8-paintings-for-thanksgiving-that-will-warm-your-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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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
2019. 11. 22. 12:36

ㄷ백꽃 필 무렵 카테고리 없음2019. 11. 22. 12:36


지막 본 드라마는 미드 실리콘 밸리였고 (시즌 6 는 나중에 몰아서 보려 한다),

한국 드라마는 최근 3-4 년간 잘 안 보고 있었다.

ㅅ카이 캐슬도  몇 편만 보고 마지막 회는 신문기사에 난 걸 읽었고,

화제작이라는 다른 드라마들도 신문사이트에 뜨면 클릭해 보고 내용을 파악하는 정도.


그러다 우연히 만난 멋진 드라마.

netflix 에 뜨길래 클릭해 봤다. 첫장면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유튜브건 netflix 건 뭐건 켜 놓고 화면은 안 보고 다른 일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반해,

이 드라마는 한 장면 한 장면 놓치기가 싫어서 자리에 앉아서 (혹은 운동하면서) 집중해서 봤다.

두고두고 다시 볼 만한 명작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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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
2019. 11. 11. 08:55

피아노 이모 카테고리 없음2019. 11. 11. 08:55

나에겐 이모가 여러분 계신다. 그 중 둘째 이모가 이틀전 돌아가셨다.

이모에 대해서 몇 자 써야, 가슴에  얹힌 이 뭔가가 좀 사라질 듯 하다. 

둘쩨이모는, 막내딸이신 우리 어머니와는 나이차가 15세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둘째 이모는 신체에 장애가 있었다.

다른 자매들은 그 세대기준으로 키가 작지 않은 편인데,  둘쨰 이모는 척추의 문제로  체구가 많이 작았다.  이 사진 당시 초딩 3 학년이던 나랑 키가 비슷할 정도.  (사진의 중앙이 이모)


어린 시절에 놀림을 받았을 수도 있고 평생 움츠려 사실 수도 있었을텐데, 이모는 전혀 그러지 않으셨다.

몸이 약한 이모위해서 외할아버지께서 서울에 장만해 주신 집에 평생 사시면서, 전공인 음악을 살려 평생 피아노 선생님을 하셨다.

그래서 나와 내동생은 이모를 "피아노 이모"라고 불렀다.

이모 댁에 가면 피아노는 당연히 있었으며, 베토벤 얼굴 그림이 걸있었고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흔한 그림), 각종 악보와 LP 판 등이 많았다. 그리 피아노 레슨을 받으러 온 학생들을 위해서인지, 위인전 한 세트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모댁을 방문할 때마다, 그 위인전 중에서 헬렌켈러만 집중적으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에디슨이나 퀴리부인 링컨 같은 분들의 위인전도 있었을텐데...

아마도 몸의 장애를 이겨내고 살아가시는 이모에게서 헬렌켈러같은 모습을 봐서인지...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 당시에도 내가 왜 이렇게 헬렌켈러만 읽지? 스스로도 의아해했었다. (국민학생이었는데)



리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이모가  젊은 시절 이쁘기도 했고 활달해서, 남자분들과 데이트도 많이 하셨다고

그러시다 신체건강하시고 성격좋고 성실하셨던  이모부를 만나 결혼하셨다. 

80-90 년대, 두 분은 강남 한복판에서 음악 학원을 하셨다. 이모부께서는 학원 밴 (봉고차)를 운전하시는 등의 일을 하셨다. 



나와 동생도 이모의 학원에 다녔었다. 나는 바이올린을 배웠고 동생은 피아노를 배웠다.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있던 원장실은 어른들의 아지트 비슷했다. 원장실 소파에 이모들과  (대학생이던) 사촌언니오빠들이 모여앉아 수다도 떨고 배달음식도 시켜먹던 기억이 난다. 중딩이었던 우리는 레슨을 받아야했고.

이모가 학생들 레슨을 시키는 모습도 기억난다.  당신보다 덩지가 더 큰 학생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시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박자를 맞추시던..

이모는 항상 에너지 넘치셨고  명랑하셨고, 삶에의 애착과 열정이 대단하셨다. 

내가 본 사람들 중 가장 낙관적 사람 중 하나이시다.


이모부가 돌아가신 후, 이모는 다른 지역으로 학원을 옮기셔서,  최근 1-2 년 전까지도 운영하셨다. 

몸이 안 좋아진 후, 집에 계시면서도 동네사람 피아노 레슨을 하기도 하셨다고.

이모께서는 피아노 선생님, 혹은 학원 원장 선생님이라는 자부심으로 평생을 사셨고 몸의 장애를 극복하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일찍 은퇴 안 하시고 80 대 중반까지도 일하셨는지.. 잘 모르겠다...


돌아가시기 전 몇 달은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어서 많이 고생하셨다고 한다.

그래도 돌아가실 때는 주무시듯 편안히 가셨다고 한다.


내가 대학교 여름방학 때 한국에 나가서 이모학원에 찾아간 적이 있다.  

이모는 무척 반가워하시며 근처 백화점에 나를 데리고 가서 옷을 사 주셨다. 정작 이모 당신께서는 자신감이 넘치시는데, 나는 속으로 "이 분이 우리 이모라는 걸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해. 내가 이모를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을 이모와 사람들에게 보여야 해" 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우리 피아노 이모는 실제로 너무나도 자랑스러운 분이시다. 

이런 내 맘이 이제는 하나님 곁에 계신 이모께 전달되기를 바라는 맘에서 이렇게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편히 쉬세요, 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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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leasing2jc